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와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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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전과 국화술
국화는 찬서리에도 지지 않고 피여있는 생활력이 강한 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국화를 조선사람의 강직한 성품과 련관시키며 몹시 사랑하여왔다.
국화는 우리 인민들의 정신문화생활뿐아니라 식생활과도 련결되여있으니 그 대표적실례가 바로 국화전과 국화술이다.
국화전은 찹쌀가루에 국화꽃을 섞어 반죽하여 지진 지짐이다.
우리 인민들은 봄날에 진달래화전을 만들어먹는것과 마찬가지로 국화가 만발하는 가을날에는 국화전을 특식으로 지져먹으면서 계절의 향취를 한껏 느끼군 하였다.
국화전은 특히 중구날의 대표적인 절식이였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푸르던 산천이 그림처럼 울긋불긋한 색갈로 아름답게 물드는 단풍의 계절을 그저 보내기 아쉬워 음력 9월 9일을 맞으며 산에 올라가 단풍도 구경하고 별식도 만들어먹으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내군 하였다.
우리 조상들이 음력 9월 9일을 명절로 쇤것은 이날이 밝은 해, 달을 상징하는 좋은수라고 하는 《아홉구》자가 겹치는 날이기때문이였다.
따라서 이날을 《중구》 라고 불러왔다. 중구는 《중양》이라고도 일러왔다.
국화전과 마찬가지로 국화술도 중구날의 대표적인 음식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오랜 옛날부터 술을 담그어 명절날과 같이 즐거울 때와 경사가 났을 때, 여러 대사때 널리 리용하여왔다.
우리 나라에서 술과 관련한 이야기들은 벌써 고대시기의 기록들에 적지 않게 보인다. 옛기록에 의하면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술을 마시고 가무를 한다고 하였고 마한에서도 5월과 10월에 바쁜 농사철이 지나면 한데 모여 술을 마시고 여러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춘다고 하였다.
세나라시기에 이르러 술제조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옛 기록에는 고구려사람들이 일찍부터 술을 잘 빚었다고 서술되여있다.
발해, 고려시기를 거쳐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서는 술제조기술을 종합체계화하고 연구보급하기 위한 사업이 활발히 진행된 결과 술의 종류가 늘어나고 양주업이 더욱 완성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일부 력사기록들만 보아도 《음식지미방》에는 40여종, 《림원십륙지》에는 무려 140여종의 술이 종합편찬되여있으며 그와 관련한 기술적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여있다.
우리 인민들이 전통적으로 주로 마셔온 술들은 소주와 청주였다.
소주는 알곡, 감자, 도토리 등 농마질원료를 당화 및 발효시켜 만든 발효액을 증류하여 얻은 술이다.
소주는 담근 술을 고아 증발시켜 이슬을 따로 받아낸 술이라 하여 로주(《이슬 로》,《술 주》)라고 하였고 불을 때서 만든다고 하여 화주, 술이 맑고 희다고 하여 백주라고 불렀다.
소주는 주정이 높아 큰 잔에 많은 량을 마시기 어렵기때문에 작은 잔으로 조금씩 마시였다.
그래서 조선봉건왕조시기 사람들은 작은 술잔을 가리켜 《소주잔》이라고 하였다.
청주는 농마질원료에 누룩과 물을 두어 발효시킨 다음 압착청정하여 만든 술이다.
청주는 매우 맑고 투명하며 산도가 낮아 시큼하거나 텁텁하지 않고 해로운 물질이 적다.
청주를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약주라고도 하였는데 그 리유에 대하여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하나는 18~19세기 이름있는 학자 서유구가 고심하던 끝에 특별히 좋은 술을 만들었는데 그의 아명이 약봉이고 그가 살던 곳이 약현이였으므로 《약봉이 만든 술》, 《약현에서 만든술》이라는데서 유래되였다는것이다.
그리고 술을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된다는데서 나온 말이라고도 전하여온다.
리유가 어떻든 청주는 약주로 불리우면서부터 조선술로 알려지게 되였다.
그리고 약주라는 말은 술에 대한 고상한 명칭으로 쓰이게 되였으며 술을 권할 때 경의를 표시하여 《약주 한잔 드십시오.》라고 하는것은 조선민족의 하나의 습관으로 되였다.
우리 인민들이 예로부터 마셔온 술들가운데는 이러한 소주와 청주말고도 밑술을 막걸러 대중음료로 만든 탁주도 있었고 소주 또는 청주에 여러가지 음식감을 넣어 맛을 돋군 약용술 또는 가향술이라고 하는 특별한 술들도 있었다.
약용술에서는 도소주를 제일로 꼽아왔다.
도소주는 설명절에 특별히 마셔온 술인데 계피, 조피, 흰삽주뿌리, 도라지, 방풍 등 여러가지 고려약재를 넣어서 만든것으로서 이것을 마시면 병이 생기지 않고 건강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도소주를 마실 때에는 나이가 적은 사람부터 마셨다.
이러한 술돌림법에는 설을 계기로 나이를 한살 더 먹는 젊은 사람은 축하하고 늙은 사람은 위안하는 뜻이 담겨져있었다고 한다.
한편 가향술가운데서는 솔꽃술, 참대잎술, 배꽃술 등과 함께 바로 중구날의 국화술을 으뜸으로 쳐주었다.
국화술은 국화꽃과 그 줄기를 넣고 만든 술이다.
국화술은 보통 가을철에 담그어 한해동안 두었다가 다음해 중구날에 마셨는데 이렇게 만든 국화술은 장수에 좋다고 일러왔다.
가을철의 시원한 화채
가을철의 특식목록에서 빠져서는 안되는것중의 하나는 화채이다.
화채는 가을철에 많이 나는 사과와 배 그리고 오미자나 들쭉같은 과일들을 꿀물에 타서 만든 음료이다.
화채는 꿀과 신선한 과일을 기본음식감으로 하여 만들기때문에 달면서 과일의 향긋한 맛과 색갈을 그대로 보존하고있으며 매우 향기롭고 보기 좋다.
뿐만아니라 사람의 몸에 필요한 수분과 당분을 보충해주어 피로를 빨리 회복시키기때문에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
주부들의 지혜의 산물-비빔밥
비빔밥은 우리 선조들의 창조적지혜와 근면성이 낳은 우수한 발명품의 하나이다.
옛날에는 《골동반》 또는 《화반》이라고도 하였는데 여기서 《골동》은 오래되였거나 미술적으로 값있는 오래된 도구나 기물인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음식을 섞은것이라는 의미이며 《화반》은 밥우에 얹은 가지가지 음식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것이 그야말로 꽃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헌상으로는 비빔밥이 1800년대말기의 《시의방》에 처음 나오지만 리용되는 음식감들과 만드는 방법이 매우 구체적이고 또 일찌기 밥이 우리 인민들의 기본주식으로 되여있었다는 사정을 놓고볼때 상당히 오래전에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 등장한 음식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옛날부터 비빔밥은 반병두리(양푼과 모양이 같으나 썩 작으며 뚜껑이 있는 놋그릇의 한가지)나 대접에 담아 나박김치와 따끈한 장국을 곁들여먹는것이 상례로 되여있었다.
여러사람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할 때 남이 먹는 비빔밥이 더 맛있어보여 한술두술 나누어먹다가 《함께 비비자》고 밥을 모아 비비는 경우도 있었는데 여러가지를 넣고 함께 비빈 밥을 너도나도 떠서 먹는 기분은 참으로 좋았다고 한다.
그만큼 비빔밥은 정답고 소탈한 느낌을 갖게 하는 소박한 음식의 하나이다.
비빔밥이 생겨나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전해지고있다.
하나는 우리 인민의 근면한 로동생활과정에 생겨난 음식이라는것이다.
옛날 우리 농민들은 봄철의 씨붙임때면 아침새벽부터 별이 뜰 때까지 논밭에서 부지런히 일하였다.
그리하여 농가의 아낙네들은 씨붙임때에는 남정들의 점심식사와 새참을 싸들고 들로 나가군 하였다.
그런데 음식을 나르는 아낙네들에게 걱정스러운것은 밭길을 걸을 때 그릇에 담은 찬들이 쏟아져 흩어질수 있는것이였다.
그래서 생각한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비빔밥으로 불리우는 이 음식이였다.
아낙네들은 옹배기같은 그릇에 밥을 담고 그우에 여러가지 찬들과 고추장을 올려놓은 다음 그 밥그릇을 광주리나 바구니에 넣고 들로 나갔는데 이렇게 하니 밭길을 걸을 때 크게 근심하지 않아도 되였을뿐아니라 밥과 찬을 비벼먹는것 또한 별맛이였다.
이렇게 생겨난 비빔밥은 점차 훌륭한 민족음식으로 발전하게 되였다.
다른 하나의 설은 우리 인민들이 한해의 마지막날인 섣달그믐날저녁에 1년을 무사히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묵은 음식이 해를 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모두 모아 한그릇에 담아 먹던 관습으로부터 비빔밥이 나왔다는것이다.
어느 설이나 다 우리 인민들과 주부들의 영특하고 깐진 생활기풍이 엿보이는 이야기이다.
비빔밥은 어느 지방에서나 다 만들어먹었지만 특히 이름난것은 해주지방의 비빔밥이였다.
해주지방의 별식으로서 불리운 해주비빔밥은 다른 지방의 비빔밥과 만드는 방법은 비슷하였으나 특이하게 수양산의 고사리와 이 지방에서 많이 나는 김을 섞어만드는것으로 하여 유명하였다.
청신한 향기가 풍기는 쑥떡
떡은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겨먹는 우리 민족의 특색있는 주식물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에서 떡이 생겨난것은 시루를 만들어쓰기 시작한 청동기시대(약 4 000년전)부터였다고 보고있다.
떡에 대한 자료는 세나라시기의 유적이나 고사 등에 많이 보인다.
고구려 고국원왕릉의 앞칸 벽화에는 시루를 얹어놓고 무엇인가 찌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떡을 찌는 모습을 형상한것으로 보아진다.
떡은 명절때는 물론 생일이나 혼인잔치, 제사와 같은 가정대사때 그리고 귀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 흔히 만들어먹었다.
항간에서는 떡방아 찧는 소리와 떡메소리가 높이 올려야 명절을 쇠는것 같고 잔치기분이 난다고 하였다.
우리 인민들이 즐겨 만들어먹은 떡은 크게 두가지 즉 순 낟알로만 만든 떡과 낟알에 다른 음식감들을 넣어 만든 떡으로 갈라볼수 있는데 전자는 년중 아무때나 별식으로 해먹었고 후자는 주로 해당 계절에 많이 나는 음식감들을 리용하여 음식의 계절적특색이 살아나게 만들어먹었다.
쑥떡은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의 특색있는 봄철음식으로 널리 알려져있었다.
쑥떡은 쫄깃쫄깃하고 청신한 쑥향기가 있어 맛이 좋으며 빨리 쉬거나 굳어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지금도 우리 나라에서는 늦은 봄이면 쑥떡을 해먹는 풍습이 일반화되여있다.
고명이라는 말이 유래된 쉬움떡
쉬움떡은 쌀가루를 감주나 막걸리로 반죽하여 부풀게 발효시킨 다음 쪄서 만든 떡이다.
기지떡, 기주떡은 술을 발효시키는 공정을 당시의 말로 《기주한다.》고 한데로부터 붙은 이름이며 쉬움떡은 증기로 쪄낸 떡이라는 뜻이다.
쉬움떡에서 고명은 떡맛을 돋구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이다.
현대에 와서 많은 음식들에 눈맛을 좋게 하기 위해 고명과 장식을 하고있는데 고명이 처음으로 도입된 음식이 바로 쉬움떡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명이란 말은 쉬움떡에서 유래되여 오늘까지 전해진것으로 보고있다.
사실 《고명》에서 《고》는 《떡 고》자이고 《명》은 《새길 명》자이다. 쉬움떡의 고명감으로는 주로 대추, 밤, 곶감 등을 쓴다.
쉬움떡은 향기와 색갈이 독특하고 맛있는 고명이 있어 먹음직스럽고 씹는 맛이 매우 좋으며 잘 쉬지 않는다.
쉬움떡은 년중 아무때나 만들어먹을수 있었지만 특히 따뜻한 날씨로 하여 몸이 나른해지고 식욕이 떨어지는 봄철에 특식으로 많이 해먹었다.
주목할만 한것은 봄철의 파일(이전대 음력으로 사월 초여드레를 명절로 이르던 말)에 석남나무의 잎을 넣고 만든 쉬움떡을 별식으로 먹은것이다.
석남나무는 높은 산지대의 습지에서 자라는 사철푸른잎 작은 떨기나무이다.
그 잎은 크기가 진달래잎과 비슷하고 닭알모양 또는 길둥근모양이며 독특한 향기가 나는데 예로부터 민간에서 진통제로 써왔다.
달짝지근한 메설기
설기는 우리 인민들이 오랜 옛날부터 만들어먹은 떡의 한 품종으로서 우리 나라의 고유한 민족음식이다.
시루에서 쪄서 만든 떡이라고 하여 시루떡이라고도 하는 이 음식은 오랜 연원을 가지고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7~10세기에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친 발해에서 배와 포도로 만든 설기가 볼품과 맛에서 다 극상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발해사람들이 떡을 만들 때 떡의 당분을 보장하기 위하여 배를 채쳐 떡가루와 함께 반죽하고 포도는 말려서 떡반죽에 박아 시루에 쪄냈다는것을 말해준다.
설기의 기본음식감은 백미, 찹쌀, 좁쌀, 수수쌀 등이며 그사이에 놓은 고물로는 팥, 콩, 깨, 록두 등을 쓴다.
메설기는 우리 나라 각지에서 음력 2월 1일(일군날)을 전후한 시기에 특별히 마을주변의 들판, 밭뚝, 길가, 제방뚝 등지에서 자라는 메꽃의 희고 연한 뿌리를 캐다가 특식으로 만들어먹는 음식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매해 음력 2월 1일을 《천하지대본》으로 여겨온 농사의 첫 공정인 밭갈이를 시작하는 날이라고 하면서 하루 푹 쉬면서 잘 먹고 즐기군 하였는데 메설기는 이날의 대표적인 음식의 하나였다.
메설기는 구수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있어 이른 봄날 사람들의 식욕을 부쩍 돋구어준다.
삼질날의 절식이였던 화전
우리 인민들은 봄의 향취를 한껏 맛보기 위해 음력 3월 3일을 명절로 정하고 이날에 한바탕 논 다음 한해농사에 달라붙군 하였다.
이날이 바로 삼질날이였다.
삼질은 력사기록에 《상사》, 《답청절(봄철 풀을 밟아보는 명절이라는 뜻)》로 소개되여있으며 민간에서는 《삼질날》이라고 하였다.
3월삼질에 우리 인민들이 즐긴것은 화전놀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길수로 여겨오는 《석 삼》이 중복되는 날인 삼질날에 식구들끼리 혹은 가까운 이웃이나 부녀자들끼리 들놀이를 조직하고 화전과 같은 특색있는 음식들을 만들어먹으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는데 이날의 들놀이를 꽃을 보며 즐기는 놀이라고 하여 《꽃놀이》, 《화류놀이》또는 화전을 지져먹는 놀이라고 하여 《화전놀이》라고 하였다.
화전놀이는 우리 조상들이 세나라시기이전부터 즐긴 놀이였다.
꽃구경도 하고 화전도 지져먹으며 노래도 부르고 시도 짓던 이 화전놀이는 녀성들이 한데 어울려 음식재능을 보여주는 마당이기도 하였다.
화전은 옛날 우리 인민들이 주요한 봄명절로 쇠여온 삼질날의 절식이자 봄철의 특식이였다.
이날에 우리 인민들이 주로 지져먹은 화전은 진달래화전이였다.
진달래화전은 보기에도 좋을뿐아니라 그 맛 또한 향기로와 잔치상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큰상에 놓기도 하였다.
각이한 이름으로 불리운 록두묵채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늦은 봄이면 시원한 록두묵채를 만들어 즐겨먹군 하였다.
록두묵채의 기본음식감인 록두묵은 우리 인민들이 예로부터 묵가운데서 제일로 일러주던것이였다.
황해도사람들은 여름철에 꼭 록두묵을 해먹는 풍습이 있었으며 묵을 만들 때 나오는 물(묵물)을 미음대용으로 허약한 사람들과 위병환자들을 위한 식사에 많이 리용하였다.
강원도지방에서는 여러가지 낟알로 묵을 만들어먹었는데 그중에서도 록두묵이 특별히 맛이 좋아 명절이나 반가운 손님이 왔을 때 별식으로 만들어먹었다.
우리 인민들은 록두묵에 양념장을 쳐서 그대로 먹기도 하였지만 묵과 여러가지 가공한 보조음식감들을 섞어만든 음식을 더 좋아하였으며 이것을 록두묵채라고 하면서 봄철에 많이 만들어먹었다.
록두묵채는 탕평채, 록두묵채, 묵초나물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웠다.
독특한 민족음료-수면과 화면
수면과 화면은 우리 인민들이 봄철 특히 삼질날에 즐겨 만들어먹은 음료였다.
수면은 꿀물에 얇게 채친 록두묵을 둔것이고 화면은 록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혀서 가늘게 썰어 국수발처럼 만든 다음 오미자꿀물에 넣고 꽃잎과 잣알을 띄운 음료이다.
수면과 화면은 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빼놓을수 없는 철음식이였다.
시원한 랭면과 밀국수
국수는 우리 인민들이 누구나 좋아하며 즐겨먹는 음식의 하나이다.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서 국수는 밥 다음가는 주식물이며 먼 옛날부터 명절날과 대사때 없어서는 안될 필수음식의 하나로 되여왔다.
례하면 《작은 보름》이라고 하던 음력 정월 14일 점심이면 긴 국수오리처럼 오래 살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국수를 먹었고 삼질날에는 록두국수를 별식으로 만들어먹었다.
또 대사때에는 손님들이 음식을 아무리 배불리 먹었다 해도 국수만은 꼭 먹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하는것이 우리 인민들의 손님접대관습이였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국수의 조상은 칼제비국이며 오늘과 같은 국수가 생겨난것은 고려시기(10세기경)라고 한다.
민간에서는 흔히 《칼제비 잘하는 사람이 국수도 잘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바로 칼제비국과 국수와의 이런 선후관계로부터 나왔다고 볼수 있다.
국수에 대한 기록은 고려말기에 처음 보인다.
1444년에 씌여진 《룡비어천가》에는 고려의 장수였던 최영이 손님을 대접할 때마다 국수와 반찬을 분담시켜 준비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해동역사》에는 고려때 나라안에서 밀이 많이 나지 않아 국수값이 비싸므로 크게 차리는 잔치가 아니면 국수를 내지 못하게 하였다고 씌여있다.
이 두 자료들로 보아 국수는 이미 고려시기에 널리 보급되여있었다는것을 짐작할수 있다.
국수는 다른 주식물들처럼 지방적특성을 많이 띠고있었다.
국수는 대체로 자기 지방에서 생산되는 잡곡을 가지고 만들었으므로 메밀가루, 강냉이가루, 감자농마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보통 설설 끓는 물가마우에 국수분틀을 올려놓고 누름대우에 올라앉아 국수를 눌러먹었다.
우리 인민들은 계절에 따라서도 국수를 다양하게 만들어먹었다.
해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무더운 여름철에는 국수를 랭국이나 콩국에 말고 얼음덩이를 띄워 랭면을 만들어먹으면서 땀을 들이였고 반대로 추운 겨울에는 따끈한 국물에 만 온면을 먹으면서 몸을 덥히군 하였다.
여름철에 즐겨먹은 랭면가운데서 가장 유명한것은 평양랭면이였다.
평양랭면은 예로부터 널리 소문났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책인 《동국세시기》에는 메밀국수를 무우김치국물이나 배추김치국물에 말고 거기에 돼지고기를 얹은것을 랭면이라고 하는데 관서지방(평안도)의것이 제일 좋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해동죽지》에도 평양랭면이 제일 좋다고 씌여져있다.
평양랭면이 맛있는 음식으로 소문난것은 국수감, 국수물, 꾸미, 양념, 국수그릇, 국수말기 등에서 특성이 있었기때문이다.
평양랭면이 유명해진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몸에 좋은 영양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옛날부터 장수식품으로 일러온 메밀을 국수감으로 쓴다는데 있었다.
메밀국수는 국수오리가 지나치게 질기지 않고 먹기에 알맞춤하며 메밀의 고유한 성분은 국수의 향기와 맛을 더욱 돋구어준다.
평양랭면이 유명해진것은 또한 국수국물맛이 독특하고 겉보기와 차림새가 특성이 있었기때문이다.
평양랭면의 국물은 구수한 고기국물과 쩡한 동치미국물을 섞어만들므로 맛이 시원하고 새큼달달하다.
그리고 시원한 국물맛에 잘 어울리게 상쾌한 감을 주는 놋대접을 써서 국수사리를 수북이 담고 우에 구미를 보기좋게 얹는다.
이와 같이 평양랭면은 그 독특한 맛으로 하여 말그대로 찬음식이지만 무더운 여름날에는 물론 추운 겨울철에도 누구나 즐겨먹는 음식으로 되였다.
추운 겨울날에 찬 랭면을 먹는것도 우리 인민들속에서 전해내려오는 하나의 풍습이였다.
제일 추운 때에 찬 음식을 먹는 풍습은 우리 인민들의 온돌생활풍습과 관련되여있다고 볼수 있다.
한겨울철에도 온돌방안은 뜨뜻하기때문에 거기서 먹는 시원한 랭면이 별미의 음식으로 될수 있었던것이다.
오늘 평양랭면은 우리 나라 지경을 벗어나 세계에 널리 알려져 조선국수의 대명사로, 조선민족음식의 대표작의 하나로 세상사람들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있다.
여름철에 즐겨 만들어먹은 국수에는 밀보리를 거두어 처음으로 맛보게 되는 5월의 풋밀로 만든 밀국수도 있다.
밀국수는 류두날에 특히 절식으로 해먹군 했다고 하여 류두면이라고도 불러왔는데 이날에 이 음식을 먹으면 여름내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하면서 남녀로소가 다같이 먹었다고 한다.
류두란 지난날 음력 6월 15일을 명절로 이르던 말로써 《동류두목욕》 즉 《동쪽의 내가에서 머리를 감는다.》는 말의 략어이다.
이날 김매기를 끝낸 농민들은 하루를 쉬면서 마을주변의 내가에 나가 깨끗하게 몸을 씻고 제손으로 심어 가꾼 낟알로 햇밀국수를 비롯한 별식을 만들어먹으면서 락천적인 놀이로 즐겼다.
한여름철에 즐겨먹은 여러가지 죽
여름철에 특식으로 즐겨 만들어먹은 음식들가운데는 어죽과 팥죽을 비롯한 죽들도 있다.
어죽은 예로부터 한여름의 더위를 가시고 몸을 튼튼히 보양하는데 효능이 있는 음식으로 일러왔다.
물고기국에 밥을 말아먹는 맛도 좋지만 백미에 물고기를 두고 죽을 쑤면 끓이는 과정에 음식감들의 맛이 서로 배합되여 물고기국밥에 비길수 없는 독특한 맛이 난다.
어죽가운데서 특히 이름있는것은 평양어죽이였다.
평양지방에서는 사람들이 류두날이면 어죽을 쑤어먹는 풍습이 있었다.
이날 사람들은 고추장과 닭고기, 쌀과 함께 가마를 둘러메고 대동강이나 보통강에 나가 목욕을 한 후에 물고기를 잡아 남비에 쌀과 함께 넣고 어죽을 쑤어먹으면서 휴식의 한때를 보내군 하였다.
간혹 놀음에 취해 물고기를 미처 잡지 못했을 때에는 가지고 나갔던 닭고기만 넣고 죽을 쑤기도 하였다.
동해바다가사람들이 즐겨 만들어먹은 섭조개죽(일명 홍합죽) 역시 이름난 어죽의 하나였다.
팥죽도 여름철 특히 삼복때 즐겨 해먹은 음식이였다.
사람들은 한여름의 무더위속에서 팥죽을 쑤어먹으면 온갖 잡병을 막고 몸을 추세우는데 좋다고 하였다.
자연의 소박한 정서를 안겨주는 풋강냉이음식들
바쁜 봄철농번기가 어느덧 지나가고 곡식들이 눈에 띄게 쭉쭉 자라는 무더운 여름이 오면 바야흐로 첫 수확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립추를 전후로 하여 터밭에 심은 강냉이에는 팔뚝같은 이삭이 달린다.
농가들에서는 이 이삭을 따서 그대로 삶아먹기도 하고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먹기도 한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풋강냉이를 삶아먹기 좋아하였다.
삶은 풋강냉이는 그 맛이 달콤하고 만문하여 먹기에 좋을뿐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연의 소박하고 구수한 정서를 함뿍 안겨준다.
평안도지방에서는 삶은 풋강냉이에 건뎅이젓을 찍어먹는것을 좋아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또한 풋강냉이로 묵, 올챙이국수, 지짐 등의 음식들도 만들어먹었다.
여기서 올챙이국수란 되직하게 쑨 풋강냉이묵을 구멍 뚫린 바가지에 넣고 찬물속에 뚝뚝 떨어지게 하여 만든 국수로서 국수발모양이 올챙이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올챙이국수는 평안도지방의 별식이였다.
이 음식은 18세기경부터 만들어먹어온것으로 보아진다.
여름철 몸보신에 으뜸가는 단고기국과 육개장
한 여름예 접어들면 찌는듯한 무더위가 지속되는 삼복이 찾아온다.
삼복은 우리 나라에서 년중 제일 무더운 시기이다.
《복》이라는 말자체가 엎드린다는 뜻으로서 너무 무더워 움직이기 싫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있다.
이 시기에는 사람들의 기력이 심히 떨어진다.
그래서 우리 인민들은 전통적으로 삼복때가 되면 더위를 피하여 서늘한 곳으로 찾아가거나 특별한 음식들을 만들어먹으면서 더위를 물리치고 건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과정에 단고기국도 생겨났다.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삼복때가 되면 의례히 단고기국을 생각하면서 이 기간에 적어도 그것을 한두번은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것으로 여기고있다.
그만큼 우리 사람들의 생활에서 삼복과 단고기국은 서로 뗄수 없이 련관되여있다.
삼복에 단고기국을 먹는것은 고려의학에서 더운것으로 더운것을 다스린다는 《이열치열》의 원리에서 유래된것으로 보아진다.
즉 삼복때 더위로 하여 떨어진 식욕을 돋구고 허약해진 몸을 추켜세우며 이 시기에 생길수 있는 병들을 예방하자면 더운 성질의 단고기를 먹어야 한다는것이다.
삼복때 단고기를 푹 무르도록 끓여서 양념을 두고 먹으면 땀을 내고 더위를 막을뿐아니라 건강을 보호한다고 하여 단고기국은 일명《보신탕》이라고도 불리워왔다.
사람들은 삼복때의 단고기국물은 발잔등에 떨어져도 약이 된다고 하였다.
단고기국을 만드는 방법은 지방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는데 평안도지방에서는 된장을 풀어두고, 황해도에서는 된장과 고추장을 두고 단고기국을 끓이였고 일부지방에서는 간장으로 국물의 간을 맞추고 단고기와 기타 보조음식감들을 밀가루를 묻혀 삶았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단고기국에는 꼭 조밥을 말아먹었다.
좁쌀은 일단 밥을 지은 다음에는 백미보다 잘 풀어지거나 식지 않는 가공학적특성을 가지고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하여 조밥은 단고기국과 같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뜨거운 상태로 먹어야 맛을 제대로 느끼게 되는 국에 아주 적합한 주식류라고 할수 있다.
조밥이 단고기국에 어울리는 주식류로 볼수 있는 근거의 다른 하나는 이 음식이 다른 낟알로 지은 밥보다 향기가 좋아 단고기국의 구수한 맛을 더 잘 느끼게 해준다는데 있다.
단고기가 식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소고기로 단고기국처럼 탕을 얼벌벌하게 끓여먹었는데 이것을 숙칭 육개장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소고기음식에는 고추가루를 쓰지 않거나 적게 쓰지만 육개장은 단고기국처럼 고추가루를 많이 두고 끓여 얼벌벌하게 만들었다.
보양효과가 큰 닭탕과 닭찜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더위로 인해 식욕이 떨어지고 몸이 축가는 무더운 삼복때에 닭고기로 여러가지 보양음식들을 많이 만들어먹었다.
함경도지방에서는 병아리보다 조금 큰 닭의 배속에 양념을 발라 쪄서 만든 병아리찜을 해먹었다.
어떤 지방들에서는 닭인삼탕을 삼복때의 특색있는 음식으로 여겼다.
닭인삼탕을 옛날에는 《효성탕》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이 간직하고있는 고상한 미풍과 부모에 대한 자식의 지극한 정성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깃들어있다.
먼 옛날에 부모에게 극진한 한 자식이 앓고있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의원으로부터 부모를 살리자면 닭과 삼으로 탕을 끓여먹여야 한다는 말을 들은 그 효자는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것을 구하려고 하였다.
이에 감동된 《신선》이 닭인삼탕을 선사하였는데 그의 부모들은 그것을 먹고 하루아침에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래서 자식의 지극한 효성이 깃든 탕이라고 하여 닭인삼탕을 《효성탕》이라고 불렀다는것이다.
닭인삼탕의 기본음식감의 하나인 인삼은 세계적으로 건위강장제로, 만병통치약으로 공인된 으뜸가는 장수보약이다.
우리 나라에서 인삼생산의 력사는 매우 오래다.
인삼생산은 오랜 기간 야생하는 산삼을 채취하는 방법으로 진행되다가 18세기에 와서 산삼의 인공재배가 성공함으로써 보다 대량적으로 진행되게 되였다.
인삼은 조선의 특산품으로서 개성지방을 중심으로 많이 생산되였으므로 흔히는 《고려인삼》, 《개성인삼》으로 불리웠으며 다른 나라들에도 널리 알려졌다.
닭인삼탕은 영양가 높은 닭고기에 장생불로의 명약인 인삼을 넣어 만든것으로 하여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속에서 그 무엇에도 비길수 없는 최고의 보양음식으로 인정되여왔다.
칠월칠석 수단
칠석은 음력 7월 7일을 명절로 이르던 말이다.
지난시기에는 이날이 오면 집집마다 저녁밥을 일찍 지어먹은 다음 모기불을 피워놓고 퇴마루나 마당에 펴놓은 멍석우에 둘러앉아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하늘의 견우와 직녀에 대한 전설을 들으면서 견우성과 직녀성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밤을 보내군 하였다.
수단은 바로 이날에 즐겨 만들어먹은 음식이다.
《칠월칠석 수단이요 팔월추석 송편이라》는 말도 있는데 우리 인민들은 칠석날이면 의례히 수단을 만들어먹군 하였다.
수단은 얼음물같이 차게 하여 먹는다고 하여 《빙단》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맛이 향기롭고 단것이 사람들의 구미를 무척 돋구어준다.
수단에는 보리를 기본음식감으로 하는 보리수단도 있는데 보리수단은 개성을 비롯한 여러 지방의 이름있는 음료의 하나였다.
시큼털털한 막걸리
막걸리는 농마질원료를 누룩으로 발효시킨 다음 그대로 걸러 만든 술이다.
밑술을 막 걸러 만들었다고 하여 그 이름도 막걸리이다.
막걸리는 고장에 따라 탁주, 탁배기, 농주, 농탁이라고도 불러왔다.
여기서 《탁주》는 술의 색갈이 희뿌옇게 흐리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며 《탁배기》는 희뿌연 술이 가득 담긴 그릇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였다.
《농주》와 《농탁》은 농민들이 즐겨마시는 음료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였다. 전국적으로 흔히 통용된것은 《막걸리》였다.
지난시기 막걸리는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서 떼여놓을수 없는 음료로 되여왔다.
비록 주정이 높지 않고 맑지는 못하지만 막걸리는 설을 비롯한 명절때에는 명절음료의 하나로, 또 잔치와 같은 가정대사때에는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음료로 널리 애용되였다.
특히 막걸리는 시큼털털하고 시원하여 무더운 여름 농사일의 쉴참이나 점심때에 농민들이 매우 즐겨 마시군 한 음료였다.
우리 인민들이 막걸리를 얼마나 좋아하고 많이 마셨는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우리 나라에 왔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들일의 쉴참에 큰 사발에 막걸리를 담아 쭉쭉 들이키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 어떻게 일하는가고 몹시 놀라와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있다.
설명절음료-수정과와 식혜
설명절에는 시원하면서도 달고 향긋한 맛이 나는 수정과를 많이 만들어 마셨다.
수정과에 쓰는 곶감은 여느 곶감과는 달리 살이 부드럽고 달면서 감칠맛이 있는 감을 골라 껍질을 벗긴후 꼬챙이에 꿰지 않고 그대로 말리는 방법으로 만든다.
전해진데 의하면 원래는 수정과를 복숭아, 딸기, 석류, 배 같은것으로 만들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곶감을 쓰게 되였다고 한다.
수정과는 술을 마신후 해장하는데 효과가 크며 피를 맑게 하고 피로를 푸는데도 좋다.
식혜도 수정과와 같이 설명절음료로 많이 리용되였다.
특색있는 조선의 당과-강정과 약과
강정은 설날에 반드시 해먹은 우리 나라 고유의 당과이다.
옛날의 강정은 찹쌀가루로 떡을 쳐서 자그마하게 썰어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 엿 또는 꿀을 바르고 튀긴밥이나 깨 같은것을 묻힌것이였다.
민간에서는 강정을 산자라고도 하였다.
17세기말~18세기중엽사람인 리익의 말에 의하면 본래 산자라는것은 쌀을 튀긴것을 이르던 말인데 강정에 산자를 붙이게 되면서부터 강정과 산자를 같은 개념으로 쓰게 되였다는것이다.
강정은 설날의 으뜸가는 당과였을뿐아니라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나 제상을 차릴 때 없어서는 안될 음식이기도 하였다.
약과는 밀가루를 꿀과 기름으로 반죽하여 꿀을 재워 만든 당과이다.
약과는 달고 고소한 단음식으로서 영양가가 높으며 굳지 않고 바삭바삭하여 먹기에 좋다.
그러므로 약과는 설날뿐이 아니라 기타 명절날과 결혼잔치를 비롯한 가정대사때에도 널리 쓰이였다.
강정과 약과는 구체적인 음식감과 만드는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다같이 기름과 꿀을 리용하여 만드는 과자류라는 의미에서 기름꿀과자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였다.
고소한 돼지대가리보쌈
돼지는 메돼지에서 기원하였다.
돼지가 사람에 의하여 길들여진것은 지금으로부터 9천년전으로 보고있다.
고조선시기와 세나라시기에 집짐승고기가운데서 생산량이 제일 많았던것은 돼지고기였다.
고구려벽화무덤에 돼지가 그려져 있는것이라든가 《돼지를 잔치에 보내기도 하고 제사때에도 썼으며 돼지기름은 추위를 막는데도 리용되였다.》는 기록이 있는것을 보면 돼지고기가 세나라시기에 중요한 음식감으로 널리 리용되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세나라시기 이후에도 돼지를 많이 길렀는데 당시에는 종축을 전문으로 하는 가정들까지 있어 돼지고기생산량이 이전시기보다 급속히 증대되였다고 한다.
돼지고기가 많이 생산되다보니 그것으로 만든 음식의 품종도 부쩍 늘어나 우리 나라 음식의 구성을 보다 풍부히 하였다.
옛 료리고전들에는 새끼돼지찜, 돼지내포탕, 돼지발쪽백숙 등 많은 돼지고기음식들을 기록하고있다.
지난날 평안도지방에서는 돼지를 먹이조건이 좋은 봄, 여름에 부쩍 길러 가을철에 가서 잡아먹고는 그 대가리를 건사했다가 설날이 오면 그것으로 보쌈을 만들어먹군 하였다.
이 지방사람들이 설명절에 돼지대가리보쌈을 해먹는것을 풍습화한데는 정월명절에 이 음식을 만들어먹으면 년중 건강하고 근심이 없어진다고 믿어왔기때문이다.
돼지대가리보쌈을 새우젓국에 찍어먹으면 닉닉한 감이 없고 고소한 맛이 더 나며 체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유한 민족당과-엿
가정들에서 한해농사를 지어 일정한 량곡을 마련한 뒤 엿을 달여 새참으로 먹는것은 우리 인민들속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풍습이다.
그런것만큼 12월이 되면 농촌집들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해 엿을 자주 하고있다.
지혜롭고 영특한 우리 민족은 낟알이나 감자 같은데 들어있는 농마를 보리길금으로 당화시키는 묘리를 터득함으로써 고유한 민족당과 엿을 만들어냈던것이다.
사탕수수나 사탕무우가 잘 되지 않는 우리 나라에서 엿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당분을 보장할수 있게 하는 좋은 당과류이다.
엿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물엿과 강엿으로 나눈다.
물엿은 엿물이 완전히 굳어지지 않은 액체상태의 엿을 말하는것이고 강엿은 완전히 졸여서 굳힌 엿을 의미한다.
강엿은 그 빛갈이 검다고 하여 검은엿이라고도 한다.
강엿을 잡아당겨 늘구었다가 다시 합치고 또 그렇게 하기를 여러번 되풀이하면 색갈이 희게 되는데 이것을 흰엿이라고 한다.
물엿은 주로 음식가공과 약을 만드는데 쓰이며 강엿은 간식으로 많이 리용된다.
엿에서는 더운 엿에 대추, 밤, 호두, 콩, 깨, 잣 등의 씨앗을 넣어 굳히거나 단고기를 푹 삶아 잘게 다져 엿과 버무려 만든 약엿들이 특색이 있다.
닦은 쌀가루를 물엿과 섞어만든 엿을 태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평안도지방에서 손꼽히는 당과였다.
이 지방에서는 친정집에 갔던 색시가 시집으로 돌아올 때 함지박에 태식을 가득 담아가지고 와서 시켠의 일가친척들에게 돌리는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되였다.
태식은 먼길을 떠날 때 준비하는 량식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