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와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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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민족의 식생활방식은 이미 원시시대에 형성되였다.
우리 선조들은 원시시대와 고대에 피, 조, 기장, 수수, 콩, 팥, 벼를 생산하였으며 이때부터 밥을 지어먹었다.
밥이라는 말이 기록상 처음으로 나타난것은 중세기 초인 세나라시기부터이다.
옛날에는 밥이란 말을 여러가지로 표현하였는데 고려시기에는 《박거》라고도 하였다.
밥은 낟알만으로 지은 맨밥과 2~3가지이상의 낟알로 지은 잡곡밥, 여러가지 부음식감들을 리용하여 특이한 맛을 내는 밥료리도 만들었다.
밥을 주식으로 해온 우리 인민들은 밥과 관련한 속담유산도 많이 남겨놓았는데 식생활분야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아무리 아름다운 금강산도 밥을 먹어 배가 불러야 구경할 재미가 있다는 뜻으로 배가 고파가지고서는 아무 일도 할수 없음을 형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또한 《밥 한알이 귀신 열을 죽는다》,《밥이 약이다》, 《밥그릇밑에 건강이 있다》등 속담들은 밥을 많이 먹어야 건강하고 앓지 않는다는 뜻으로 앓는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려면 밥을 잘 먹고 몸보신하는것이 기본이라는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밖에도 《가마가 검기로 밥도 검을가》, 《고운 일하면 고운 밥 먹는다》, 《밥은 열곳에 가서 먹어도 잠은 한곳에서 자랬다》, 《밥먹을 때는 개도 안 때린다》, 《밥 푸다 말고 주걱 남 주면 살림을 빼앗긴다》, 《밥인지 죽인지는 솥뚜껑을 열어보아야 안다》등 생활적인 속담들이 많이 전해 온다.
국수
국수는 천년이상의 력사를 가진 우리 나라의 고유한 민족음식이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국수는 불교절간에서 유래된것이라고 한다.
불교가 번창하던 고려시기(10세기경) 우리 나라 어느 한 절에 칼제비국을 몹시도 좋아하는 대사(중의 우두머리)가 있어 그 절의 중들은 아침저녁을 칼제비국을 만들어먹였다고 한다.
어느해인가 그 절에서 우리 나라 중들의 회합이 었었는데 그 많은 중들에게 칼제비국을 해먹이자니 손이 모자랐다.
그래서 그 절간의 중들이 생각해낸것이 반죽물을 분틀에 넣고 눌러서 음식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처음의 국수였다고 한다.
그리고 보면 국수의 조상은 칼제비(칼국수라고도 함)라고도 할수 있다.
《칼제비 잘하는 사람이 국수도 잘한다》는 옛말도 칼제비와 국수가 인연이 가까운 음식이라는데서 나온것이였다.
국수는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이 누구나 좋아하며 즐겨먹는 음식의 하나이다.
우리 인민의 식생활에는 언제나 밥상과 함께 국수상이 있으며 잔치상이나 돌상에는 의례히 국수를 곁들이는것이 풍습으로 되고있다.
국수에 대한 기록은 고려말기에 처음 보인다.
1444년에 씌여진 《룡비어천가》에는 고려의 장수였던 최영이 손님을 대접할 때마다 국수와 반찬을 분담하여 준비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해동역사》에는 고려때 나라안에서 밀이 많이 나지 않아 국수값이 비싸므로 크게 차리는 잔치가 아니면 쓰지 못하게 하였다고 씌여있다.
이 두 기록자료들에 의하면 국수는 이미 고려시기에 널리 보급되여있었으며 따라서 그 이전시기에도 이미 있었던것으로 짐작할수 있다.
국수에는 국수오리를 만드는 기본음식감에 따라 메밀국수, 밀국수, 농마국수, 강냉이국수 등이 있었다. 이러한 국수들은 기본음식감에 한가지 또는 여러가지 음식감을 섞어만들기도 하였다.
그것은 《음식지미방》이나 《주방문》, 《시의방》에 메밀국수를 메밀가루에 록두가루나 찹쌀을 끓인 물을 섞어 국수를 만든다고 한 기록과 밀국수를 밀가루에 닭알을 섞어만든다고 한 사실을 통해서 잘 알수 있다.
국수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실국수, 칼국수, 올챙이국수 등으로 나누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국수는 분틀에 눌러서 만든 실국수를 말한다.
옛 기록들에 국수에 대하여 《나무문으로 들어가서 쇠문을 지나 더운물에 목욕하고 다시 찬물로 목욕하고나서 갈밭에 드러누운것》으로 쓴것이 있는데 이것은 국수반죽물을 분틀에 넣어서 국수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생동하게 묘사하고있다.
국수는 그 조리방법에 따라 《랭면》, 《온면》, 《비빔국수》로 나누는데 그에 따라 국물과 꾸미를 달리 하였다.
떡
떡은 낟알이나 낟알가루를 반죽하여 익혀서 만들거나 쌀을 쪄가지고 쳐서 만든 음식이다.
떡은 조선사람 누구나 즐겨먹는 우리 민족의 특색있는 주식물의 하나이다.
떡이 생겨난 력사는 시루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청동기시대(약 4 000년전)부터였다고 볼수 있다.
고구려 고국원왕릉의 앞칸 벽화에 시루를 얹어놓고 무엇을 찌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을 떡 찌는 모습이라고 볼수 있다.
떡은 명절에는 물론 생일이나 혼인잔치를 비롯한 경사로운 날에 만들어먹는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되였으며 항간에서는 떡방아 찧는 소리와 떡치는 소리가 높이 울려야 명절기분이 나고 잔치기분이 난다고 하였다.
백결(458~479년)이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방아타령》의 노래를 통해서도 세나라시기에 떡을 만들어 설날에 먹는 풍습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가 지고 달이 바뀌여 한해가 저물어가는 섣달 그믐께 이웃들에서는 모두 쌀방아를 분주히 찧건만 백결네는 살림이 구차하여 아무런 준비도 할수 없었다.
그의 안해가 방아소리를 들으면서 남들은 다 낟알이 있어서 방아를 찧는데 우리는 낟알이 없으니 무엇으로 설을 쇠겠는가고 푸념을 하였다.
이때 백결은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방아노래를 지어 위로하겠노라고 하면서 거문고를 타서 방아 찧는 소리를 내였는데 방아소리와 신통하였다 한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여 쳐서 사람들은 그 이름을 대악《방아타령》이라고 하면서 방아를 찧을 때마다 불렀다 한다.
우리 인민들은 절기에 따르는 명절들에는 떡을 먹어야 명절을 쇠는것 같다고 하면서 여러가지 낟알로 갖가지 떡을 만들어먹기 위해 애썼다.
계절음식과 명절음식을 번지지 않고 해먹은것은 부유한 집들뿐이였고 가난한 집들에서는 그렇게 할수 없었지만 오랜 력사적과정에 떡은 우리 인민의 식생활에서 떼여놓을수 없는 특식의 하나였다.
하기에 떡과 관련하여서는 밥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일화와 설화, 속담들도 많이 전해 오는데 먹는것과 관련된 속담으로서는 밥이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일상시에는 밥을 먹고 명절에는 떡을 특식으로 해먹던 풍습을 반영하여 《밥우에 떡》또 떡은 명절이나 잔치때뿐아니라 귀한 손님이 올 때에도 장례나 제상때에도 만들었으므로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도 생겼다.
《오는 떡이 커야 가는 떡이 크다》,《떡으로 치면 떡으로 치고 돌로 치면 돌로 친다》는 속담은 선은 선으로 갚고 악은 악으로 갚는다는 뜻으로서 우리 인민들이 어찌다 떡을 하면 혼자 먹지 않고 이웃집에 맛을 보라고 인사를 차리는 미풍량속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호상성을 특징짓는데 다른 물건이 아니라 떡을 등장시킨 속담들이다.
이밖에도 《선 떡 가지고 친정간다》, 《친아비 장작패는데는 안가고 이붓애비 떡 치는데는 간다》, 《보기 좋은 떡 먹기도 좋다》 등 해학적이고 생활적인 소재의 속담과 격언들이 많이 전해지고있다.
죽
지난날 우리 인민의 식생활에서 주되는 주식물의 하나는 죽이였다.
죽은 낟알을 기본음식감로 만드는데 밥지을 때보다 물을 2~3배 더 두고 끓여 낟알이 푹 퍼지도록 만든 음식이다.
우리 선조들이 죽을 쑤어먹기 시작한것은 알곡재배를 시작한 원시사회부터였으며 밥보다 먼저 먹어왔다고 볼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조선봉건왕조말기까지도 죽은 보편화된 주식으로 되고있었는데 이것은 18세기의 기록에 《길가에서 죽 파는 소리 그칠새 없다》고 한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우리 나라의 력사기록과 민속자료에서 볼수 있는 죽은 수십여가지가 있었는데 그것들은 조리방법이 다양하고 약리적효과도 높았다.
이로부터 민간에서는 훌륭한 며느리가 되자면 스무가지의 죽을 쓸줄 알아야 한다는 말까지 전해지고있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많은 가정들에서 아침에 주식으로 흔히 죽을 먹었으며 로인들속에서는 아침밥을 먹기 전에 죽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보양을 목적으로 하는 외에 늙은이와 몸이 허약한 사람이나 병이 있는 사람들의 건강회복을 위한데도 있었다.
죽은 또한 먹기가 편리한데로부터 장례 때 상주들을 위한 음식으로도 쓰이였다.
조선봉건왕조초기 봉건국가가 규정한 《극조오례의》라는 책에도 《장례때 슬픔에 지쳐서 밥을 먹을수 없으니 죽을 먹으라》고 하였고 민간에서는 상가집에 팥죽을 쑤어 보내는것을 미풍량속의 하나로 전해왔다.
죽에는 알곡만으로 쑨 죽과 알곡에 여러가지 음식감로 넣어서 쑨 죽이 있었다.
지짐
지짐은 원래 소를 넣고 지지였는데 18~19세기경부터 소를 넣지 않고 지진것을 많이 만들어먹으면서 이름은 그대로 지짐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옛날에는 지짐을 《전병》, 《부치기》라고도 하였다.
황해도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팥이나 록두소를 넣고 지짐을 지지기도 하였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록두지짐, 감자지짐, 밀지짐, 수수지짐, 찹쌀지짐, 팥지짐 등 낟알과 여러가지 음식감을 리용하여 다양하게 만들어먹었다.
이러한 지짐료리는 우리 나라의 고유한 음식미였다.
우리 나라 지짐은 햇곡식이 날 때 물망질을 하거나 이미 있던 가루를 묽게 반죽하여 기름에 지져낸 음식으로서 가공방법이 통속적이고 쉬운것으로 하여 그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해먹던 대중음식이였다.
묵
묵은 메밀, 록두, 강냉이, 도토리 등을 망에 갈아서 얻어낸 농마를 익혀서 식힌 음식이다.
옛날 기록에 의하면 묵은 한자로 《포》라고 씌여있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묵에 여러가지 부음식감을 섞어만든 료리를 좋아하였는데 이것을 《묵채》라고 하였다.
1848년의 《진찬의궤》에 씌여있는 파란록두로 만든 묵채의 부음식감에는 돼지고기, 미나리, 김, 닭알, 고추가루가 들어있다. 《동국세시기》에는 록두묵채를 《탕평채》라고 썼는데 여기에 들어간 부음식감에도 돼지고기, 미나리, 김, 초장이 들어있다.
지난 시기 도토리묵이나 메밀묵, 강냉이묵 같은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점심이나 저녁 한끼 일상음식으로 먹었으나 록두묵 같은것은 명절이나 반가운 손님이 왔을 때 만들어먹는 특별음식의 하나였다.
올챙이묵은 평안도지방의 별식이였다. 풋강냉이철이 되면 강냉이를 따서 작은 구멍이 있는 올챙이묵틀에 넣어서 뽑아내는데 시원한 김치국이나 깨국에 말아먹군 하였다.
국
원래 《국》이란 말은 고유한 조선말이며 《탕》이라고 하는것은 한자음에서 나온 말이였다.
옛날에 《술적심》이란 말이 있었는데 그 뜻은 밥에 국을 곁들여 낸다는 의미였다.
즉 밥상을 차릴 때 특별하게 잘 끓인 국은 아니라도 밥술을 뜨기 전에 숟가락을 적실수 있도록 간단한것이나마 국을 끓였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였다.
우리 인민이 국을 만들어먹어온지는 오래나 력사기록은 고구려시기부터 전한다.
고구려의 《동천왕》이 밥상을 받을 때 왕비가 왕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 근시를 시켜서 일부러 왕의 옷에 국그릇을 엎질렀는데 왕이 성을 내지 않았다는 우스운 일화가 기록되여있다.
우리 인민들은 국을 아침과 저녁을 준비하면서 언제나 더운국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여름철에는 시원한 랭국을 만들어먹기도 하였다.
탕
탕도 우리 인민들이 오래전부터 즐겨먹은 민족료리의 하나이다.
탕이라는 말은 한자어에서 나온 말이였으나 오랜 력사적과정에 우리 말로 굳어지게 되였다.
고려시기의 력사기록에 탕에 대한 자료가 있는것을 보면 탕도 세나라시기 이전부터 먹어 온 오랜 전통을 가진 음식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탕은 국과 공통성을 가지고있으나 차이점도 많다.
국은 국물을 위주로 맛을 내지만 탕은 국물과 함께 음식감의 맛을 다같이내도록 끓였다.
탕은 국물과 음식감이 거의 같은 비률로 구성되여있으며 밥과 같이 먹을수도 있고 독자적인 료리로서 리용되기도 하였다.
탕은 대체로 세가지방법으로 가공하였는데 양탕, 골탕과 같이 한가지 음식감만으로 끓여서 기본음식감의 맛이 두드러지게 한것과 잡탕과 같이 여러가지 음식감을 함께 끓여 그 맛들이 서로 조화되게 한것, 신선로와 같이 음식감들을 제각기 조리하여 끓임으로써 매 음식감들의 독특한 맛을 살리는것 등이였다.
《고려사기》, 《음식지미방》등 력사기록에 나오는 탕들만 보아도《룡봉탕》, 《추어탕》, 《족탕》, 《소고기탕》, 《소처녑탕》, 《열구자탕》(신선로), 《설렁탕》등 수십가지가 된다.
탕중에서 열구자탕(신선로)은 맛이 진귀하여 옛날부터 세계에 널리 알려져있다.
구이
구이는 우리 나라 민족음식에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진 료리의 하나이다.
구이는 구운료리인것만큼 불을 발견한 원시시대에 생겨났다고 볼수 있다.
구이는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조리법도 매우 높은 수준에 있었다.
구이방법을 보면 고기를 꼬챙이에 꿰서 굽는 방법, 불우에 적쇠를 놓고 굽는 방법, 지짐판에서 굽는 방법, 음식감을 종이나 흙에 싸서 굽는 방법 등이였다.
구이음식감은 고기나 물고기를 기본으로 하면서 독특한 향기가 나는 더덕이나 도라지같은 산나물도 리용하였다.
우리 나라 구이는 일찍부터 세상에 명성이 높았는데 그것은 마늘과 참기름을 양념감으로 썼기때문이였다.
마늘속에 들어있는 효소들이 고기를 연하게 하며 누린 맛과 잡맛을 없앨뿐아니라 마늘, 참기름의 고유한 향기가 잘 스며들어 고소한 냄새를 냈다.
구이료리는 같은 음식감을 가지고도 찌거나 볶은것, 졸이거나 삶은것과는 달리 구운 음식의 독특하면서도 고소한 냄새와 맛, 좋은 색갈을 가지는것이 특징이다.
찜
찜은 고기, 물고기, 남새 등 잘 손질한 음식감을 시루나 가마에 넣고 김으로 찌거나 국물없이 익힌 음식이다.
찜료리는 음식감자체의 고유한 맛과 향기를 보존하며 타거나 마르는 일이 없고 음식감의 모양이 그대로 살아나므로 일상적인 식생활에서는 물론 상차림음식으로 많이 리용되였다.
우리 인민들은 오래전부터 찜가공에서 여러가지 방법을 적용하여 찜료리의 특성을 잘 살려왔다.
생선찜, 통닭찜과 같이 원음식감을 통채로 찌는것, 가지찜과 같이 원음식감속에 있는 수분으로 찌는것, 갈비찜과 같이 원음식감에 물을 조금 붓고 끓여서 국물이 고기에 거의 흡수되게 하는것, 해삼찜과 같이 음식감을 저며서 밀가루나 닭알물에 씌워 지진 다음 찌는것 등이 있었다.
또한 양념이 골고루 배게 하기 위하여 음식감을 잘게 썰어서 미리 양념에 재워놓든가 음식감에 칼어임을 하여 양념을 넣고 찌기도 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갈비찜, 생복찜, 붕어찜, 병아리찜, 단고기찜은 왕궁에서 쓰인 특별음식이였다.
병아리찜은 단고기국과 같이 삼복기간에 몸보신용으로 만들어먹었고 닭인삼찜, 잉어찜은 주로 허약자들을 위한 찜이였다.
편육과 백숙
백숙은 고기를 삶아서 식힌 다음 양념감과 같이내는 료리이며 편육은 고기를 삶아서 얇게 편으로 썬 료리였다.
고기를 맹물에 삶았다 하여 《백숙》이라고 하며 편으로 썰어낸다고 하여 《편육》이라고 불렀다.
백숙과 편육은 원음식감자체의 고유한 맛을 그대로 살리고 연하며 기름기가 적고 산뜻한 맛을 주는 독특한 료리이다.
우리 나라에서 원시시기부터 짐승사냥과 집짐승기르기를 해온 조건에서 고기를 원음식감으로 한 백숙과 편육의 력사도 오래다는것을 알수 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고서들에서는 소, 돼지, 양, 꿩, 닭 등 여러가지 짐승고기로 만든 백숙과 편육에 대하여 기록되여있다.
백숙과 편육을 만드는데서 중요한것은 고기를 알맞춤하게 삶으면서 영양물질이 적게 빠지게 하는것이다.
삶을 때 여러가지 고기를 같이 삶지 말아야 하며 너무 높은 온도에서 삶지 않는것이 좋다.
지나치게 삶으면 고기의 고유한 맛이 없어지고 볼품도 적으며 산뜻한 맛도 없다.
반대로 설익혀도 자기 맛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고기를 삶을 때는 미리 모양을 잡아서 끓는 물에 넣고 적당히 익혀 다시 모양을 잡아 식혀 썰어야 한다.
그가운데서도 보쌈편육이나 족편은 모양있게 만들어 식혀서 썰어야 먹음직스럽다.
백숙과 편육은 낼 때 기름, 마늘장, 초간장, 양념간장 등 해당 음식에 맞는 양념장을 따라 낸다.
그래야 고기자체의 고유한 맛을 살릴수 있고 료리의 가치를 높여줄수 있다.
보쌈을 제외한 백숙과 편육은 썰어서 오랜 시간 두지 말아야 한다.
볶음
볶음은 볶음판에 기름을 두르고 남새나 고기, 물고기같은 음식감을 높은 온도에서 짧은 시간에 볶으면서 맛을 들인 료리이다.
볶음은 소금, 장, 기름이 식생활에 널리 쓰이던 세나라시기는 물론 그 이전 시기에 나온것으로 보고있다.
옛 기록들에는 볶음을 《복지》또는 《초》라고 표기되여있다.
복지라는 말이 어음변화되여 볶음으로 불리였고 초는 한자식말이다.
볶음은 높은 온도에서 재빨리 익혀내기때문에 다른 료리에 비하여 영양물질의 손실이 적고 맛을 잘 낼수 있는 우점이 있다.
볶음을 만들 때 연한것은 날것으로 볶고 질기거나 굳거나 물기가 많은 음식감들은 먼저 데치거나 초절임하여 연하게 하거나 물기를 뺀 다음 볶는다.
음식감을 날것채로 볶는것을 생볶음(생초)이라고 하고 데치거나 초절임하여 볶은것을 데친볶음(숙초)이라고 하였다.
튀기
튀기는 고기, 물고기, 남새 등 음식감들을 끓는 기름에 넣고 짧은 시간에 익혀낸 료리이다.
튀기는 기름이 많이 드는 음식으로서 우리 나라에서 식용기름의 력사와 함께 생겨난것이므로 음식감에 밀가루나 닭알물을 씌워 가지고 튀기였다.
고소한 맛과 특이한 향기로 누구나 즐겨하였던 음식이다.
고기튀기에서 대표적인것은 통닭튀기, 꿩튀기, 메추리튀기, 소고기튀기, 돼지고기튀기를 들수 있다.
통닭튀기는 양념장에 재운 닭을 찐 다음 튀기였다.
작은 닭인 경우에는 그냥 기름에 튀겨 내기도 하였다.
생선튀기는 생선을 통채로 또는 토막낸것을 기름에 튀긴것이다.
명태튀기는 그대로 튀기기도 하고 밀가루 또는 닭알물을 씌워서도 튀기였다.
새우튀기도 역시 새우를 껍질을 벗기고 살을 뽑아서 그채로 또는 닭알물을 묻혀서 튀겨냈다.
남새튀기에서는 풋고추튀기, 가지튀기, 감자튀기 등을 일러주었다.
풋고추, 가지, 감자는 썰어 가지고 밀가루 푼 물을 씌워서 기름에 튀겼다.
풋고추튀기는 풋고추를 쪼개서 씨붙은 쪽에만 밀가루물을 바르고 그우에 다시 닭알물을 씌워서 튀기였다.
튀기는 일상생활에서도 만들어먹었지만 명절, 잔치를 비롯한 대사때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였다.
졸임
졸임은 밥반찬으로 조금씩 먹지만 입맛을 부쩍 돋구며 영양가가 높을뿐아니라 보관성이 좋아 우리 인민들이 예로부터 즐겨먹어왔다.
졸임은 음식감들에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 단맛감을 두고 졸여서 만들었기때문에 단맛과 짠맛이 잘 어울리면서 독특한 맛이 나는것이 특징이다.
옛 기록에 졸임을 《손》이라고 썼는데 이것은 한자식이름이였다.
졸임은 밥반찬가운데서 그 종류가 가장 많은 음식의 하나이다.
고기, 물고기, 남새 등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음식감들이 졸임반찬감으로 쓰이였다.
고기장졸임에 대하여 《시의방》에서는 《고기를 큰 덩어리로 잘라 간장에 바싹 졸이거나 고기를 다져서 양념장에 재웠다가 밤알만 하게 빚어 적쇠에서 구운 다음 간장에 졸여 꿀을 발라 달게 한다.》라고 기록하고있다.
졸임에서는 소고기장졸임과 꿩고기졸임, 고등어졸임, 고기채졸임, 풋고추졸임을 대표적으로 들수 있다.
포
포는 기름기가 적은 고기나 물고기를 얇게 저며서 양념으로 간을 하여 말린것이다.
예로부터 포는 식생활에 널리 리용되였다.
고려시기 시인 리규보가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하여 양고기를 구하려고 노력하다가 친구에게서 보내온 양고기포를 받고 너무 고마와 감사의 시를 보냈다고 한것을 보면 포는 고려시기에도 널리 리용되여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규합총서》(1815년)에는 여러가지 포에 대하여 기록되여있는데 그에 의하면 《산포》는 고기를 두텁게 저며서 양념에 버무려서 말린것이며 《장포》는 고기를 넙적하게 져며 기름장을 발라 슬쩍 구워서 도마에서 두드려 간장과 갖가지 양념을 무쳐서 말린것이였다.
편포는 연한 고기를 다져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기름, 후추가루, 깨소금, 잣가루를 두고 버무려 모양을 네모지게 만든 다음 기름을 발라 말리운것이였다.
약포는 고기를 넙적하게 저며 기름장에 재웠다가 채반부에 널어 물기가 가시면 양념에 재웠다가 다시 채반에 펴놓고 잣가루를 뿌려 말리운것이다.
약포는 완전히 마르지 않았을 때 거두어 보관하였다고 한다.
포가운데서 가장 고급한것은 소고기포, 낙지포(편포), 문어포였다.
포는 오래 두고 필요할 때마다 먹을수 있는 전통적인 음식의 하나였다.
포는 그대로 먹기도 하고 다시 가공하여 다른료리를 만드는데도 썼다.
우리 나라의 포료리는 다른 나라에서까지 이름났다.
낙지포는 오늘까지도 동해안일대뿐아니라 전국에 널리 알려져있다.
회
우리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신선한 고기나 물고기, 남새를 리용하여 생것 그대로 데쳐서 회를 만들어먹어왔다.
세나라시기의 기록들인 《수서》, 《신당서》에는 《백제사람들이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를 흔히 익혀 먹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여있다.
《회》라는 말은 고기를 가늘게 썬것을 의미하였다.
회에는 음식감을 날것으로 가공한 《생회》와 슬쩍 데쳐서 가공한 《숙회》가 있다.
고려가요 《처용가》에 회에 대한 가사가 있는것으로 보아 고려시기에도 회를 즐겨먹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회를 만들어먹는 풍습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계승되였고 보다 장려되였다.
회는 크게 고기회, 물고기회, 강회로 구분하였다.
김치
김치는 우리 나라의 가장 특색있는 민족음식의 하나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민족음식이다.
김치는 우리 인민들이 일상적으로 즐겨먹는 남새음식으로서 조선사람들의 겨울철의 반량식일뿐아니라 일등료리로 일러왔다.
우리 인민은 가름진 고기를 먹어도 김치로 입가심을 하며 맛좋은 음식을 먹어도 김치국물을 마시는것을 좋아하였다.
주식물에서 밥이 우리 민족음식을 대표한다면 김치는 부식물에서 민족음식의 특색을 보여주는 손꼽히는 음식이다.
우리 인민들이 창조하고 발전시킨 김치는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다.
김치를 만드는 기본음식감인 남새나 소금이 고대와 세나라시기에 이미 있었으며 조선에서 《짠지》를 만드는 방법이 이웃나라에 전해진것으로 보아 김치는 력사적으로 볼 때 세나라시기 이전부터 있었던것으로 볼수 있다.
김치라는 말이 기록에 나타난것은 고려시기의 리규보가 지은 시 《채마밭에서》부터이다.
고려시기에는 고추가 재배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김치란 고추를 넣지 않은 동치미였을것이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김치는 더욱 발전하였다.
17세기에 고추가 재배되면서 여러가지 양념과 잘 조화된 비교적 완성된 김치들이 만들어졌으며 그 이름도 각이하게 불리워왔다.
여러 기록들에는 김치를 《짐치》, 《김장》, 《진장》, 《침채》, 《침장》, 《짠지》, 《싱건지》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서술하였다.
력사자료에 의하면 고려시기에는 어장고, 침장고(간장, 된장, 김치를 만들고 관리하는 기구)를 만들고 대량적으로 김치를 생산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실록》에는 1409년에 김장고를 설치하였다고 하였으며《삼봉집》에는 고려때의 풍습에 따라 료물고(소용되는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를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여있다.
이 료물고는 남새류와 그 가공품을 두는 곳이기때문에 김장고의 전신이라고 볼수 있다.
절임물의 저장고는 고려시기부터 지었는데 그 이후부터 본격적인 저장고로 발전한것이라고 짐작된다.
김치라는 말은 《침채》에서 그리고 김장은 《침장》에서 유래되였는데 소금물에 담그어 저장한다는 의미였다.
침채는 오랜 세월 내려오면서《침》은 《김》으로 《채》는 《치》로 변음되여 지금은 김치로 불리우고있다.
《김장》이라고 부른것은 김치를 넣은 독을 땅에 파묻기 시작한 때부터였다고보는데 《담그어 저장한다》는 뜻을 담고있다.
《침채》, 《짠지》, 《싱건지》는 김치를 담그는 방법에 따라서 붙인 이름인데 침채는 텁텁한 김치이고 싱건지는 국물이 맑고 간이 싱거운 김치며 짠지는 국물이 없이 간이 짜고 매운 김치를 말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봉건왕조시기에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김장 담그는 기술이 더 다양해지고 여러가지 양념이 고루 들어간 다양하고 특색있는 김치들이 발전하였다.
지방특산김치도 발전하였는데 개성의 보쌈김치, 평안도의 가지김치, 함경도의 갓김치가 그 대표적실례이다.
《규합총서》, 《산림경제》 등 민족료리고전에 기록된 김치종류는 수십여종에 달하며 김치마다 독특한 맛을 가지고있었다.
우리 나라의 김치는 싱싱한 배추와 무우, 오이, 가지, 미나리, 갓 등 남새의 산나물을 기본음식감로 하고 거기에 고추, 파, 마늘, 생강, 배, 밤을 비롯한 양념과 과일, 물고기, 젓갈 등을 종합적으로 섞어만들었으므로 시원하면서도 쩡한 맛, 향기로우면서도 상쾌한 맛, 시큼한 맛을 가지고있다.
김치라기보다 하나의 절묘한 고급료리라고도 말할수 있는 김장김치, 각별히 시원하면서도 향긋한 맛을 주는 갓김치, 온갖 고급양념감들의 맛이 고르롭게 조화된 영양가 높은 보쌈김치 등은 특별히 이름이 높다.
김치가운데서 가장 널리 담그어먹은 김치는 김장김치였다.
재능있고 탐구심이 강한 우리 인민들은 오랜 생활체험과정에 겨울에도 비교적 싱싱한 남새를 먹을수 있는 방법을 창안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김장김치였다.
옛날부터 음력으로 10월 립동이 가까와오면 집집에서는 무우와 배추로 김치를 담그었는데 이것을 김장이라고 하였다.
김장철에는 우리 나라의 어느 가정,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김장담그기에 분주하였는데 이것을 한해의 중요하고 큰 일로 여기면서 특별히 품을 넣어 만들기에 힘썼다.
지난 시기 김장김치에서 대표적인것은 통배추김치, 석박김치, 보쌈김치, 동치미, 깍두기, 갓김치 등이였다.
전
전은 고기, 물고기, 남새 등의 음식감들을 얇게 저미거나 다져서 양념에 재웠다가 밀가루를 묻히고 닭알물을 발라 지짐판에 지진 료리이다.
원시시기에 벌써 기름이 식생활에 쓰인것으로 보아 전도 그 연원이 매우 오래다는것을 알수 있다.
전은 열가공과정에 영양물질의 손실이 적기때문에 음식감의 독특한 맛과 향기를 그대로 가지여 만드는 방법이 간단하면서도 특징적이고 료리의 색갈이 아름답고 입맛을 돋구게 하는 우리 나라의 우수한 민족료리의 하나이다.
《부인필지》, 《시의방》, 《정리의궤》 등 여러 고전들에 해삼전, 게전, 생선전, 참대순전, 생강전, 간전, 닭고기전 등에 대하여 많이 소개하고있다.
전은 음식감에 따라 고기전, 생선전, 남새전으로 나눈다.
전은 음식감을 얇게 썰어서 지진것이다.
전을 지질 때 여러가지 꽃무늬로 지지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만든 전은 《꽃전》이라고 하였다.
전을 만들 때 전감을 빨리 익힐수 있도록 얇게 썰었으며 형태가 보장되도록 섬유질이 있는 고기류들은 잔칼질을 하여 가공하였다.
전감은 일반적으로 생선은 그대로 쓰는것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허파나 발통, 련뿌리 등 일부 음식감들은 데치거나 삶아서 쓰기도 하였다.
전을 지질 때에는 낮은 불에서 먼저 웃쪽으로 나올 부분을 지진 다음에 뒤집어서 지져 익혀 색을 내도록 하였다.
꽃전을 지질 때에는 닭알물이 익어서 굳어지기 전에 고명감을 놓아 지져서 고명이 전에 곱게 붙어있게 하였다.
전은 특색있는 조선료리의 하나로서 색이 곱고 각이한 모양으로 쉽게 만들수 있었으므로 잔치상은 물론 명절때나 귀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에도 밥상에 올라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
전은 오랜 옛날부터 조상의 제사음식에서도 빠져서는 안될 필수음식으로 인정되여왔다.
산적
산적은 구이에서 유래된 료리로서 오랜 력사를 가진 우리 나라의 독특한 민족료리의 하나이다.
산적은 고기, 물고기, 남새 등 음식감을 일정한 크기로 썰어 양념에 재웠다가 꼬치를 꿰여 불에 굽거나 지짐판에 지져서 만든 료리이다.
음식감을 보드랍게 다져서 반대기를 만들어 구운것도 산적이라고 한다.
산적(홑을 산, 구울 적)이라는 료리이름자체가 말해 주듯이 산적은 흔히 보는 구이와는 다르게 음식감을 꼬챙이에 엇바꾸어 꿰여서 굽는 특이한 구이방법으로 만들었다.
《도문대작》, 《규합총서》, 《정리의궤》 등 여러 민족료리고전들에 산적에 대하여 씌여있다.
허균이 류배지에서 《도문대작》(1611년)책을 쓰면서 책제목을 《도문대작》이라고 달게 된것은 지난 시기 자기가 맛보던 음식들의 맛을 기록해두고 이것을 보는것을 산적을 씹는것과 같이 자신을 위안한다는 뜻에서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당대사회에서 산적이 인기있는 고급한 료리였으며 허균이 먹어본 음식중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것이 산적이였다는것을 느끼게 한다.
무침
무침은 남새, 생나물, 고기, 물고기를 양념에 무쳐서 만든 료리이다.
무침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특색있는 부식물로서 식생활에 널리 리용되였으며 오늘날에는 세계 각지에서 《나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조선료리의 하나로 알려져있다.
생채는 신선한 남새나 산나물을 생것으로 썰어서 여러가지 양념으로 무친 대중적이며 통속적인 민족음식이다.
이전에는 무침을 《채》라고 불렀던데로부터 남새를 날것으로 무쳐 먹는다는 의미에서 《생채》라고 하였다.
무우생채, 배추생채, 도라지생채, 오이생채, 더덕생채 등이 유명하였다.
생채는 신선한 남새의 고유한 맛과 향기, 영양물질을 그대로 보존한다.
생채를 만들 때에는 자극성이 강한것은 적게 쓰고 단맛과 신맛의 조화를 잘 맞추어 양념해야 제맛을 살릴수 있다.
예로부터 생채를 만들 때에는 반드시 식초를 두었으며 소금, 기름, 파, 마늘, 고추가루, 깨, 겨자, 당분을 써왔다.
생채는 가공법이 간결하면서도 맛있어 누구나 좋아하였다.
생채는 무더운 여름철에 많이 만들어먹은 철음식이기도 하고 끼마다 식탁에 오르군 하던 일상음식이기도 하였다.
나물은 우리 인민들이 다 즐겨먹는 부식물로서 우리 인민의 생활속에 깊이 뿌리박고있는 음식이다,
나물은 산에서 나는 산나물, 들에서 나는 들나물, 계절에 따라 나는 여러가지 남새들, 바다에서 나는 해초류들까지 다 리용할수 있으므로 계절에 구애됨이 없이 사철 만들어먹을수 있었고 가공법도 단순하여 널리 보급일반화된 대중음식이였다.
나물을 일명 《숙채》라고도 하였다.
숙채라는 말은 익혀서 무친 음식이라는 뜻이다.
말린 음식감을 가지고 가공한 나물은 《묵은나물》이라고 하였다.
나물은 양념에 묻히기 전에 음식감을 연하게 만들 목적으로 익히는데 음식감의 특성에 따라 데치는 방법, 찌는 방법, 볶는 방법이 있었다.
볶는 나물은 소금을 약간 쳐서 절였다가 물기를 짠 다음 기름에 볶으면서 맛을 들여 만든다.
예로부터 이름난것은 고사리나물, 콩나물, 록두나물, 구기자나물, 두릅나물, 미역나물, 호박나물 등이였다.
여러가지 나물가운데서도 고사리나물은 고대로부터 널리 리용되여왔는데 잔치상 특히 제상에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음식으로 알려져왔으며 노래로 불리워질 정도로 우리 인민들과 친숙해진 오랜 민족음식이다.
또한 콩나물은 한겨울의 비타민보충원천으로서 우리 나라 어느 가정들에서나 즐겨먹어온 우리 민족의 토속료리로 알려져있다.
대사나 명절음식으로도 손꼽히는것은 콩나물이였다.
나물의 연원이 오래고 사람들의 식생활에 가까왔던것으로 하여 나물과 관련한 풍속들도 전해지고있다.
옛 기록들에 의하면 우리 인민들은 정월대보름명절아침에 묵은 나물을 먹으면 그해에 건강하여 앓지 않는다고 하면서 고사리, 고추잎, 호박오가리, 박, 오이, 버섯, 참대순 등을 저장하였다가 나물을 만들어먹는것을 풍습으로 지켜왔다.
한가위날에 일부 지방에서는 곰취나물, 오이나물, 무우나물 등을 별식으로 만들어먹었다고 한다.
랭채는 익혀서 식힌 고기나 물고기에 향기롭고 연한 남새를 섞어 여러가지 양념으로 맛을 들인 랭료리이다.
랭채는 시원하고 산뜻한 맛을 줄뿐아니라 화려한것으로 하여 입맛을 당기게 하고 소화흡수를 좋게 해준다.
랭채는 기름기가 적은 고기나 물고기를 주로 쓰는데 고기는 익혀서 물고기를 쓰는 경우에는 데치는 방법으로 익혀서 쓴다.
잘 알려진것은 록두묵채, 수정묵채, 닭고기오이랭채, 새우랭채, 전복랭채, 팔미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