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생활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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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주식으로 하고 국과 장, 김치를 부식물로 하는 풍습
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인민의 식생활풍습은 우리 나라에서 낟알생산이 위주로 된 이후에 생긴 풍습이라고 말할수 있다.
인류발생의 첫 시기 사람들의 주식물은 자연환경과 생산력에 따라 서로 각이하였다.
산을 낀 지대에서 살던 사람들은 짐승을 잡아먹고 살았다.
바다나 강을 낀 지대에서 살던 사람들은 주로 조개나 물고기를 잡아 그것을 주식으로 하면서 살았다.
신석기시대 이후 식물재배가 확대되고 낟알음식이 주식으로 되면서 낟알은 찧어서 밥 또는 죽을 만들수도 있었고 가루를 내여 떡을 만들어먹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식이 낟알인 경우에도 무엇을 일상음식의 주식물로 하는가에 민족에 따라 차이가 있다.
우리 인민들은 오랜 옛날부터 빵을 주식으로 하고있는 유럽나라들과는 달리 밥을 일상음식의 주식으로 하고 떡은 특별음식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식생활관습은 고대, 중세기에는 물론이고 근대이후에도 계승되여왔다.
따라서 밥을 주식으로 하는 관습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 인민의 고유한 풍습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주식에 따르는 부식물도 민족에 따라 차이가 있다.
우리 민족이 먹는 부식물은 그 종류가 많았지만 그가운데서 기본부식물은 국, 장, 김치이다.
국과 장, 김치를 기본부식물로 하였다는것은 식생활에서 다른 반찬들은 밥상에 놓지 않을수도 있었지만 국, 장, 김치만은 음식구성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상시적인 부식물로 되여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민의 끼니음식상에서 국은 대접받는 대상에 따라 종류에서는 다를수 있겠지만 상시적으로 빼여놓을수 없는 기본부식물이였다.
국을 기본부식물로 하였던것만큼 그 조미료인 장도 끼니마다 상시적으로 먹어왔다.
전통적으로 구수한 토장국을 밥상의 일등 진미로 여겨온것이라든가 뚝배기에 부글부글 끓인 된장찌개를 언제나 밥상에 곁들이는것은 우리 나라에서의 고유한 식사풍경이였던것이다.
김치도 끼마다 정상적으로 먹는 음식이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는 물론 그 이전기에도 우리 인민은 고기나 떡, 그밖의 특별음식을 차려놓고 먹는 명절때에도 시원한 김치와 된장국을 빼놓지 않았다.
그렇기때문에 예로부터 김치와 장, 국은 우리 조선의 특색있는 민족음식으로 외국에까지 널리 소문났으며 오늘날에까지도 그 전통이 계승되고있는것이다.
이것은 밥을 주식으로 하고 장, 국, 김치를 기본부식물로 하는 식생활방식이 우리 조선사람들의 고유한 전통적인 식생활관습이라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밥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식사하는 풍습
온돌방에 앉아 밥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온 가족과 함께 따뜻한 음식물을 먹는 풍습은 이미 고대부터 형성되고 공고발전하여온 전통적인것이다.
고대시기에 이미 우리 선조들은 오늘의 문화주택형식과 같은 기둥보식집과 귀틀집에서 온돌난방시설을 갖추어놓고 살았다.
종래의 화독에 의한 난방시설은 움집인 경우에는 일정한 의의가 있었으나 지상가옥에서는 추위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어려웠다.
이런데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집안에 부뚜막을 꾸려놓고 그 열을 허실함이 없이 잘 리용하여 방을 덥히고 안정된 생활을 할수 있는 온돌식 난방을 창안도입하였던것이다.
고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온돌이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된 사실들로 보아 온돌방에 밥상을 차려놓고 앉아서 먹는 우리 민족의 풍습은 이미 고대에 형성되고 후세를 내려오면서 공고발전하여온 전통적인 풍습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하루 세끼 식사하는 풍습
사람들이 하루 먹는 끼니수는 로동생활과 그 과정에 소모된 영양을 보충하는데 맞게 정해지고 굳어지지만 빈부의 차이, 로동강도, 계절조건에 따라서도 달라지게 된다.
세계 여러민족들의 하루 먹는 끼니수를 력사적으로 보면 처음에는 일정한 시간관념이 없이 음식감이 생기는데 따라 불규칙적으로 먹기도 하고 일정한 시간간격으로 하루 또는 세끼를 먹기도 했다.
또는 끼니와 끼니사이에 중참이나 간식을 먹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먹는 문제해결을 위한 오랜 생활과정을 통하여 하루 먹는 끼니수를 불규칙적인것으로부터 사람의 건강증진에서 가장 효과적인 하루 세끼 식사하는데로 넘어갔다.
인류발생의 첫 시기에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떠돌아다니면서 먹을것이 생기는데 따라 불규칙적으로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씨족을 단위로 점차 한곳에 자리를 잡고 알곡재배를 주업으로 하고 짐승기르기도 적극 진행한 신석기시대이후 우리 선조들은 여유있게 생산하여 일정한 량을 저축, 보관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하루의 일과생활에서도 먹을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면서 불규칙적으로 생활하던 때와는 달리 일정한 생활거처에서 자고 날이 밝으면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고 일터에 나갔으며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함께 하였던것이다.
이러한 식생활이 오랜 기간 계속되는 과정에 아침, 저녁, 또는 아침, 점심, 저녁 등 일정한 시간간격으로 음식을 만들어먹는것이 습관으로 굳어졌던것이다.
하루 세끼 먹는 식생활풍습은 먹을것이 생기는데 따라 먹던 불규칙적인 식생활에 비하여 특히 인체 특히 위의 부담을 덜어주며 사람들의 건강증진에도 효과적이고 로동생활과 일과조직에도 적당한것이였다.
따라서 하루 세끼 먹는 습관은 일반적인 식생활풍습으로 계승발전되였던것이다.
하루 세끼먹는 풍습은 기록상으로는 세나라시기에 처음 보인다.
이 자료를 통하여 세나라시기에 하루 세끼를 먹었다는것과 함께 그 이전에도 그러한 풍습이 있었으리라는것을 알수 있다.
우리 선조들이 하루 세끼 먹었다는 기록자료는 고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문헌들에도 있다.
고려시기 평양성에서 대대로 살던 황수라는 사람이 여러 자식들과 같이 모두가 한가마밥을 먹고 살았는데 하루 세끼는 맛있는 반찬을 장만하여 먼저 부모에게 드리고 물러나와서 같이 먹었다고 하였으며 조선봉건왕조시기 대부가 하루 세끼밥을 먹었다고 한것은 그 대표적실례이다.
물론 우리 선조들은 낮시간이 짧은 겨울철에는 하루에 두끼 먹는 경우도 있었으며 힘든 일을 하거나 해가 긴 때에는 간식, 중참을 하여 하루 세끼이상 먹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일상적인 식생활풍습에서는 력사적으로 계승되여오던 하루 세끼 먹는것이 기본이였다.
하루 세끼 먹는데서도 아침과 저녁식사를 중시하여 밥을 새로 짓고 국에 여러가지 찬을 차려놓고 먹었다.
그러나 점심에는 아침에 남겨두었던 간소한 찬을 차려놓고 먹거나 국수같은 간단한 식사를 하였다.
따라서 하루 세끼 식사하는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우리 인민의 고유한 식생활풍습이다.
음식감을 아껴쓰고 식생활을 깐지고 알뜰하게 하는 풍습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음식감을 아껴쓰고 식생활을 깐지고 알뜰하게 조직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음식을 절약하였다는 옛 기록을 통해서도 알수 있으며 식량을 랑비하지 않고 결혼식을 비롯한 대사를 간소하게 한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그러나 조선봉건왕조시기 얼마 안되는 량반관료들의 관혼상제는 랑비와 허례허식이 극심하게 동반되였다.
이처럼 랑비하지 않고 절약하면서도 깐지게 식생활을 조직하는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우리 인민의 식생활풍습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또한 식생활을 항상 깨끗하고 알뜰하게 하였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언제나 깨끗하고 정갈한것을 좋아하였으며 알뜰하게 생활해나가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우선 음식을 만드는 장소인 부엌을 깨끗하게 거두었으며 식기류도 윤기나게 닦아 정성껏 다루어 깨뜨리지 않고 오래동안 쓰기에 힘썼다.
때문에 부엌세간을 잘 갖추고 알뜰하고 정성들여 다루는것은 우리 녀성들의 중요한 품성의 하나로 일러왔다.
옛 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에서는 생활이 곤난한 농민들까지도 그릇을 갖추어 음식을 먹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깨끗하고 알뜰하게 살림살이를 해나가려는 우리 인민의 전통적인 풍습의 시원을 말해주는것이다.
우리 녀성들은 부엌에서 음식물을 만들 때에는 머리수건을 쓰고 흰앞치마를 깨끗하게 둘렀다.
고구려 안악2호 무덤벽화에 시중드는 녀자의 모습과 감신무덤벽화에 달린옷을 입고 앞치마를 두른 녀자의 차림은 부엌일을 할 때 앞치마를 리용하는 습관이 조선녀성의 전통적인 풍습이라는것을 증명해주는 자료로 된다.
부엌일을 할 때 머리수건을 쓰는것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것을 막으며 위생적으로도 좋았다.
또한 앞치마를 두르는것은 음식을 만들거나 다룰 때 문화위생성을 보장하고 활동하는데 편리할뿐아니라 보기에도 좋았다.
이처럼 수천년전부터 머리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다음 부엌일을 해온 사실만 보아도 일찍부터 인류문명을 꽃피워온 우리 민족의 높은 문화성을 잘 알수 있게 한다.
음식을 다양하고 맛있게 만드는 풍습
음식을 다양하고 맛있게 만드는것은 가정의 주부들인 녀성들에게 달려있다고 말할수 있다.
우리 나라 속담에 《한가지 무우를 가지고도 백가지 반찬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같은 음식감을 가지고도 잘 조리하여 다양하게 만들어먹는다는 뜻이다.
재능있는 우리 녀성들은 주식물이나 부식물, 당과류나 음료 등 여러가지 음식들을 솜씨있게 만들었으며 한가지 음식감을 가지고도 맛이 다른 여러가지 음식들을 만들어 식생활을 다양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가지 우수한 조리방법을 창안하고 끊임없이 발전시켜 끓이거나 지지며 볶거나 튀기기, 찜하거나 데치기, 굽는 등의 조리방법만이 아니라 장, 젓갈, 김치와 같이 삭히는 방법에 의한 음식가공방법을 창조하였으며 지방별로도 특색있는 민족음식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음식가공을 잘하는것은 녀성들의 인품을 평가하는데서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되기까지 하였다.
나이많은 웃사람을 존경하고 잘 대접하는 례절
우리 인민의 식사례절에서 특징적인것은 나이 많은 웃사람들을 존경하고 잘 대접하기 위하여 정성을 다한것이였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부모를 비롯한 웃어른들을 존경하고 정성을 다하여 섬기였으며 그렇게 하는것을 인간의 응당한 도리로 여겨왔다.
식생활에서 웃어른들을 존경하는것은 음식을 먼저 대접하는데서 나타났다.
밥을 푸거나 국을 뜨고 반찬을 담을 때 먼저 웃어른들의것부터 담았으며 상을 차릴 때에도 될수록 어른들에게는 좋은 음식을 보장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특히 로인들에게는 음식을 천천히 들도록 독상을 차려서 대접하였으며 웃어른들이 먼저 수저를 든 다음에야 아래사람들이 수저를 들군 하였다.
그리고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의례히 먼저 로인들에게 대접하는것을 례절로 삼아왔다.
특히 가정의 주부들은 나이 많은 웃어른들의 식성과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그에 맞는 음식을 특별히 만들어 대접하기에 힘썼다.
고구려시기 늙은 소경어머니를 부양한 온달에 대한 력사기록자료들을 통하여 비록 어려운 생활형편에서도 부모에게 음식을 정성껏 대접하기 위하여 노력한 우리 인민의 아름다운 풍습을 찾아볼수 있다.
이웃간에 음식을 서로 나누어먹는 례절
우리 인민의 식사례절에서 특징적인것은 다음으로 이웃간에 음식을 서로 나누어먹으며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는것이였다.
우리 인민은 일상적으로 이웃과 음식을 나누어먹는 좋은 풍습을 가지고있었다.
색다른 음식을 만들었을 때에는 그것이 비록 적은것이라 하더라도 이웃집에 조금씩 돌려서 맛을 보게 하였고 손님들을 청하여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어느 한 집에서 잔치를 하면 온동네가 도와주고 잔치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었다.
명절때에도 이웃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함께 즐기는것을 풍습으로 지켜왔다.
또한 우리 인민은 어려울 때나 불상사가 나면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가서 이웃을 도와주는 좋은 풍습이 있었다.
이웃에서 재해로 하여 식량이 떨어져 끼니를 건느는 경우에는 다같이 어려운 살림이지만 끼니쌀이라도 나누어 가져다주었으며 상사가 생기면 마을에서 팥죽을 쑤어 식사를 보장했을뿐아니라 먼 곳에서 상가집에 찾아온 손님들까지 따뜻이 맞아 음식을 대접하였다.
이것도 이웃간에 식생활과정에서 관습으로 굳어진 례절의 하나였다.
손님이 오면 반가와하고 정성껏 대접하는것도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우리 인민의 고유한 미풍이였다.
그것은 13세기의 책인《제왕운기》에 량식없이도 려행하고 길손이 찾으면(손님이 찾아오면) 문닫는 법이 전혀 없다는 기록만 보아도 이미 오래전부터 계승되여오는 풍습이였음을 알수 있다.
량식없이도 려행했다는것은 손님이 오면 언제나 반갑게 맞아들이고 무상으로 숙식대접을 하여온 우리 인민의 고유한 미풍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우리 인민은 언제나 손님이 찾아오면 조금도 구차한 빛을 보이지 않고있는 음식감들을 최대한으로 리용하여 식사준비를 하였으며 될수록 맛있는 음식들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손님과 함께 식사할 때는 주인이 먼저 수저를 들고 손님에게 권하며 맛있고 귀한 음식들은 될수록 손님가까이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손님이 먼저 수저를 놓기 전에 주인이 수저를 놓지 않았다.
이것은 손님이 혼자만 식사하는것 같은 어색한감을 느끼지 않고 식사를 제대로 하게 하기 위한것이였다.
그리고 손님이 식사를 끝내면 인차 입가심을 할수 있도록 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드리였다.
한편 손님은 손님대로 음식상을 먼저 받아도 주인이 먼저 수저를 들면서 식사를 권한 다음에야 수저를 들고 식사하였다.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여 성의껏 대접하는것은 우리 인민의 미풍량속으로서 지난날 우리 나라를 찾아왔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잊을수 없는 인상을 주었다.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의 특징과 우수성
식생활도구란 음식을 만들거나 만든 음식을 담고 나르며 먹는데 쓰이는 기구와 그릇들을 말한다.
식생활도구는 민족료리를 발전시키고 인민들의 식생활을 개선하는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슬기롭고 근면한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한 강토에서 단일민족으로 살아오면서 자연을 개조하기 위한 투쟁과정에 창조적지혜와 재능을 발휘하여 음식을 만들어먹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식생활도구를 수많이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식생활도구는 그 연원이 오래고 민족적특성이 뚜렷할뿐아니라 그 종류와 발전수준에 있어서 그 어느 나라의 식생활도구에 비할바없이 우월하다.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의 특징과 우수성은 첫째로, 그 종류가 많고 형태가 다양한것이다.
우리 인민의 식생활도구는 음식을 만들 때 쓰이는 조리도구, 음식을 먹는데 쓰이는 그릇과 도구, 밥상, 음식을 담아두거나 나를 때 쓰이는 도구 등으로 구분되는데 그 종류가 매우 많다.
그것은 옛 문헌인 《고려도경》에 34종, 《정리의궤》에 60여종, 《증보산림경제》에 64종이 기록되여있으며 현재 조선민속박물관에 보관되여있는 식생활도구가 160여종에 달하고있는 사실만으로도 여실히 증명된다.
물론 이상의 수자는 지난날 우리 나라의 식생활도구에 대한 기록과 보관되여있는 유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의 자료만으로서도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의 종류가 대단히 많다는것을 충분히 알수 있다.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는 종류가 많을뿐아니라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의 다양성은 우선 다른 종류의것은 물론 같은 종류의것도 그 형태가 서로 다른데서 찾아볼수 있다.
같은 밥그릇도 주발, 바리, 애기바리, 오구바리, 바리대, 종발 등 사용하는 사람들의 나이와 성별에 따라 크기는 물론 모양도 각이하다.
주발은 아구리가 넓고 평평한 뚜껑에 꼭지가 없다면 바리는 녀성들의 습성과 기호에 맞게 미관을 더욱 돋구기 위하여 주발보다 아구리가 좁고 뚜껑에 꼭지가 달렸다.
접시도 담는 음식물의 종류에 따라서 음식의 눈맛을 더욱 돋굴수 있게 그 모양이 둥근것, 네모난것, 모를 죽인것, 6각, 8각, 꽃모양으로 된것 등 각이하며 색도 여러가지이다.
단지만 하여도 목이 낮은것, 높은것, 오돌차게 통통한것 등 실로 다양하며 병도 용도에 따라서 물병, 장병, 기름병, 초병, 술병 등 종류와 형태가 각이하다.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의 다양성은 또한 음식종류와 계절에 맞게 음식물을 담는 그릇의 재질과 형태가 다른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음식의 종류에 따라 담는 그릇의 재질, 형태가 각이한데 온도보장을 필요로 하는 음식물을 담는 그릇은 놋이나 질로 형태를 다른 음식그릇과 차이나게 만들었으며 같은 국그릇이라도 설렁탕을 담는 뚝배기, 소고기탕을 담는 놋대접, 맑은국을 담는 왕기대접 등 그릇의 재질과 형태가 다종다양하다.
그리고 신선하고 청량한 음식물을 담는 사기그릇이나 놋그릇이 있는가 하면 시원한 음식인 김치를 담는 하얀 보시기도 있다.
음식그릇은 계절에 따라 같은 음식이라도 담는 그릇의 재질을 달리하였는데 밥그릇인 경우 기온이 낮은 겨울에는 놋으로 만든 밥그릇을, 기온이 높은 여름에는 사기로 만든 밥그릇을 리용하였다.
이처럼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는 세계 그 어느 나라 식생활도구에도 대비할수없이 그 종류가 많고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의 특징과 우수성은 둘째로, 과학성과 위생문화성이 담보되고 실용적가치가 있게 만들어진것이다.
우선 우리 나라의 식생활도구는 어느것이나 할것없이 간편하면서도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음식을 끓이거나 만들 때 쓰이는 가마만 놓고보더라도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가마를 생활도구가운데서 기본도구로 중시하여왔던만큼 밥을 짓거나 음식을 끓이는데 편리하게 만들었다.
가마는 바닥이 두텁고 뚜껑을 꼭 덮을수 있게 되여있어 그안에 열이 잘 보존되므로 밥을 지을 때 속까지 잘 퍼지고 불이 꺼진 다음에도 남은 열에 의하여 뜸이 잘 든다.
우리 선조들은 질이나 오지, 청동, 돌, 쇠 등 여러가지 재료를 가지고 가마를 보기에도 좋고 한번 갖추어놓으면 오래동안 쓸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들었으며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 평생토록 쓰고 자손들에게까지 물려주었다.
우리 나라의 식생활도구가운데서 가장 특색있는 도구의 하나인 신선로를 보아도 놋쇠나 백동으로 만들었기때문에 가볍고 견고하여 오래 쓸수 있으며 음식그릇으로 뿐아니라 화로의 기능도 동시에 수행할수 있게 되여있어 자체로 음식을 끓여먹는데 아주 편리하다.
조선의 숟가락과 저가락은 오늘도 세계에서 가장 실용성있고 위생적인 식사도구로 널리 알려져있다.
숟가락은 그 모양이 독특할뿐아니라 숟가락 하나로 밥을 떠먹고 물이 많은 국, 김치물, 장찌개도 떠먹으며 걸죽한 즙상태로 된 죽을 떠먹기에도 알맞춤하므로 그야말로 만능숟가락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어떤 민족은 숟가락이 없이 저가락으로만 식사를 하는가 하면 어떤 민족은 숟가락은 있으나 국물만 떠먹게 되여있으며 또 어떤 민족들은 숟가락을 한가지 용도에만 리용하게 되여있어 식사를 하자면 여러가지 도구를 필요로 하고있다.
저가락을 놓고보아도 동방의 여러 나라가운데서 금속제 저가락을 쓰는 민족은 유독 우리 나라밖에 없으며 다른 민족들은 나무저가락을 리용하고있다.
우리의것은 이웃나라의 저가락과 달리 지내 길지도 짧지도 않고 아무리 작고 가는것이라도 쉽게 집을수 있다.
음식그릇도 사람들이 리용하는데 간편하면서도 그릇마다에 뚜껑을 덮을수 있게 되여있어 위생성을 보장할수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 나라의 이름난 반상기는 밥그릇으로부터 갖가지 반찬을 담는 그릇에 이르기까지 모두 뚜껑을 씌우게 되여있으며 그릇의 크기도 어떤 음식을 담는가에 따라 달리함으로써 사용하기에 아주 편리하고 위생문화성도 잘 보장할수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식생활도구를 대단히 중시하고 효과있게 리용하여온 우리 민족의 문명정도를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로 된다.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의 특징과 우수성은 셋째로, 실용적가치와 함께 예술적가치가 있게 만들어진것이다.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는 우선 그 모양이 아름다운것이다.
실례로 음식그릇이나 저장용기의 밑굽, 몸통, 목, 아구리와 뚜껑, 손잡이 등 그릇의 형태를 이루는 여러 구성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조화되고 아름다운 륜곽선을 이루고있을뿐아니라 주전자나 잔을 받치는 덧그릇이나 주전자의 뚜껑을 매달기 위한 고리 등이 조형성과 밀접히 조화되여있는것 등은 마치 예술적요구에 의하여 만들어진것처럼 아름답다.
우리 나라의 식생활도구는 또한 색이 독특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에서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사기그릇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푸른색계렬의 그릇은 청색과 록색이 단순하게 배합된 색갈인것이 아니라 비취옥과 같은 느낌을 주면서 자기의 고유한 정서를 자아내는 색갈이므로 우리 나라의것은 다른 나라의 사기그릇처럼 진하지 않고 연하고 선명하며 시원한 감을 준다.
흰색계렬의 그릇은 재빛색, 젖빛색, 순흰색, 청백색 등 색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한결같이 흰 사기물의 고상한 색갈과 형태의 아름다움으로 하여 정결하고 시원하면서도 포근해보이며 부드러운감을 돋구어주고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고유한 색갈이 식생활도구에 그대로 반영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우리 나라의 식생활도구는 색이 아름다울뿐아니라 무늬장식도 독특하고 아름답다.
무늬장식에서는 우리 인민들이 좋아하는 십장생무늬, 장식기법에서는 상감장식, 칠장식, 자개장식기법이 널리 쓰이였으며 새김기법만 하여도 돋을새김, 선새김, 뚫음새김 등 여러가지 새김기법이 쓰이였다.
이러한 무늬장식들은 생동성과 정서성, 무늬구성의 선명성과 간결성, 기법의 정교성으로 하여 하나같이 독특하고 아름답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식생활도구는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색을 바탕으로 하고 독특하고 아름다운 장식과 예술적인 형태미를 이루고있어 오늘날까지도 손색이 없는 우리 민족고유의 우수한 공예품으로 세상에 당당히 자랑떨치고있다.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의 특징과 우수성은 넷째로, 그 연원이 오래다는데 있다.
우리 나라의 식생활도구는 창조된 력사가 아주 오래며 해당 시기 그 발전수준이 상당한 정도로 높았다.
신석기시대에 우리 선조들은 이미 화식도구, 먹는데 쓰이는 그릇과 도구, 저장용그릇을 갖추고 식생활을 조직하였다.
질그릇으로는 음식을 끓여먹고 시루로는 낟알을 쪄서 떡 같은것을 만들어먹었으며 독과 같은 큰 저장용기도 이미 만들어 썼고 뼈로 만든 숟가락, 저가락으로 음식물을 집어먹었다.
이것은 오늘도 일부 나라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습관이 지속되고있는데 비해보면 우리 인민의 음식문화수준이 당시로서도 세계적으로 대단히 발전되여있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고대에는 청동솥, 청동시루, 청동대야, 칠반, 소반, 칠바리, 옥잔 등이 제작리용되였으며 세나라시기에는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의 기본이 이미 갖추어져 그 우수성이 널리 알려졌다.
발해시기를 거쳐 고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우리 나라의 식생활도구는 그 제조기술이 높은수준에 이르게 됨으로써 실용성과 예술성이 겸비되고 과학성과 위생성이 담보된 우수한 도구로 발전하였으며 그것은 이웃나라들에까지 널리 보급되였다.
우리 나라 식생활도구의 높은 발전은 우리 인민이 예로부터 뛰여난 예술적재능과 창조적지혜가 있었기때문이며 우수한 식생활도구를 만들어낼수 있는 물질기술적조건을 갖추고있었던것과도 관련된다.
우리 나라 상차림풍습과 그 특성
상차림풍습은 음식을 그릇에 담아 수저와 함께 상우에 차리는 관습화된 방식으로서 식생활풍습의 중요한 내용을 이룬다.
지혜롭고 재능있는 우리 선조들은 인류발생의 첫시기부터 이 땅에서 살아오면서 오랜 식생활과정에 우리 민족에게 고유한 상차림방식을 창조하고 계승발전시켜왔다.
오랜 력사적과정을 거쳐 관습화되고 계승발전하여온 전통적인 우리 나라의 상차림방식은 지방과 계층에 따라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있지만 일반적으로 일상음식상차림과 의례상차림, 궁중상차림으로 갈라볼수 있다.
우선 우리 나라의 상차림방식에는 일상음식상차림이 있다.
일상음식상차림은 아침, 점심, 저녁 등 끼니때마다 일상적으로 음식물을 차리는 상차림을 말한다.
일상음식상차림은 밥을 주식으로 한 밥상차림과 국수, 죽, 떡, 온반 등 별식을 주식으로 한상차림으로 구분할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밥이 주식이였던것만큼 일상음식상 차림에서도 밥상차림이 기본상차림이였다.
밥상은 일명 반상 또는 진지상이라고 불렀다.
밥상차림에는 독상차림과 겸상차림, 두리반차림이 있었다.
독상차림은 한사람이 먹을 음식을 한상에 차리는 상차림이다.
독상은 존대하는 뜻으로 주로 가장이나 손님에게 차리였다.
독상을 차릴 때 밥그릇은 상의 왼쪽에, 국그릇은 오른쪽에 그리고 간장, 초장, 고추장 종지들은 상한가운데에 놓고 그뒤로 김치보시기, 왼편에는 된장찌개나 젓국찌개그릇, 그 오른편에는 나물접시, 깍두기그릇 같은것을 놓고 그밖에 더 놓을 부식물이 있으면 그 주변으로 질서있게 놓은 다음 숟가락과 저가락을 앞면, 오른쪽에 놓았다.
독상차림에서는 대체로 물이 있는 음식을 담은 그릇은 오른손가까이에 놓고 물기가 비교적 적은 마른 음식을 담은 그릇은 상왼쪽에 놓았다가 식사가 끝날무렵에는 대접에 담은 숭늉을 들여왔다.
반상차림에는 3첩, 5첩, 7첩, 9첩 등 일정한 격식에 따라 상을 차리는 풍습이 있었다.
첩이란 접시를 가리키는데 접시에 담은 부식물의 가지수에 따라 달리 불렀다.
세가지면 3첩반상, 다섯가지면 5첩반상, 일곱가지면 7첩반상, 아홉가지면 9첩반상이라고 하였다.
겸상차림은 두사람이상, 대체로 네사람까지 함께 먹을수 있게 차린 음식상이다
두사람이 함께 먹을수 있게 차린 상을 《겸상》 혹은 《두겸상》이라고 하며 세사람이 함께 먹을수 있게 차린 상을 《세겸상》, 네사람에 해당한 상을 《네겸상》이라고 하였다.
겸상은 가까운 친척이나 다정한 친구사이에 주로 쓰이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독상과 겸상을 구분하여 쓰기도 하였다.
사회적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독상을, 젊고 사회적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는 겸상을 차려놓았다.
두리반차림은 한상에 여러명이 함께 먹을수 있게 차린 상차림이다.
두리반에 음식을 차릴 때 밥과 국만은 각기 따로 담아 차리고 그밖의 찬류는 보시기와 접시에 함께 담아 차렸으며 농가들에서는 국그릇만 각기 따로 놓고 밥은 큰 그릇에 담아 상가운데에 놓고 각기 떠먹는 관습도 있었다.
지난날 우리 인민은 흔히 남자들에게는 독상이 아니면 겸상으로 따로 상을 차리고 나머지 가족성원들, 주로 녀성들과 아이들에게는 두리반에 차리였다.
별식을 주식으로 한 상차림에는 국수상차림, 죽상차림, 떡상차림, 지짐상차림, 국밥상차림, 온반상차림 등이 있었는데 이때의 음식상은 반상차림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부식물종류가 많지 않았다.
다음으로 우리 나라의 상차림풍습에는 의례상차림이 있다.
의례상차림은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하거나 사망일을 맞으며 특별히 차리는 음식상이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어린이가 나서 1년이 되면 첫 생일을 축하하여 돌잔치상을, 커서 시집장가를 가게 되면 결혼잔치상을 차려주었다.
한편 성장한 자식들은 자기를 낳아 키워준 부모들의 사랑과 로고에 대하여 잊지 않고 부모의 나이 60살이 되면 환갑상을, 70살에는 생일 일흔돐상을 차렸다.
부모가 돌아간후에는 살아있을 때 다하지 못한 효성의 표시로 제상을 차리였다.
의례상차림은 일상음식상차림과 다른 특성이 있었다.
잔치상이나 환갑상은 일정한 규범에 따라 될수록 여러가지 음식을 많이 차려놓았다.
혼례상은 일반적으로 맨 앞줄에 과일류, 둘째줄과 셋째줄에 떡, 약과, 포, 삶은 고기, 전, 구이 등 각종 음식을 높이 고여 차리였다.
같은 의례상이지만 환갑상은 잔치상보다 일반적으로 더 높이 고이였다.
이것은 부모들에 대한 효성이 음식을 고이는 높이에 비례한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이 상들은 다 큰상 또는 《바라보는 상》이라고 불렀는데 기쁜 날에 차리는 잔치상이므로 보기 좋으면서도 화려하게 차리는데 커다란 관심을 돌렸다.
제상차림에서는 음식준비에서부터 잔치나 환갑 음식준비와 차이가 있었다.
제상은 죽은 사람을 추모하여 차리는 의례상이다.
제사때 쓰이는 그릇들은 일반적으로 제사의 정숙한 분위기에 맞게 모양이 단정하고 장식이 극히 소박하였으며 목이 길거나 밑굽이 높았다.
제상차림은 음식을 제기에 담아 넉줄 또는 다섯줄로 차려놓았다.
주안상은 술과 안주를 차려놓는 상인데 반가운 손님이 왔거나 가정과 나라의 경사때 특별히 차리는것이였다.
주안상은 외상으로부터 점차 4~6명이 앉을수 있는 교자상으로 변하였다.
주안상차림은 사람수에 따라 종류와 량에서 차이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여러가지 음식을 많이 차리는것이 특징이였다.
그리고 음식도 술안주로 쓸 반찬류를 위주로 차리였으며 떡이나 과일류는 적게 놓았다.
주안상은 차림에서도 격식이 없이 음식물을 먹기 편리하게 놓았다.
다음으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상차림방식에는 궁중상차림이 있었다.
궁중상차림에는 왕과 왕비가 끼니마다 받는 밥상(수라상)과 다과상,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왕이 특별히 받는 어상, 명절때와 왕족의 생일날 그리고 외국사신을 맞이하여 차리는 진연상 등이 있었다.
왕이 받는 밥상은 일상음식상보다 상우에 차려놓는 반찬 가지수가 가장 많은 12첩이였다. (량반들과 부자들은 7첩, 9첩까지 차릴수 있었다.)
어상이나 진연상은 일반의례상차림보다 상에 차려놓은 음식 가지수가 더 많고 호화로왔으며 단번에 다종다양한 음식을 푸짐하게 차리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상차림풍습은 우리 인민의 고유한 식생활관습과 독특한 온돌생활조건, 훌륭한 식사례의범절, 상, 그릇, 수저의 특성과 그 리용방법 등에 맞게 이루어진것으로서 그의 고유한 특성이 뚜렷하다.
그 특성은 첫째로, 음식을 상우에 차려놓고 먹는 시원이 매우 오래며 상차림종류가 많은것이다.
음식을 상우에 차려놓고 먹는 시원이 매우 오래다는것은 이미 고대유적에서 후세의 독상과 비슷한 크기의 나무밥상이 발굴된 사실을 놓고도 잘 알수 있다.
우리 나라의 상차림방식은 창조된 시원이 오랠뿐아니라 그 종류가 대단히 많다.
밥, 죽, 떡, 국수, 지짐 등 주식물 구성에 따라 상차림방식이 서로 다르며 특별히 차리는 음식상은 그 종류가 더욱 많았다.
둘째로, 상차림이 우리 나라의 주택생활조건에 적응하게 이룩된것이다.
다른 나라의 상차림을 보면 대체로 의자에 앉아 식사할수 있게 높은 탁상우에 음식을 차려놓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온돌방으로 된 주택생활조건에 맞게 낮은 밥상에 음식을 차리였다.
셋째로, 음식상에 여러가지 음식의 거의 전부와 그에 따르는 양념을 한꺼번에 상우에 차려낸것이다.
이러한 상차림풍습은 식사할 때 사람들이 자기의 기호와 식성에 따라 이것저것 마음대로 먹을수 있게 하려는데서 생겨난 관습이였다.
그리고 음식종류는 많으나 량은 한사람이 먹을 정도로 맞춤하게 차린것이다.
이것은 음식을 각기 딴 그릇에 담아놓고 먹었던데로부터 생겨난 독특한 관습이였다.
상을 차릴 때 음식그릇과 수저를 식사하는데 편리하게 놓았다.
밥그릇은 언제나 상의 앞줄 중간에서 왼쪽에, 국그릇은 오른쪽에, 국물이 있는 반찬그릇은 가까이에, 마른 반찬그릇은 멀리에, 양념그릇은 누구나 다 리용하는것이므로 상의 가운데에, 수저는 식사하는 사람들이 사용하기 편리하게 오른쪽에 놓는것이 관습화되였다.
넷째로, 음식상을 화려하게 장식한것이다.
떡우에 여러가지 색으로 된 꽃가지를 만들어 꽂아놓았으며 떡자체를 꽃모양으로 화려하게 조형화하여 높이 고여놓기도 하였다.
다섯째로, 예로부터 로인들과 웃사람들을 존경하고 성심성의로 공대하는 례절밝은 우리 인민의 미풍량속이 높이 발양된것이다.
그것은 늙은이들과 웃어른들에게는 겸상보다 독상을 차리며 조금이라도 좋은 음식을 먼저 차려 대접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르는 관습
오늘 우리 녀성들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 때에는 언제나 앞치마를 두르군 한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모든 가정들에서 례사로이 보게 되는 모습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전의 고구려시기의 벽화들에는 녀성들이 달린옷에 앞치마를 두르고 생활하는 모습이 생동하게 그려져있다.
이것은 녀성들이 부엌일을 할 때 앞치마를 리용하는 관습이 매우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을뿐아니라 널리 장려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전해져왔다는것을 보여준다.
앞치마는 부엌에서 일할 때에만 둘렀고 일단 부엌일을 끝내고 방안에 들어가거나 찾아온 손님을 마중나갈 때에는 벗는것을 례절로 여겼다.
우리 나라에서는 앞치마가 행주치마라는 말로 더 통하고있다.
행주치마라는 이름은 지난 임진조국전쟁시기에 있었던 행주산성싸움에 그 연원을 두고있다.
당시 행주산성녀인들은 우리 군사들이 산성을 둘러싼 3만명의 왜적들과 결사전을 하고있을 때 앞치마에 돌을 담아 부지런히 날라줌으로써 싸움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부터 앞치마를 행주산성녀인들의 애국투쟁과 련관시켜 《행주치마》라고도 부르게 되였다.
앞치마를 두르는 관습은 우리 나라 녀성들의 정결하고 깨끗한 몸차림과 일솜씨를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밥과 밥그릇을 중히 여기는 풍습
우리 민족의 기본주식은 밥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밥을 맛있게 잘 짓는데 큰 힘을 넣어왔다.
선조들의 우수한 밥짓는 솜씨는 일찍부터 이웃나라에도 널리 알려져있었다.
우리 인민의 밥짓는 솜씨에 대하여 이웃나라 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은 밥알이 고슬고슬하게 밥을 잘 짓는다. 밥알에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또 솥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밥을 일상주식으로 하고 밥을 첫째가는 귀중한 음식으로 여기는 관념은 고대에 벌써 형성되였으며 이러한 관념은 밥을 담는 그릇에까지 반영되여 그것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다루는 풍습을 낳게 하였다.
가정들에서는 거의 모두가 개인용밥그릇, 국대접, 수저를 따로 가지고있었다.
우리 인민들은 어린이 첫돌에는 밥그릇부터 준비하였다.
첫돌을 맞으며 남자아이에게는 주발형의 밥그릇, 녀자아이에게는 바리형의 밥그릇을 준비하여 그날 아침에는 백미밥을 정성담아 지어 밥그릇에 가득 담고 미역국, 새 수저와 함께 아침상을 차려주었다.
첫돌에 준비한 밥그릇과 대접, 수저는 5~9살까지 사용하고 그후 좀 큰것으로 바꾸어주었다.
밥그릇은 첫돌맞이의 준비품으로 되였을뿐아니라 신랑, 신부의 혼례준비품가운데서도 필수품으로 되였다.
신부는 신랑, 신부의 밥그릇, 대접, 수저를 비롯한 반상기일식을 준비하였는데 다른 그릇은 형편에 따라 빠질수도 있었으나 주발(바리), 대접, 수저만은 빼놓지 않았다.
신부는 시집으로 갈 때 신랑의 주발에 찹쌀을 자기의 바리에는 붉은 팥을 담아 붉은 보자기에 싸고 수저는 수놓은 수저집에 넣어 가지고 갔다.
시집에서는 찹쌀과 팥으로 찰밥을 지어 신랑, 신부의 저녁상에 놓아주었다.
여기에는 찰밥처럼 근기있고 다정하게 살라는 부모들의 념원이 깃들어있었다.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그릇을 아들딸이 다 자란 다음에도 일생동안 소중히 보관하였다. 이 풍습은 오늘도 계승되고있다.
우리 나라의 밥그릇은 반드시 뚜껑이 있는데 그 형태가 보통 둥글면서 웃부분이 볼록한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밥을 약간 수북하게 담았으므로 뚜껑을 씌워놓아도 밥이 눌러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였다.
밥뚜껑에 쌀을 수북이 담아 밥을 지으면 한그릇의 밥이 되였다.
그러므로 뚜껑은 한끼분의 쌀을 떠내는 되박과 같이 쓰이였다.
밥그릇은 보통 씌우개로 씌우거나 밥솥에 넣어두었다.
우리 인민은 밥을 놋바리에 푸고 뚜껑을 덮은 다음 그우에 바리모양으로 생긴 씌우개를 씌워 온돌아래목에 놓고 덮어놓았다.
밥그릇씌우개는 천과 천사이에 풀솜이나 솜을 두고 누볐기때문에 보온에 효과가 있었다.
우리 녀성들은 가정에서 가족성원들의 개인용밥그릇을 정해놓고 그것을 깨끗이 닦아서 당반우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리용하는것을 풍습으로 지켜왔다.
동네사람들은 정결한 그릇들이 줄지어있는 집을 가보고는 그 집을 부러워하고 가정주부를 칭찬하면서 집이 번성할 징조라고 하였다.
손님을 후하게 대하는 미풍량속
찾아온 손님을 성의를 다해 후하게 대접하는것은 우리 인민이 옛날부터 간직하여온 고상하고 아름다운 풍속이며 인심이다.
13세기의 책인 《제왕운기》에 사람들이 량식 없이도 려행하고 집집마다 문닫는 법이 없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만 보아도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손님을 후하게 대하는 좋은 풍습이 계승되여왔음을 알수 있다.
량식 없이도 려행했다는것은 손님이 오면 언제나 반갑게 맞아들이고 무상으로 숙식대접을 하는 우리 인민의 아름답고 너그러운 마음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우리 인민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하였을뿐아니라 아무리 어려운 살림이라도 조금도 구차한 빛을 보이지 않고있는 음식감들을 다 써서 상을 될수록 맛있고 풍성하게 차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손님과 함께 식사할 때에는 주인이 먼저 수저를 들고 손님에게 권하였으며 좋은 음식들은 될수록 손님가까이에 놓아주었다.
또한 손님이 먼저 수저를 놓기 전에는 주인이 수저를 놓지 않았는데 이것은 손님이 미안하거나 어색해하는 감이 없이 마음놓고 식사를 제대로 하게 하기 위한것이였다.
식사과정에 보이는 친절성은 식사가 끝나면 즉시에 입가심을 할수 있도록 물이나 숭늉을 들여오는데서도 표현되였다.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성의껏 대접하는 우리 인민의 미풍량속은 일찌기 다른 나라 사람들도 크게 감동시켰다.
18세기말 우리 나라를 려행한 어느 한 외국인은 우리 인민의 성격과 손님을 후하게 대하는 풍속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바 있다.
《조선사람들은 려행자들이 머무는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친절하게 접대해줌으로써 려행자들을 반하게 한다. 세상에 이렇게도 성격상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특성을 가진 인민들을 발견하기는 힘들것이다.》
음식을 상우에 정중하고도 편리하게 차려놓는 례절
세계 여러 민족들의 류사성도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과 형식에서는 일련의 차이가 있다.
음식을 소반에 차려서 그대로 날라다놓고 식사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음식그릇을 쟁반에 받쳐 날라다 상우에 놓고 먹는 방식도 있다.
또한 음식그릇을 땅이나 바닥에 펼쳐놓고 식사를 하는가 하면 음식그릇을 들고 식사하는 민족도 있다.
우리 인민은 오랜 옛날부터 음식을 소반에 차려 그대로 날라다놓고 식사를 하였다.
두리반(크고 둥근상)이나 교자상(멋있고 크게 만든 네모진 상)인 경우에는 음식그릇을 쟁반에 받쳐 날라다 차려놓기도 하였으나 우리 인민의 식생활풍습에서 기본은 소반에 음식을 차려 그대로 날라다놓고 식사하는것이였다.
지난날 음식상을 차리고 그것을 나르는 일은 주로 녀성들이 하였다.
녀성들은 언제나 몸차림을 깨끗이 하고 음식상을 차리였는데 상을 차릴 때에는 식사하는 사람이 편리하게 음식그릇과 수저를 놓아주었다.
음식을 먹는데서 지키는 질서와 례절
누구나 밥상을 받으면 먼저 음식그릇의 뚜껑을 벗기였다.
뚜껑을 벗기는 순서는 밥그릇부터 시작하며 반찬그릇의 뚜껑은 왼쪽 바깥의것부터 차례로 벗겨 오른쪽에 뒤집어 가지런히 놓았다.
국물의 간은 밥을 먹기 전에 맞추며 다른 반찬의 간은 먹어보면서 맞추었다.
밥은 숟가락에 약간 무드기 올라올 정도로 앞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뜨며 국은 국물이 넘쳐 흘러내리지 않게 약간 골싹하게 숟가락으로 떠서 먹었다.
식사과정에 수저는 서로 엇바꾸어가며 쥐는데 숟가락으로 밥을 뜬 다음에는 숟가락을 밥그릇이나 국그릇에 놓고 저가락을 쥐였다.
그것은 숟가락을 상우에 놓으면 식사를 다한것으로 인정되기때문이다.
그러나 숟가락을 쥐였을 때 저가락은 국그릇에 담가놓지 않고 상우에 놓았다.
식사가 끝나면 수저는 상우에 내려놓고 다 먹은 그릇의 뚜껑은 뒤집어놓으며 음식이 남은 그릇의 뚜껑은 본래대로 다시 덮어놓았다.
우리 인민은 음식을 문화성있게 드는것을 례의로 여겨왔다.
누구나 식사할 때가 되면 먼저 손을 깨끗이 씻고 단정하게 앉아서 밥상을 받았다.
여러사람이 함께 식사할 때에는 밥이나 반찬을 뒤적거리거나 헤쳐가면서 먹는 일이 없었으며 음식을 상에 흘리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교자상에서와 같이 멀리 떨어져있는 음식이나 양념은 반드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집어주기를 청하였으며 자기의 팔을 뻗쳐 집어오는것을 삼가하였다.
입안에 음식을 넣을 때는 적당한 량을 넣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입을 다물고 씹었으며 입안에 음식이 있는데 또 음식을 계속 넣어가면서 먹는것을 삼가하였다.
김치물이나 국물은 소리를 내지 않고 숟가락으로 떠서 조용히 먹었다.
입안에 넣은 음식물에 돌이나 가시가 있을 때는 옆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종이나 수건에 싸서 버리였으며 식사중에 기침이나 재채기가 나오면 머리를 돌려서 손이나 수건을 입에 대고 하였다.
먹다 남은 밥이나 국수, 국 같은것을 남에게 덜어주는것을 례절에 어긋나는것으로 여겼고 식사중에는 말을 하지 않는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으며 특히 불쾌한 말을 삼가하였다.
음식을 다 먹은후에는 수저를 가지런히 오른편에 놓았다가 집안식구들이 다같이 식사가 끝난 다음 함께 음식상을 물리였다.
그러나 웃사람들이 수저를 놓기 전에는 아래사람들은 수저를 상에 내려놓지 않고 국그릇에 놓고 기다렸다가 내려놓았다.
그것은 웃어른들을 존경하는 뜻에서 지키는 풍습이였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민족음료와 그 우수성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민족음료는 오랜 력사를 거쳐 슬기로운 우리 인민의 지혜와 재능에 의하여 창조되고 체계적으로 발전풍부화되여왔다.
전통적인 민족음료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 찬음료, 더운음료로, 용도에 따라서 보신음료, 보약음료, 간식음료로, 원음식감에 따라서 과일음료, 낟알음료, 남새음료 등으로 나눌수 있다.
민족음료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것으로는 수정과, 식혜, 향설고, 화채, 감주를 들수 있다.
우리 나라의 민족음료는 맛이나 약효, 가공방법, 가지수와 용도 등에 있어서 세상에 널리 자랑할수 있는 우수한 민족음료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의 민족음료는 그 어느 나라의 음료에도 비길수 없는 독특한 맛을 내는것이 특징이다.
전통적인 민족음료는 어느것이나 할것없이 모두가 원음식감의 특성을 잘 살려 독특한 맛을 낸다.
대표적으로 화채는 생신한 과일 같은것을 리용하여 만들므로 신선하고 산뜻하며 향기로운 맛을 내는것이 특징이다.
딸기화채 한가지만 놓고보아도 딸기즙이 우러나와 발그스레한 색갈이 도는 물우에 딸기편과 잣이 동동 떠서 청신하고 생큼한 향기를 풍기므로 금시 맛보고싶은 충동을 금할수 없게 할뿐아니라 마시면 새큼하고 달큰한 그 맛 또한 더 이를데 없다.
또한 민족음료는 하나와 같이 떫은맛, 쓴맛과 같은 잡맛이 없고 마신 다음에도 뒤맛이 아주 시원하고 상쾌하다.
이와 같은 독특한 맛으로 하여 민족음료는 우리 인민들은 물론 우리 나라에 오는 다른 나라 사람들도 즐겨 찾고있다.
다음으로 민족음료는 약효적가치가 있어 사람들의 건강과 장수에 매우 리로운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민족음료는 약효를 가지고있는 음식감들을 많이 리용하여 만든다.
차 한가지만 보아도 인삼, 보리, 오미자, 찔광이, 구기자 등 약효가 있는 음식감들을 많이 리용한다.
우리 나라의 유명한 인삼차는 피로회복작용, 혈압을 낮추는 작용, 항암작용, 위궤양의 예방치료작용을 비롯하여 정신활동능력을 높이고 질병에 대한 저항성을 높이는 작용을 한다.
하기에 우리 나라의 민족음료는 훌륭한 보신제, 보양제로 다른 나라들에도 널리 알려져있다.
전통적인 민족음료는 그 가공방법에 있어서도 높은 과학성이 보장되여있는것이 특징이다.
식혜나 감주만 보아도 밥에 길금물을 두고 발효시키는 방법으로 만들고 수정과나 향설고 같은것도 음식감을 그 특성에 맞게 온도와 시간을 과학적으로 정하고 세밀하게 가공하여 만들며 세계적으로도 그 연원이 오랜 우리 나라의 술도 밑술을 리용하는 과학적인 가공방법에 기초하여 만든다.
이와 같이 우리 인민들은 일찍부터 민족음료가공에 과학적원리들을 많이 적용하였으며 주변나라들의 음료발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민족단음식의 우수성
민족단음식은 낟알과 낟알가루, 과일과 씨앗 등 음식감을 꿀, 엿, 사탕가루와 같은 단맛감과 배합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가공한 단맛을 내는 음식이다.
우리 나라의 단음식은 크게 엿, 과줄, 강정, 기름꿀과자, 정과, 다식과, 숙실과 등으로 구분할수 있고 그것들은 다시 매 종류마다 수십가지 품종으로 갈라볼수 있는데 그 수는 무려 백여가지에 달한다.
오랜 력사적과정을 거쳐 발전풍부화되여온 우리 나라의 단음식은 민족의 높은 창조적지혜와 재능이 그대로 깃들어있는 우수한 민족음식이다.
민족단음식의 우수성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우리 인민들의 구미에 맞는 좋은 맛을 낸다는데 있다.
민족단음식은 말그대로 모두가 당분이 많이 들어있어 단맛이 센 고유한 특성이 있고 기본음식감의 맛에 꿀을 비롯한 단맛감, 기름 등의 맛이 잘 조화된 좋은 맛을 내므로 누구나 다 즐겨먹는다.
특히 과줄은 달고 고소하며 입안에 넣으면 바삭바삭하면서도 스르르 녹는것 같은 좋은 맛을 주고 강정은 달큰하고 상쾌한 맛을 줄뿐아니라 씹을수록 더 고소한 맛을 내며 다식은 달큰한 맛과 고소한 맛이 잘 조화되고 향긋한 맛이 있다.
그러므로 나이나 성별 등에 관계없이 누구나 즐겨찾으며 먹으면 소화흡수가 잘 된다.
민족단음식의 우수성은 다음으로 그 가공방법이 과학적이면서도 누구나 다할수 있게 통속적이라는데 있다.
단편적으로 엿 한가지를 보아도 낟알에 들어있는 농마를 당화시키는 길금의 효소작용원리를 리용하였는데 달이는 온도와 엿물의 묽음정도를 조절하여 강엿, 물엿, 조청 등을 만들었다.
이것을 놓고도 우리 인민은 일찍부터 다른 모든것과 마찬가지로 민족단음식가공에서도 높은 창조적지혜와 재능을 발휘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민족단음식은 또한 어느것이나 할것없이 다 우리 나라의 흔한 음식감들을 리용하며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수 있는 가공방법으로 만든다.
이러한 가공방법의 통속성은 일찍부터 민족단음식이 광범한 범위에서 대중화될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고 민족단음식이 인민대중의 지혜와 재능에 의하여 빨리 발전할수 있게 하였다.
다음으로 민족단음식의 우수성은 그것이 사람의 건강에 좋은 약효적가치를 가지고있다는데 있다.
민족단음식은 단맛감으로 사람의 건강장수와 원기회복에 특효가 있는 꿀을 많이 리용한다.
또한 인삼, 송화가루, 참당귀, 생강, 련뿌리, 도라지 등 여러가지 약재를 리용한다.
특히 계피, 매화열매 등을 넣어서 굳힌 계강엿은 예로부터 가래를 삭히는 거담제, 몸을 추세우는 보약제로 유명하였다.
오늘날 민족단음식에는 령지, 리진, 소뼈가루 등 여러가지 음식감들이 널리 쓰이여 그 약효성이 더욱 높아지고있다.
설명절
옛 기록들에는 설명절을 《세수》, 《년수》, 《원단》, 《원일》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한해의 첫날이라는 뜻이였다.
설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 첫 아침을 맞는 명절이였으므로 사람마다 새로운 기분과 기대를 가지고 명절을 맞이하였다.
지난날 우리 인민들은 설날이 오면 차례(제사)를 지내고 세배하며 설음식을 맛보면서 민속놀이를 즐겨하였다.
설날 새벽에 제사를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웃사람을 존경하는 풍습의 연장으로서 집안의 《번영》과 자손의 《흥》이 조상을 어떻게 위하는가에 좌우된다고 생각한 조상숭배관념에서 나온것이였다.
제상에는 몇가지 음식과 함께 반드시 떡국을 올리였는데 이로부터 설날차례를 《떡국차례》라고도 하였다.
설날음식을 《세찬》이라고 하였고 술을 《세주》라고 하였다.
이날에는 특색있는 음식인 찰떡, 설기떡, 절편과 같은 떡과 지짐류, 당과류, 수정과, 식혜, 고기구이, 과실, 술 등을 마련하였다.
떡국은 꿩고기를 넣고 끓이는것이 제격이였으나 꿩고기가 없는 경우에는 닭고기를 넣고 끓이였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꿩대신 닭》이라는 말은 설명절의 떡국과 관련되여 나왔던것이다.
반드시 떡국을 먹어야 설을 쇠는것으로 여기였기때문에 떡국에 《첨세병》(나이를 더 먹는 떡)이라는 별명까지 붙이였다.
설날에 처음으로 마시는 술을 《세주불온》(설술은 데우지 않는다)이라고 하여 찬술을 한잔씩 마시였다.
이것은 옛 사람들이 정초부터 봄이 온다고 보았기때문에 봄을 맞으며 일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여겨온데서 생긴 풍습이다.
도소주는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설술인데 설날아침에 마시였다.
율계, 조피, 흰삽주뿌리, 도라지, 방풍 등 여러가지 고려약재를 넣어 만든 도소주를 마시면 그해 모든 병이 생기지 않는다 하였다.
도소주는 나이가 젊은 사람부터 마시였는데 그 리유는 젊은 사람은 나이를 먹으므로 축하하는 표시로 먼저 마시게 하였고 늙은 사람은 나이가 먹어 더 늙어짐을 아쉬워 나중에 마시였다고 한다.
설날아침식사는 대체로 큰집에 모여서 집안식구들끼리 즐겁게 하고 그 다음에는 세배군들이 찾아오면 술상이나 떡상을 대접하군 하였다.
정월대보름
정월대보름은 정월초하루부터 시작된 정초의 마지막날(15일)을 말한것인데 정초의 마지막 명절이였다.
지난날에는 설부터 보름날까지를 통털어 정초명절이라고 하면서 쇠였다.
대보름을 전통적인 민속명절로 맞이하였다는 기록은 김제의 시 《약밥》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찹쌀 쓿어 밥 지을제 곶감 대추 한데 넣고
하얀 잣 달콤한 술 골고루 섞는다네
집집마다 약밥짓기 이제는 풍속되여
까마귀의 제사대신 조상제사에 드린다네
이 시는 약밥의 유래를 말하는 동시에 정월대보름명절이 세나라시기에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대보름날의 독특한 음식으로서는 오곡밥과 약밥, 복쌈, 국수, 나물반찬, 부름깨기, 귀밝이술 등이 있었다.
복쌈은 배추잎이나 김으로 밥을 싸먹는것이였고 오곡밥은 5가지 낟알로 밥을 지은것을 말하였다.
약밥은 찰밥에 약이 된다고 하는 꿀이 들어갔다고 하여 불리워진 이름인데 대추, 감, 밤, 잣, 꿀, 참기름, 간장 등이 더 포함되였다.
대보름날은 《묵은 나물》을 먹는 날이라고도 하였다.
묵은나물은 박나물, 버섯 등을 말린것과 오이꼭지, 가지껍질, 무우잎, 배추잎 등 국을 끓여먹으면 그해 여름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남새철에 흔히 버릴수 있는것들은 잘 말려 보관해두었다가 남새가 귀한 계절에 요긴하게 리용한 선조들의 깐진 살림살이를 엿보게 한다.
이날에 《부스럼깨기》라고 하는 풍습이 있어 첫 새벽에 날밤, 호두, 은행, 잣 등을 깨먹으면 이발이 튼튼해진다고 하였다.
이것은 대보름명절에 별식으로서 약재로 되는 씨앗열매를 먹게 하려는 뜻에서 생긴것이다.
국수는 작은보름날(14일) 점심에 별식으로 먹었는데 이것은 국수오리처럼 오래오래 살것을 념원한데서였다.
덥히지 않은 찬술을 한잔씩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은 귀가 밝아진다고 하면서 《귀밝이술》이라 하여왔다.
대보름날 모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겨 노는데 개만은 굶는 날로 되여있었다.
《동국세시기》에 《이날 개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 개가 먹이를 먹으면 앞으로 파리가 많이 끼기때문이다. 그래서 속담에 굶는것을 비유해서 정월보름날 개같다는 말이 있다.》라고 씌여있다.
일군날
일군날은 음력 2월 초하루를 말하는데 이날은 《천하지대본》으로 여겨온 농사의 첫 공정인 밭갈이를 알리는 날이라고 하여 명절로 쇠는 풍습이 있었다.
일군날의 유래를 보면 18세기경에 봉건통치배들과 량반부자들이 머슴과 종들을 더 악착하게 부려먹기 위한 얼림수로서 고안해낸 하나의 《명절》이였다고 한다.
온 한해동안 마소와 같이 부려먹으면서도 아무런 《대접》도 해주지 않던 량반부자놈들은 밭갈이를 시작할 첫 일 즉 2월 초하루에 콩소를 넣은 송편을 만들어 노비와 머슴들에게 먹이였다고 한다.
이것은 주인의 선심에 감동되여 그들이 더 많은 일을 하게 하기 위한 얼림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날을 《노비일》이라고도 하였던것이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농군들이 밭갈이를 시작하기 전에 하루 푹 쉬면서 먹고 즐기는 풍습이 있어 《일군날》로 부르며 농사철을 앞두고 일군들의 로동열의를 높이며 기세를 돋구어주는 여러가지 놀이들을 하였다.
이날이 오면 농민들은 정월 14일에 세웠던 낟가리무지를 거두고 거기에 매달았던 벼이삭을 찧은 쌀로 송편을 만들어먹었다.
두레(공동로동조직의 한 형태)가 널리 보급된 중부지방에서는 이날 20살이 된 젊은 일군들이 어른이 다 되고 품앗이 상대가 된것을 인정해달라는 의미에서 한턱 내여 자기보다 나이든 일군들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는 관습도 있었다.
이날 농민들은 없는 살림이지만 애써 마련한 떡을 먹고 술을 마시며 농악을 울리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으며 새해 농사에 착수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다.
3월 삼질
3월 삼질(음력 3월 3일)은 중구(9월 9일)에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화창한 춘삼월이라고 하여 들놀이를 하면서 꽃지짐을 지져 먹는 화전놀이를 하는 날이였다.
기록들에는 이날을 《상사》, 《답청절》로 전하고있으며 민간에서는 《삼질날》이라 하였다.
답청절이란 봄철에 돋아난 풀을 밟아본다는 뜻이였다.
이날을 민속명절로 정한것은 산과 들에 꽃이 만발하는 봄을 즐기기 위한것이였다.
고구려에서는 이날을 사냥경기와 무술경기의 날로 정하고 국가적인 성대한 행사를 치르었으며 마을마다 집집마다 산과 들에 나가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날을 보내였다.
세상에 잘 알려진 고구려의 온달이 왕궁에서 뛰쳐 나온 평강공주와 짝을 뭇고 그의 도움으로 무술을 련마하여 장수로 뽑힌 날도 바로 3월삼질날이였다.
이날의 대표적인 음식은 화전(꽃지짐), 화면(꽃국수), 수면(록두국수) 등이였다.
꽃구경도 하고 전도 부쳐 먹으며 노래도 부르고 시도 짓던 이 화전놀이는 봉건의 구속에 시달리던 녀성들이 한데 어울려 음식재능을 보여주는 마당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