유래와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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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떡과 고명
떡은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겨먹는 우리 민족의 특색있는 주식물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에서 떡이 생겨난것은 시루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청동기시대(약 4천년전)부터였다고 보고있다.
떡에 대한 자료는 세나라시기의 유적이나 고사 등에 많이 보인다.
고구려 고국원왕릉의 앞칸 벽화에는 시루를 얹어놓고 무엇인가 찌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떡을 찌는 모습을 형상한것으로 보아진다.
떡은 명절때는 물론 생일이나 혼인잔치, 제사와 같은 가정대사때, 그리고 귀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 흔히 만들어먹었다.
항간에서는 떡방아 찧는 소리와 떡메소리가 높이 울려야 명절을 쇠는것 같고 잔치기분이 난다고 하였다.
우리 인민들이 즐겨 만들어먹은 떡은 크게 두가지 즉 순 낟알로만 만든 떡과 낟알에 다른 음식감들을 넣어 만든 떡으로 갈라볼수 있는데 전자는 년중 아무때나 별식으로 해먹었고 후자는 주로 해당 계절에 나는 음식감들을 리용하여 음식의 계절적특색이 살아나게 만들어먹었다.
쉬움떡은 쌀가루를 감주나 막걸리로 반죽하여 부풀게 발효시킨 다음 쪄서 만든 떡이다.
기지떡, 기주떡은 술을 발효시키는 공정을 당시의 말로 《기주한다.》고 한데로부터 붙은 이름이며 쉬움떡은 증기로 쪄낸 떡이라는 뜻이다.
쉬움떡에서 고명은 떡맛을 돋구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이다.
현대에 와서 많은 음식들에 눈맛을 좋게 하기 위하여 고명과 장식을 하고있는데 고명이 처음으로 도입된 음식이 바로 쉬움떡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명이라는 말은 쉬움떡에서 유래되여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는것으로 보고있다.
옛날 우리 인민들은 쉬움떡에 대추로 《복(행복의 뜻)》자나 《수(장수의 뜻)》자를 새기고는 그것을 떡에 새긴 글자라 하여 《고명(떡 고, 새길 명)》이라고 하였다.
쉬움떡의 고명감으로는 주로 대추와 밤, 곶감 등을 쓴다.
쉬움떡은 향기와 색갈이 독특하고 맛있는 고명이 있어 먹음직스럽고 씹는 맛이 매우 좋으며 잘 쉬지 않는다.
쉬움떡은 년중 아무때나 만들어먹을수 있었지만 특히 따뜻한 날씨로 하여 몸이 나른해지고 식욕이 떨어지는 봄철에 특식으로 많이 해먹었다.
주목할만 한것은 봄철의 파일(이전에 음력으로 사월 초여드레를 명절로 이르던 말)에 석남나무의 잎을 넣고 만든 쉬움떡을 별식으로 먹은것이다.
그 잎은 크기가 진달래잎과 비슷하고 닭알모양 또는 길둥근모양이며 독특한 향기가 나는데 예로부터 민간에서 진통제로 써왔다.
삶은배단물
삶은배단물은 배를 익혀서 만든 료리이다.
옛 기록에는 리숙이라고 씌여있는데 리는 배를 의미하는 한자식표기이다.
삶은배단물은 주로 가을철이나 겨울철에 기본식사가 끝난 다음 쓰이였다.
《시의방》에 의하면 삶은배단물은 배의 껍질을 벗긴 다음 베서 속을 빼내고 물을 부어 삶다가 꿀을 넣어 식혀서 잣을 띄운것이다.
또한 《진찬의궤》에서 궁중에서 쓰는 삶은배단물은 배 25알, 잣, 후추 각각 1홉, 생강 5홉, 꿀 2되로 만들므로 민간에서 만드는 삶은배단물에 비하면 음식감의 가지수도 많고 배합비률도 높으며 화려하고 영양가도 높았다고 씌여있다.
제호탕
제호탕은 고려약음식감인 매화나무열매, 백단향, 사인, 초과, 축사씨 등을 보드랍게 가루내여 꿀을 넣어 끓이면서 여기에 율무가루를 적당히 섞어 단지에 넣어두고 여름한철 드문드문 한숟가락씩 찬물에 타서 마시는 여름철더위를 막는 음료였다.
밀수
밀수는 꿀에 물을 타 만든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세나라시기에 이미 꿀이 식생활에 리용되였으나 밀수도 그 이전시기부터 있었다는것으로 볼수 있다.
기록상으로는 조선봉건왕조시기 문헌에 찹쌀밀수, 송화밀수가 보인다.
《시의방》에 의하면 찹쌀밀수는 꿀물에 찹쌀가루를 탄것이고 송화밀수는 꿀물에 송화분(솔꽃가루)을 탄것이다.
밀수에 쓰이는 찹쌀가루는 찹쌀로 밥을 지워 말리웠다가 망에 갈아 겹채에 쳐서 쓰며 송화밀수는 여름철에 만들어 마시는데 일반적으로 송화가루를 많이 얻기가 힘들므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수단이나 밀수는 다같이 꿀물로 만든 음료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마시는 절기에서는 수단은 무더운 여름철에 마시였다면 밀수는 사철 마시는 음료라고도 할수 있다.
감주
감주는 백미밥에 길금가루를 두고 삭혀서 만든 음료이다.
백미밥을 끓는 물에 넣고 길금가루를 둔 다음 죽처럼 고루 저어서 따끈한 곳에 며칠간 두면 삭으면서 부글부글 피여올라 감주가 된다.
감주는 이전 함경도, 평안도지방의 농촌들에서 많이 만들어먹었다.
《고려도경》에 왕성의 긴행랑에 백미장을 만들어 길가는 누구나 마실수 있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여있는데 여기서 백미장은 백미를 푹 끓여 만든 미음을 시큼한 맛이 날 정도로 숙성시킨것으로서 갈증을 푸는데 좋은 감주와 같은것이라고 볼수 있다.
감주, 식혜는 다같이 밥에 길금가루를 두고 삭혀서 만든 단음료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식혜는 밥에다 과일, 고기류를 더 넣는것이 달랐다.
따라서 감주는 공기에 담아 마신다면 식혜는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소금
소금은 사람들이 하루도 먹지 않고서는 살수 없는 귀중한 식료품이다.
사람들이 매일 먹는 음식가운데서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것이란 별로 없다.
그리하여 옛날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것이 무엇인가 하는 수수께끼의 답을 소금이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것은 소금이 사람들의 식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맛있는 식료품이라는것을 보여준다.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맛이 없다.
소금은 료리에 적은량이 들어가지만 음식의 맛을 돋구는데서는 가장 중요한 조미료로서 그야말로 《금》과 같이 귀하고 없어서는 안되는 양념감이다.
우리 선조들은 바다가의 암초나 바다나물에 붙어있는 염분을 채취하여 음식의 간을 맞추는데 리용하였으며 고대시기에는 직접 소금을 생산하여 식생활에 썼다.
옛 기록에 고대조선에는 물고기와 소금이 많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오랜 옛날부터 소금을 식생활의 중요한 기초식료품으로 널리 리용하여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세나라시기를 걸쳐 고려시기에 와서도 소금생산과 소비는 더 늘어났다.
특히 고려시기인 1309년에 고려정부는 《도염원》이라는 관청까지 설치하고 전국의 소금전매권을 장악통제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소금은 주로 서해안의 간석지들에서 많이 생산되였다
소금은 료리에 직접 짠맛을 줄뿐아니라 음식물에서 여러가지 작용을 한다.
소금의 짠맛은 다른 맛과 일정한 비률로 섞으면 그 맛을 더 세게 하거나 약하게 해준다.
또한 음식감을 부드럽게 하거나 잘 굳어지지 않게 하며 음식물의 물기를 뽑아내며 음식물을 더 차게 하는 역할도 한다.
기름
기름은 고소한 맛을 내는 영양가있는 식료품이다.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기름을 식용이나 조명용으로 리용하여왔다.
사람들은 불이 발견된 후 음식물을 익혀 먹게 되면서 국물우에 뜨는 기름을 알게 되였다.
국물우에 뜨는 기름은 그 성분이 물과는 다르므로 그것을 떠내서 음식물을 볶거나 지지는데 쓸수 있었다.
이 과정에 사람들은 그것이 영양가가 매우 높고 음식의 맛을 좋게 하며 입맛을 돋구어주는 훌륭한 식료품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후 사람들은 점차 의도적으로 기름기가 있는 음식감을 오래 끓여서 물을 증발시키고 기름만 얻어내는 방법을 알아냈으며 지방질이 포함되여있는 음식감을 가마에 쪄서 압착틀에 눌러짜는 방법으로 기름을 얻게 되였다.
이렇게 기름은 물우에 뜬것을 떠내서 음식물가공에 리용한 시초적방법으로부터 가마에 넣고 오래 끓여 증발시킨 다음 기름만을 얻어내는 방법과 기름짜는틀(압착틀) 같은것으로 얻는 방법으로 만들어내였다.
세나라시기의 문헌에는 참기름을 쓴 내용과 잔치용납페로 기름을 쓴 사실이 기록되여있다.
또한 고려시기에 기름과 꿀로 만든 기름꿀과자가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소문난것으로 보아 기름의 종류와 그 생산량이 늘어났으며 따라서 기름짜는 방법도 더욱 발전하였다고 볼수 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기록에는 기름의 종류와 기름짜는 방법, 그 도구까지 소개되여있다.
이에 의하면 기름의 종류는 참기름, 콩기름, 피마주기름, 락화생기름, 수유기름, 목화씨기름, 소기름, 수박씨기름, 차조기름, 봉선화씨기름, 순무씨기름 등 10여종에 달한다.
이가운데서 식용기름뿐아니라 조명용기름, 화장용기름으로 쓰인것도 있었다.
또한 기름짜는 방법도 그 이전시기부터 써온 재래식방법과 기름틀에 의하여 짜는 비교적 발전된 방법도 있었다.
《규합총서》에 의하면 속성기름짜는 방법으로는 참깨 한되를 찧어 끓는 물에 잠군 후 물우에 뜬 기름을 숟가락으로 떠내서 다른 그릇에 담아 끓이면 물은 다 졸고 기름만이 뜬다고 하였으며 다른 한가지 방법으로는 깨볶은것을 물을 부은 보시기에 넣어 밥우에 찌면 기름이 물우에 뜬다.
이것을 숟가락으로 떠내여 다시 끓이면 한사람의 손님대접용으로 넉넉하다고 하였다.
또한 들깨를 날것으로 찧어 밥우에서 쪄낸 다음 주머니에 넣어 도마에 놓고 돌로 누르면 기름이 흘러나온다고 썼다.
이것으로 보아 앞의 방법은 동물성기름을 얻는것처럼 음식감을 끓는 물에 잠그어 끓여 얻는 방법이라면 뒤의것은 음식감을 가마에 쪄서 눌러 짜는 방법이라고 볼수 있다.
이밖에 《규합총서》에는 참깨기름을 짤 때에는 먼저 타작한 들깨가 기름이 많이 나며 두세번째 타작한것은 적게 난다.
또한 수박씨를 볶아 기름을 짜면 매우 향기로우며 차조기 아홉되에 깨 한되를 섞어 가루를 만들어 기름을 짜면 맛이 향기롭고 아름답다 등 구체적인 내용들도 기록되여있다.
이와 류사한 기름짜는 방법은 《부인필지》에도 씌여있는데 콩으로 기름을 짜면 담하고 음식에 치면 좋다.
목화씨기름도 대단히 좋으며 봉선화씨기름은 좋으나 먹으면 이가 빠진다고 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우리 나라의 가정들에서는 한꺼번에 많이 필요한 대사용기름과 같은것들은 나무로 만든 기름틀에서 짜냈다.
유물로 전해오는 재래식기름틀은 웃판, 밑판, 받침축대로 되여있는데 밑판우에 기름원료를 놓고 밑판과 련결된 웃판을 얹어놓은 다음 국수분틀처럼 그우에 사람이 올라서서 누르면 밑판홈을 통하여 기름이 흘러떨어진다.
밑판홈밑에는 흘러내리는 기름을 담을수 있는 기름병이 놓여있다.
기름은 보통 온도에서 액체상태와 고체상태로 된 두가지 종류가 있으며 녹음점에 따라 리용률도 서로 다르다.
즉 녹음점이 낮은 기름은 튀기나 생나물료리에 쓰며 녹음점이 높은 기름은 볶음이나 당과류가공에 쓴다.
식초
식초는 산뜻하면서도 신맛을 내는 양념감이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땅에 떨어진 과일들을 발효시키는 과정에 신맛을 내는 물질을 얻어냈으며 이것을 식생활에 리용하였다.
식초는 우리 나라에서 여러가지 발효식료품을 만들어 식생활에 리용한 세나라시기부터 있었다고 보아진다.
이시기 식초는 발효식초로서 부드러우며 거친맛이 없었다.
식초는 고려시기,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여러가지 음식감을 가지고 만든것으로 하여 그 종류도 더 많아졌다.
기록에는 초, 조, 산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우며 전해지고있는데 이것들은 다 시다는 뜻을 가지고있다.
초는 백미, 찹쌀, 좁쌀, 수수쌀, 보리쌀, 밀쌀 등 알곡류나 지어 도라지, 창포, 감, 매자, 포도, 능금 등을 가지고도 만들었다.
밀로 식초를 만드는 방법은 《음식지미방》에 구체적으로 전해온다.
그에 의하면 밀을 사흘정도 물에 담갔다가 말리워 다시 잘 찐 다음 누룩 한되를 섞고 우에 닥나무잎을 덮어둔다.
닥나무잎이 누렇게 뜨면 그것을 걷어버리고 볕에 말리워 까불어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부어 봉하여 40일 두면 익어서 초가 된다고 하였다.
식초는 신맛을 내므로 음식물을 매우 부드럽게 하고 살균작용도 한다.
식초는 주로 회, 생채같은데 많이 쓰며 생선의 뼈를 연하게 하고 비린내를 없애는데 리용되였다.
또한 초간장, 초고추장을 만드는데도 많이 쓰이였다.
오늘날에는 산을 기본성분으로 하는 합성초가 만들어져 발효초와 함께 음식물가공에 리용되고있다.
고추
고추는 료리의 색을 아름답게 하고 매운맛을 내는 양념감이다.
우리 나라에서 고추는 16세기이후부터 재배하였다.
옛 문헌인 《지봉류설》에는 고추를 남만후추라고 쓰고 남만후추는 센 독을 가지고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고추를 번초라고도 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고추를 널리 재배하였으며 매운 김치나 고추장 등 고추가루를 넣은 음식을 만드는데 널리 리용하였다.
고추가 재배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나라의 음식발전에서는 큰 변화가 이룩되기 시작하였다.
고추가 나오기 이전시기에는 무우동치미나 백김치와 같이 고추를 전혀 넣지 않은 음식을 먹었다면 고추가 재배되면서부터는 통배추김치, 깍두기, 보쌈김치 등 맛좋고 저장성이 높으며 보기에도 좋은 김치들이 출현하였으며 식혜와 매운탕, 고추절임 등 독특한 민족음식들도 생겨나게 되였다.
고추는 우리 나라에서 전국적으로 다 재배되였는데 북쪽지방의 사람들이 고추를 특별히 좋아하였다.
특히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먹는 풍습은 북쪽지방사람들속에서 먼저 생겨났으며 맛이 맵고 얼벌벌한 음식은 모두 북쪽음식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고추를 몹시 좋아한데로부터 어느 가정에서나 마당가에 풋고추를 심어놓고 즐겨먹었으며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떠날 때에도 고추장단지부터 준비하였다고 한다.
고추는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과 가까왔던데로부터 《작아도 고추알》, 《고추 맵다한들 시집살이 비할소냐》 등 여러가지 속담과 격언들도 많이 전해지고있다.
마늘
마늘은 매운 맛과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양념감의 하나이다.
단군전설에 마늘이 나오는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에서는 약 5천여년전부터 재배되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옛사람들은 마늘을 신령스러운 풀로 여겨왔으며 이런데로부터 마늘을 먹으면 총명해지고 담이 커지며 건강해진다고 믿어왔다.
고대시기에는 마늘이 군사들의 군량미와 말먹이에서 많은 량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마늘이 살균제의 역할을 하였기때문이다.
특히 연안, 배천지방의 마늘은 맛이 좋으면서도 류달리 매운것이 특징이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기록에 의하면 마늘은 달래의 맛이며 생김은 비슷하나 굵직하고 독기가 더 세다고 하였다.
또한 마늘만을 먹으면 매워서 싫지만 양념으로 치면 입맛이 붙는다고 하면서 배추김치를 하거나 참대순을 가지고 고기찜을 할 때 마늘을 쓰는데 그 맛이 좋다고 하였다.
마늘의 맵고 독특한 향기는 마늘을 짓찧으면 살아나고 열을 가하면 날아난다.
그러므로 마늘을 음식가공에 리용할 때에는 짓찧거나 다져서 써야 하며 끓이는 음식에서는 음식이 거의 다 익었을 때 넣어야 한다.
파
파는 상쾌한 자극성냄새와 매운맛, 단맛을 가지고있는 아주 좋은 양념감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파를 재배하여 조미료와 약재로 리용하였다.
옛기록에 파에 대한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파를 널리 재배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파는 향신남새로 널리 재배되였다.
당시 기록에 굵직하게 자란 파는 동이만 하여 터밭에 들어서면 광주리가 필요없으며 만문한 파뿌리는 짜게 절이고 소담하게 자란 파잎은 향기롭고 매워서 썰어먹던지 아니면 된장에 그냥 찍어먹어도 좋다고 하였다.
또한 푸른 파는 남새중의 으뜸이니 어찌 살찐 양고기에 대비될소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파재배가 아주 잘 되였으며 파가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음식의 맛에 주는 파의 역할을 일찌기 체험한 우리 선조들은 파를 료리가공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향신료로 여기면서 거의 모든 음식에 다 리용하였다.
후추
후추는 특이한 향기와 매운맛을 가지고있는 양념감의 하나이다.
후추는 우리 나라에 사탕과 함께 고려시기 말기에 들어온것으로 전해진다.
후추에는 흰후추와 검은후추가 있는데 열매가 모두 붉은색으로 여물었을 때 이삭채로 따서 물에 담가 연화시킨 다음 비벼서 열매껍질을 벗겨 물에 씻어 해빛에 말린것이 흰후추이며 이삭중의 한두개 알이 붉은색으로 여물었을 때 따서 끓는 물에 잠간 담그었다가 해빛에 말린것은 검은후추이다.
흰후추의 향기와 매운맛은 비교적 순하며 검은후추는 세다.
후추는 우리 나라의 더운 지방들에서 재배되였다.
후추는 주로 고기료리와 물고기료리에 많이 쓴다.
후추는 향기롭고 매우며 상쾌한 맛이 있어 입맛을 돋구고 소화를 돕는 좋은 양념감이다.
민간에서는 건위약으로도 써왔다.
생강
생강은 자극성이 세고 향기로운 냄새와 매운맛을 함께 가지고있는 독특한 향신양념감의 하나이다.
예로부터 《채중개강》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음식을 해먹는데서 겨자와 생강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생강은 특히 물고기료리와 김치에 많이 리용하였다.
생강은 물고기료리에 잘 어울리는 향신료로서 물고기의 비린 냄새를 없애고 료리의 맛을 돋구어준다.
생강은 균과 벌레를 죽이는 작용도 하므로 저장하는 식료품에도 넣는다.
또한 입맛을 돋구며 원기를 회복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생강으로는 생강정과, 생강술, 생강차를 비롯한 당과나 음료를 만들기도 한다.
생강을 말리운것은 건강이라고 한다.
겨자
겨자는 특이한 매운맛을 내는 양념감이다.
겨자는 17세기이후 농업부문을 소개한 문헌들에 그 재배방법이 소개되면서 더욱 활발히 재배되였다.
겨자에는 흰겨자와 누런겨자, 검은겨자가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누런겨자가 많이 재배되고있다.
겨자는 음식의 입맛을 돋구는 중요한 양념감으로서 오래전부터 료리에 널리 리용하였다.
특히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나라의 유명한 평양랭면도 겨자장을 곁들이지 않고서는 그 진미를 다 낼수 없다.
겨자양념장은 김밥, 물고기회, 보쌈, 편육, 돼지고기찜, 불고기 등에 곁들이는데 이때에는 더운물을 두고 발효시킨 겨자에 식초, 간장, 사탕가루를 두고 묽게 개여 만든다.
겨자는 양념장으로 쓰는 외에도 오리고기나 염소고기 등을 재울 때 다른 향신양념감들과 함께 넣으면 맛도 더 좋아지고 누린내도 없어진다.
우리 나라 속담에 《울며 겨자먹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울면서도 먹어야만 하는것이 겨자라고 할 정도로 겨자가 사람들에게 주는 입맛은 독특하다는것을 말해준다.
참깨
고려시기의 기록에 참깨가 널리 재배되였다고 한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참깨를 생산하여 식생활에 리용하였다고 볼수 있다.
특히 검은참깨는 예로부터 약으로 많이 써왔는데 몸이 약하거나 앓고난 뒤에 쓰며 독풀이작용과 소염작용이 있어 상처나 화상에 발랐다.
참깨는 고소한 향기와 맛으로 하여 오래전부터 거의 모든 료리에 양념으로 썼다.
꿀
꿀은 단맛을 내는 단맛감인 동시에 당과와 음료를 만드는 기본음식감이다.
우리 나라에서 꿀벌치는 풍습은 원시시기부터 시작되였다.
특히 세나라시기에 꿀에 대한 수요가 더 높아지면서 꿀벌치기를 많이 하였다.
또한 고려시기에는 기름꿀과자를 만드는데 꿀을 물쓰듯 하였기때문에 국가가 기름꿀과자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강원도지방 26개의 군, 현이 모두 꿀의 특산지로 기록되여있으며 이전의 함경도지방에서는 22개 군, 현가운데 13개의 군, 현에서 꿀이 생산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15세기 후반기에 와서 우리 나라의 벌방지대를 내놓고는 웬만한 산간지방들에서 모두 꿀벌을 쳤다는것을 보여준다.
지난 시기 우리 조상들이 길러온 꿀벌은 지금의 꿀벌과는 다른 토종벌(토봉)이였다.
토종벌은 꿀벌에 비하여 몸집이 작지만 내한성이 강하여 겨울나이를 잘하며 밀랍분비능력이 높은 우점들을 가지고있으며 꿀의 약효도 높다.
그러므로 오늘도 일부 산간지대에서 계속 토종벌을 치고있는것이다.
방안공기나 해빛을 리용하여 받은 꿀은 색갈이 희고 맑다고 하여 《백청》이라고 하였다.
그릇을 가마안에 넣고 물을 끓여 꿀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받은 꿀은 누런 색갈이 난다고 하여 《황청》이라고 하였다.
꿀을 받을 때 리용한 배보자기를 더운 물에 담그어 우러나온 꿀물 또는 그것을 졸인것을 《미수꿀》이라고 하였다.
꿀은 예로부터 《백화지성》(백가지 꽃의 향기)이라고 하여 만병통치약으로 일러왔다.
꿀의 영양가치와 약리적가치는 꿀속에 들어있는 여러가지 효소와 비타민 그리고 꿀원천식물이 가지고있는 약효성분, 여러가지 당류에 의한 복합작용에 의하여 규정된다.
꿀의 일종으로 볼수 있는 왕벌젖은 꿀벌의 유충을 길러내기 위한 독특한 먹이로서 농마즙과 비슷하고 흰고약같은데 여기에는 가치있는 영양소들이 다 들어있다.
꿀은 기름꿀과자, 정과, 다식, 화채, 차, 약과, 약밥, 떡 등 고급한 음식을 만드는데 쓰인다.
순대
순대는 여러가지 순대껍질에 고기나 남새, 낟알, 양념감 등을 다져서 재워넣고 찌거나 삶아낸 음식이다.
우리 인민들이 순대를 만들어먹은 연원은 익혀먹는 음식의 력사와 더불어 오래였다고 볼수 있다.
그것은 불이 발견되고 익혀먹을수 있는 가마와 같은 조리도구들이 나오면서 고기를 가공하여 찌거나 삶아먹게 되였는데 이 과정에 짐승밸을 리용하여 순대를 만들어먹었다고 볼수 있다.
순대에 대한 기록자료는 조선봉건왕조시기 문헌들에 쇠곱장, 단고기국, 소밸증, 소창자찜 등으로 씌여있으며 《시의방》에서 처음으로 도야지순대, 어교순대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여있다.
그후 순대는 기본음식감에 따라 돼지밸순대, 소밸순대, 단고기밸순대, 물고기순대로 불리워지면서 조리방법도 더 구체적으로 소개되였다.
《시의방》에서 돼지밸순대는 돼지밸을 뒤집어 정히 씻은 다음 그속에 록두나물, 미나리, 무우를 데쳐 배추김치와 같이 다져서 두부, 생강, 마늘, 깨소금, 기름, 고추가루, 후추가루 등 갖가지 양념을 돼지피와 한데 버무려 밸에 넣고 두끝을 동여매서 삶아냈다고 씌여있다.
또한 《부인필지》에 소개된 소밸순대는 밸안팎을 깨끗이 씻어 한자길이씩 베고 소고기, 돼지고기, 꿩고기 등에 여러가지 양념장을 섞어만든 소를 넣고 실로 두끝을 매서 가마에 대나무를 넣고 찐것이다.
소밸순대의 일종으로서 《주방문》에는 소의 큰밸에 선지를 넣고 삶은 선지순대도 있다.
단고기밸순대는 《음식지미방》에 단고기국이라고 씌여있다.
단고기밸순대는 단고기의 밸을 뒤집어 말끔히 빼고 다시 뒤집고 소를 가득 넣어 시루에 담아 쪄낸다.
이때 단고기밸은 전날에 미리 손질해놓고 다음날 쓰는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순대는 여러가지 양념감을 피와 함께 버무려 짐승의 밸안에 넣고 가마에서 찌거나 삶아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만든 순대를 일명 조선순대라고도 하였다.
조선순대를 만드는데서 피는 매우 중시되는 음식감이였으므로 피가 들어가지 않는 순대는 조선순대로 보지 않았다.
우리 나라 순대에는 또한 물고기순대도 있다.
물고기순대는 물고기의 배안을 주머니로 삼아 만든 순대로서 명태순대, 낙지순대를 일러주었다.
명태순대는 명태의 밸을 딴 다음 그속에 소를 넣어서 만들거나 대가리를 가지고도 만들수 있다.
명태순대는 만든 후 인차 먹어도 좋지만 겨울에 싸리꼬챙이에 꿰여 밖에 내걸어 얽어두고 필요할 때 몇마리씩 뽑아다 찌거나 구워서 양념장에 찍어먹으면 그 맛이 정말 별맛이였다.
고깔밥,감투밥
고깔처럼 생긴 밥 즉 그릇우에서 높이 수북하게 담은 밥을 이르는 말이다.
지난날에 생활이 곤난하여 제사 같은것을 지낼 때 밥그릇을 보기 좋게 하기 위하여 조밥우에 눈가림으로 한꺼풀 백미밥이나 팥밥 같은것을 씌운 밥그릇을 말하였다.
고깔밥을 감투밥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감투를 씌운것처럼 사발우에까지 수북이 담은 밥이라는 뜻이다.
메주
메주는 찐밥 또는 찐콩에 메주씨를 심어서 곰팽이를 자래워 효소를 축적시킨것이다.
메주로 담그는 장은 조선사람의 식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주요식찬이며 조미료이다.
장맛이 좋아야 전반적인 반찬맛이 다 좋아진다.
우리 나라에서 메주를 쑤고 장을 담그어먹은 력사는 매우 오래다.
예로부터 장은 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든 다음에 그것을 가지고 만들었다.
우리 나라는 콩의 원산지이며 콩을 일찍부터 재배하였기때문에 콩으로 쑤는 메주도 일찍부터 만들어먹었다고 말할수 있다.
메주는 장을 만들기 위한 기초음식감이다.
팥죽땀에 대한 이야기
옛날 어느 한 마을에 아버지와 아들, 며느리가 사는 단란한 가정이 있었다.
어느날 아들은 안해에게 자기가 올 때까지 아버지를 잘 모셔달라고 부탁하고는 장사길을 떠났다.
그래서 며느리는 늘 시아버지밥상을 차리는데 각별한 관심을 돌리면서 남편이 있을 때 보다도 시아버지를 더 잘 모시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식사를 하고나서 한참 지나서는 궁금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어 하였다.
이럭저럭 날이 지나 동지날이 왔다.
이날 며느리는 동지팥죽을 한가마 쑤어놓고 시아버지에게 대접하였다.
시아버지가 팥죽이 그득히 담긴 큰 대접을 비우고 숟가락을 놓자 며느리가 말했다.
《아버님, 한그릇 더 잡수세요.》
《아니, 큰 대접에 한그릇을 먹었으니 배가 부르구나. 그만둬라.》
시아버지는 더 먹고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체면을 차리느라고 사양하였다.
한참 있다가 며느리가 물을 길으러 우물터로 나갔다.
이때 시아버지는 또 궁금해난지라 부엌에 나가 팥죽 한바가지를 떠가지고 뒤울안으로 가서 처마밑 으슥한 곳에 숨어 훌훌 불며 떠먹기 시작했다.
물을 길어가지고 들어온 며느리도 시아버지가 없는것을 보고 팥죽이 더 먹고싶어 한그릇 떴다.
그리고는 시아버지가 들어오면 어쩌나 하며 걱정하다가 그도 역시 시아버지와 같은 생각으로 뒤울안으로 갔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이미 처마밑에 먼저 와 쭈그리고 앉아있는것이 아닌가.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들킨것이 창피하여 엉겁결에 팥죽바가지를 시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아버님, 팥죽 잡수세요.》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오는것을 보자 너무 급해맞아 얼른 감투를 벗어 먹던 팥죽을 담고 다시 썼다.
그러자 팥죽이 땀처럼 이마로 줄줄 흘러내렸다.
며느리가 팥죽을 권하자 시아버지는 시치미를 뗐다.
《며늘애야, 팥죽을 먹지 않아도 팥죽같은 땀이 이렇게 이마에서 뚝뚝 떨어지는구나. 에, 덥다. 에, 더워.》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창피하여 서로 얼굴을 붉힌채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쩔쩔맸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며느리는 무엇이 하나 생기면 이전보다 더 극성스럽게 시아버지에게 대접하고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그 마음에 맞추어 그를 끔찍이 대해주며 살았다.
몇달이 지나 아들이 돌아왔는데 그들 셋은 그동안의 일을 두고 밤새 웃음꽃을 피웠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