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생활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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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담그기
재능있고 탐구심이 강한 우리 인민들은 오랜 생활체험과정에 겨울에도 비교적 싱싱한 남새를 먹을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들을 창안하여 식생활에 널리 활용하여왔다.
그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김치를 담그는 방법이였다.
김치를 담그기 시작한 력사는 매우 오래다.
이미 세나라시기에 무우, 부루, 가지, 파, 마늘과 같은 남새와 소금이 있었고 술과 장, 젓갈을 비롯한 여러가지 발효음식이 발전하고있었으므로 같은 원리로 만드는 김치도 당시에 있었다고 인정된다.
고려시기에는 김치를 만들고 관리하는 침장고라는 기구까지 있었다.
리규보의 《동국리상국집》에는 김장을 담가 겨울철부식물로 하였다는것이 기록되여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와서는 고추가 재배되여 김치를 담그는 방법이 더 발전하고 김치의 종류도 늘어났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장담그기와 함께 김장을 년중 가정의 중요하고 큰 일로 여겨왔으며 어느 가정에서나 겨울나이준비로 가을철에는 김장담그기에 분주하였다.
김장을 담그는 시기는 지방과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로는 립동을 기준으로 하였다.
즉 립동이 음력으로 9월에 들면 립동이 지난 뒤에, 10월에 들면 립동전에 김치를 담그었다.
《해동죽지》에는 10월의 립동이 가까와오면 집집마다 김치를 담그어 땅을 파고 묻느라고 분망하게 지냈다고 기록되여있다.
김장김치는 제철에 담그어야 제맛이 난다.
그러므로 가정들에서는 김장을 만사를 제쳐놓고 제때에 하였다.
지어 궁중에서까지도 김장때에는 한달동안 모든 일을 전페하고 김장담그기로 분주히 지냈다.
김장철에는 아홉방부녀가 다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던 궁중처녀들도 김장때에만은 나온다는데서 생긴 말로서 우리 인민들이 김장을 담그는데 얼마나 많은 품을 들였는가를 알수 있게 한다.
이렇게 품을 들여서 김장김치를 해넣으면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다섯달분의 남새를 저장해놓는것과 같기때문에 우리 인민들은 김장김치를 겨울철의 절반량식이라고도 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김장김치를 제때에 맛있게 담그는데 깊은 관심을 돌렸을뿐아니라 그 보관관리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김치움은 될수록 해빛이 직접 비치지 않는 곳에 땅을 파서 만들고 그안에 독을 벼짚으로 감싸서 파묻었으며 그우에 나래를 덮어주었다.
그리하여 겨울날의 심한 추위때에도 김치에 바람이 들거나 어는 현상이 없게 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겨울김치를 담글 때 서로 도와주는 아름다운 풍습을 창조하고 그것을 전통적으로 계승하여왔다.
김장철에는 가까이에 사는 이웃들과 친척들이 한데 어울려 배추를 씻고 양념소를 만들며 김치움을 파는데 이르기까지 서로 돕는것을 응당한 일로 여겼고 자기집에서 담근 김치와 양념을 이웃이나 친척집들에 보내여 맛을 보게 하면서 조언을 받기도 하였으며 김장을 성과적으로 담근데 대해 서로 축하도 해주고 함께 기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담근 김치는 시원하고 쩡하며 향기롭고 상쾌한것이 조선사람의 구미에 전적으로 맞아 우리 인민들은 진수성찬을 차리거나 간단히 몇가지 음식을 차리거나에 관계없이 언제나 음식상에 김치를 올렸으며 기름진 고기나 떡, 지짐 등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김치를 곁들였다.
숭늉마시기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속에서는 식사뒤끝에 숭늉을 즐겨 마시는 풍습이 전해져온다.
숭늉에 대한 력사기록이 16~17세기경부터 보이고 19세기초의 책인 《림원십륙지》에 숭늉마시는 방법이 소개되여있지만 밥이 주식이고 차나 우유대신 맑은 물이 풍부한 우리 나라에서는 숭늉이 고대나 세나라시기에도 일상음료로 적용되였었다고 인정된다.
숭늉은 우리 나라에서만 볼수 있는 독특한 음료이다.
숭늉은 그 맛이 독특하고 영양가가 높은 음료로 알려져있다.
우리 인민은 밥을 거의다 먹고 몇숟가락정도 남았을 때 그것을 따끈한 숭늉에 말아 마른 반찬이나 짭짤한 장절임, 젓갈 등으로 식사를 끝내는것을 좋아하였다.
숭늉은 집에서 밥을 지어먹을 때마다 만들수 있는 매우 편리한 음료이다.
쌀이 익을 때 불을 물리고 뜸을 들인 다음 다시 불을 때면 밥가마바닥의 온도가 백수십℃로 오르고 그에 붙은 낟알이 가마치로 되면서 밤색으로 변하는 동시에 구수한 휘발성의 카르보닐화합물을 생성한다.
이때 생긴 가마치에 물을 붓고 다시 끓이면 질좋은 숭늉이 된다.
지난날 가정들에서는 숭늉대접을 하나의 식사범절로 지켜왔다.
며느리가 시부모나 웃사람들의 식사시중을 들 때 또는 제사때에는 반드시 숭늉을 대접하거나 놓았는데 이것은 하나의 풍습으로 되여있었다.
높은 계층의 가정에서도 식사때 상은 하인이 차려도 숭늉만은 반드시 안해가 아니면 며느리가 시중들었다.
궁중에서 왕이나 왕비를 위한 수라상(밥상)을 차릴 때도 꼭 숭늉을 대접하는 절차가 있었는데 시중드는 궁녀가 왕의 식사가 끝날 때 국그릇을 놓았던 자리에 숭늉그릇을 놓으면 밥을 한숟가락 말아서 개운하게 먹고 수저를 제자리에 놓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식사를 끝낼 때에는 숭늉에 밥을 말아먹어야 딸이 잘 산다는 말이 전해져오고있다.
그리고 숭늉에 밥을 말아먹으면 식기나 수저가 물에 젖어있는것처럼 생활이 메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멀리 시집간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들의 심정을 담아 생겨난 말이며 다른 측면에서 밥을 다 먹게 함으로써 랑비를 없애려는 뜻도 담고있다.
숭늉 마시는 풍습이 우리 인민들속에서 오래동안 계승되여왔으므로 오늘도 그와 결부된 교훈적인 속담들이 많이 전해지고있다.
《급하기는 우물에 가 숭늉 달라겠다.》,《보리밭에 가 숭늉 찾겠다.》, 《숭늉에 물탄 맛이다.》 등은 그러한 실례이다.
숭늉은 영양위생학적으로 유익하고 우리 인민의 창조적슬기와 담담한 성격이 반영되여있는 전통적인 음료로서 오늘도 계승되고있다.
명절분위기를 돋구는 백미떡과 찰떡
겨울철에는 우리 인민들이 예로부터 년중 가장 큰 명절로 쇠여 온 설명절이 있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사람들은 해마다 설을 맞으면 강가에 모여서 편을 갈라 돌팔매놀이와 눈끼얹기 등과 같은 명절놀이를 하면서 즐겼다고 한다.
이것은 상무적기풍이 강한 고구려사람들이 활기있는 여러가지 놀이를 하면서 설을 즐겁게 쇠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설은 백제에서도 쇠였다.
한편 백제에서 261년에 설맞이행사를 하였으며 왕이 정월초하루날에 옷을 단정히 입고 정사를 처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자료들은 세나라시기에 벌써 설명절을 쇠는 풍습이 일반화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데 실상 설명절은 고대시기에 그 연원을 두고 수천년을 내려오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명절이다.
현대에 와서 쇠고있는 양력설은 우리 나라에 양력력서가 도입되기 시작한 1896년(구체적으로 1896 년 1월 1일, 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부터 생겨난 명절이다.
설명절때가 되면 우리 인민들은 명절 썩 전날부터 집안팎을 깨끗이 거두고 명절기분으로 흥성거렸다.
설날아침에는 집집마다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웃어른들에게 먼저 드리고 온 식구가 한자리에 둘러앉아 나누어먹었으며 세배군들에게도 대접하군 하였다.
여느 명절들과 마찬가지로 설날에도 명절음식으로서 첫번째로 꼽은것은 찰떡, 절편을 비롯한 갖가지 떡들이였다.
찰기가 나게 잘 친 찰떡은 팥, 참깨, 대추, 밤, 잣, 당콩 등으로 만든 고물을 묻혀 일정한 크기로 잘라 접시에 소복하게 담았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연백(연안, 배천)지방의 찰떡을 제일로 일러주었다.
이 지방의 찰떡은 콩보숭이를 묻히는것으로 해서 팥고물을 위주로 하는 다른 지방의 찰떡과 달랐다.
이 지방에서는 잔치상에 꼭 찰떡을 올려놓았으며 사돈집에 보낼 때에는 《안반(떡을 칠 때에 쓰는 두껍고 넓은 나무판)만 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찰떡을 크게 잘라서 고리짝에 담기도 하였다.
찰떡은 어디까지나 《찰떡》이라는 고유한 우리 말로 부를 때만이 졸깃졸깃한 그 독특한 맛이 잘 안겨오는 우리 민족고유의 음식인것이다.
설날에는 설기도 즐겨 만들어먹었다.
설날에 해먹은 설기가운데서 가장 이름난것은 개성의 소머리떡이였다.
소머리떡이란 떡을 식혀서 썬 모양이 마치 소대가리편육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말이다.
소머리떡은 썰었을 때 겉모양이 독특하고 희환할뿐아니라 맛 또한 특이하였다.
개성지방에서는 이 떡을 자그마한 시루에 쪄가지고 시루채로 사돈집에 설음식으로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우리 나라 여러 지방들에서는 설날에 절편, 가래떡, 골무떡, 꼬리떡과 같은 백미떡들도 즐겨 해먹었다.
절편은 떡살을 박아서 끊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방에 따라 절떡, 달떡, 룡떡, 색떡으로도 불리웠다.
그리고 가래떡은 백미떡을 늘구어 길다랗게 만든것이고 골무떡은 골무만큼씩 짧게 떡을 끊은것이며 꼬리떡은 량귀를 꼬리처럼 뾰족하게 만든것이다.
절편과 꼬리떡은 색소를 넣어 빨갛고 파랗게 물들여서 큰상에 웃기떡으로도 썼으며 가래떡은 떡국이나 떡볶음감으로도 리용하였다.
《장형제》의 《막냉이》 고추장만들기
고추는 우리 나라에 16세기말에 들어온것으로 보고있다.
여느 작물에 비해 재배력사가 그리 길다고 할수 없지만 조선사람의 체질과 기호에 잘 어울리는것으로 하여 고추는 재배의 첫시기부터 우리 인민들의 상당한 호평을 받았으며 조선민족료리의 독특한 맛을 살리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향신료로 인정되였다.
그래서 어느 가정에서나 마당가에 고추포전을 두고 고추를 따서 그대로 된장에 찍어먹거나 여러가지 반찬을 만들어 식생활에 리용하군 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세기를 이어 그대로 전해져 오늘도 우리의 문화주택 앞마당들에는 갖가지 푸성귀들과 함께 풋고추들이 때 맞추어 푸르싱싱하게 자라나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있다.
고추가 널리 재배되고 그것이 음식물가공에 적극 리용되면서 우리 나라 음식은 종류와 내용이 보다 다양하고 풍부해졌으며 《얼벌벌하다》는 말은 조선음식의 특징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으로 되게 되였다.
이러한 과정에 생겨난 고추장은 이름그대로 우리 선조들이 고추를 리용하여 만든 식료품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음식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누구보다 고추를 좋아하고 애용한 우리 인민들은 그것을 보다 이채롭고 효과적으로 리용섭취하기 위하여 조선사람들의 식생활에서 제일 기초적인 식료품인 장가공에 리용하여 자기들의 구미에 전적으로 맞을뿐아니라 이 세상에 있어보지 못한 그야말로 독특한 맛과 향기를 가지는 조선고유의 고추장을 만들어냈다.
고추장맛이 얼마나 좋았던지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입맛이 늙지 않는다는 말도 생겨났으니 이것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에 대한 소박한 평가의 한 구절이라고 할수 있다.
《규합총서》에는 고추장에 대하여 《콩 한말로 메주를 쑬 때 쌀 두되를 쓴다. 쌀을 가루내여 흰무리떡을 만든 다음 삶은 콩을 찧을 때 함께 넣어 잘 찧어 메주덩이를 만들어 잘 띄운다. 띄운 메주덩이를 급히 말려 보드랍게 가루내여 채에 친다. 메주가루 한말에 소금 넉되를 물에 타서 두고 고루 버무려 응이처럼 만든다. 찹쌀 두되로 질게 밥을 지어 메주에 버무려넣고 고추가루(씨 없는것) 대여섯홉, 말린 소고기가루, 대추 다진것 등을 넣고 고루 섞는다. 마감에 꿀 한보시기정도 넣고 익힌다. 소금량과 고추량은 식성에 맞게 조절할수 있다.》고 씌여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 선조들이 일찍부터 고추장을 맛있게 담그기 위해 얼마나 지혜를 모았고 품을 많이 들여왔는가를 잘 알수 있다.
매워도 감칠맛이 있어 매운줄 모르고 짭짤해도 입에 맞아 또 한번 먹어보고싶은 고추장은 그것만 그냥 반찬으로 먹어도 별맛이지만 뒤맛을 감싸주는 단맛이 있어 다른 음식에 양념으로나 곁들여먹어도 아주 잘 어울린다.
특히 여름철에 풋고추나 풋마늘을 고추장에 찍어먹는 맛은 참으로 이를데 없으며 이것은 더위로 입맛을 잃은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식욕촉진제로 된다.
고추장은 어느 지방에서나 다 담그었지만 그중 유명한것은 개성의 고추장이였다.
비록 장형제의 《막냉이》로 태여났지만 조선민족음식의 특색을 살리고 상차림을 다채롭게 하는데서 고추장이 차지하는 몫은 결코 된장이나 간장에 못지 않다.
평양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특산음식
평양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특산음식들은 평양의 유구한 력사와 더불어 창조되고 발전되여온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중의 하나이다.
근면하고 지혜로운 평양사람들은 일찍부터 우리 인민의 구미와 음식법에 맞게 지방적특색이 짙은 수많은 민족음식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특히 평양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평양랭면, 평양온반, 평양비빔밥, 평양어죽, 대동강숭어국, 평양백김치 등은 맛이 독특하고 영양가가 높을뿐아니라 가공방법이 또한 특색있고 위생문화적인것으로 하여 우리 인민은 물론 식성이 같지 않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매우 즐기고있으며 비길데 없이 우수한 음식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평양랭면은 촉감이 부드럽고 독특한 향기와 구수한 입맛을 내는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이다.
평양랭면은 밀국수나 농마국수처럼 국수오리가 지나치게 질기지 않고 먹기에 맞춤하며 국수물, 꾸미와 고명, 양념, 국수 담는 그릇, 국수말기 등에서 독특하기때문에 예로부터 소문이 나서 조선국수의 대명사로, 민족음식을 대표하는 음식중의 하나로 불리워왔다.
민족의 지혜가 깃든 발효가공품 장
장은 콩, 강냉이를 비롯한 낟알류들과 소금을 기본음식감으로 하고 여러가지 보조음식감들을 섞어만든 발효가공품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장으로서는 간장, 된장, 고추장과 단기적으로 만들어먹는 집장을 들수 있다.
우리 인민들은 일찍부터 장을 기본부식물의 하나로 하는 고유한 식생활관습을 계승발전시켜왔다.
5세기초의 고구려벽화무덤의 묘지명에 장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 인민들이 세나라시기 이전부터 장을 식생활에 널리 리용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우리 나라는 콩의 원산지로서 콩재배력사가 가장 오래다.
장은 우리 인민들이 콩을 리용하여 만든 맛있고 영양가 높은 여러가지 콩가공품가운데서 대표적자리를 차지하는 부식물의 하나이다.
우리 인민들은 오랜 식생활과정을 통하여 삶은 콩을 절구에 찧고 메주를 만들어 자연발효시킨 다음 잘게 부스러뜨리고 거기에 소금물을 부어두었다가 그것으로 장을 만들었다.
일정한 기일이 지나 떠오른 웃물만 찌워 달인것은 간장, 웃물만 떠내고 남은데다 소금물을 조금 더 넣어 익힌것을 된장이라고 하였다.
또한 메주가루에 질게 지은 밥이나 죽을 버무리고 고추가루를 넣은 다음 소금으로 간을 맞춰 익힌것을 고추장이라고 하였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우리 나라의 모든 가정들에서는 가을에 장만한 콩으로 메주를 쑤어 잘 띄워두었다가 봄에 장을 담그는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되여왔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장맛이 좋아야 음식맛도 좋다는 의미에서 《장이 달아야 국이 달다》고 하였으며 어느 집에 가든 《그 집 음식맛은 장맛》이라 일러왔다.
뿐만아니라 장의 맛과 행복한 생활을 비겨 《장이 단 집에 복이 많다》는 말도 례사로이 써왔다.
이처럼 장은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과 떼여놓고 생각할수없는 중요한 부식물의 하나이며 조선민족료리의 독특한 맛을 살리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양념감이다.
장은 우리 인민들의 창조적지혜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수천년의 력사와 더불어 훌륭히 계승발전되여온 우수한 민족음식이다.
무엇보다 먼저 장은 으뜸가는 발효제품으로서 조선사람의 구미에 맞는 좋은 맛을 내며 여러가지 영양소들을 많이 포함하고있다.
장은 단백질이나 그 분해물중의 아미노산과 당의 카르보닐기가 반응하여 생기는 아미노카르보닐화합물에 의하여 구미를 돋구는 적갈색 또는 검은 갈색을 띠며 발효과정에 생기는 젖산, 초산을 비롯한 유기산과 알콜, 알데히드 등에 의하여 독특한 풍미를 낸다.
장은 염화나트리움, 사과산나트리움 등에 의한 짠맛과 함께 아미노산, 당에 의한 고기맛과 달큰한 맛, 유기산에 의한 향긋한 신맛을 낸다.
장은 단백질과 비타민의 영양원천으로서 의의가 있으며 여러가지 치료적효과도 나타낸다.
특히 된장에는 단백질이 16%정도 들어있는데 그 대부분이 미생물과 효소의 작용으로 소화되기 쉬운 프로테오즈 또는 고급질소화합물상태로 존재할뿐아니라 아미노산조성도 고기단백질과 비슷하다.
장에는 비타민B₁, B₂, B₆, PP, E가 적지 않게 들어있으며 칼시움, 린, 철을 비롯한 여러가지 광물질들도 들어있다.
장의 치료적효과는 주로 된장에서 찾아볼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콩단백에 들어있는 트립신억제인자에 의한 항암 및 항당뇨병작용, 콩사포닌, 게네스틴 등 항산화성분에 의한 항산화작용, 비타민E와 레시틴에 의한 동맥경화예방 및 로화방지작용을 들수 있다.
다음으로 장은 가공방법이 과학적이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장은 메주균의 작용에 의하여 콩에서 아미노산을 형성시켜 만든것으로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우리 나라의 3대발효가공품의 하나이다.
우리 인민들이 장을 처음 만들던 옛날에는 그 가공수준이 비록 현대에 비하여 낮았어도 일찍부터 발효의 과학적인 리치를 식생활에 응용해왔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의 창조적지혜와 재능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로 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장의 종류를 보면 간장에는 맑은간장, 진한 간장(진장), 된장에는 막장, 박장, 해장, 고추장에는 떡고추장, 약고추장, 고기고추장, 팥고추장, 보리고추장 등 여러가지가 있다.
우리 나라의 발전된 장담그는 방법은 일찌기 세나라시기부터 이웃나라들의 음식문화발전에 적지 않는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장은 식생활에서 리용범위가 넓을뿐아니라 보관기일도 아주 오래다.
장은 고기고추장과 같이 부식물로 직접 리용될뿐아니라 기본적인 양념감으로, 또는 부식물가공에서 보조음식감으로 널리 리용된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민족음식에는 장이 들어가지 않는것이 거의 없다.
특히 장은 국, 찌개, 지지개, 졸임, 볶음 등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기본양념감이였다.
이와 함께 장은 고기, 물고기, 남새를 비롯한 여러가지 음식감을 절임하여 보관리용하는데 아주 효과적으로 리용된다.
장가운데서도 된장은 오래 보관할수록 그 자체가 미생물에 의하여 연화되므로 소화흡수률이 좋아진다.
또한 열에 의해 적어진다고 보는 항암 및 항당뇨병 작용에 의의가 있는 트립신억제인자도 숙성과정에 일정하게 늘어난다.
이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3년 묵은 장은 약》이라고 하면서 오래 보관한 장을 귀한 손님을 맞거나 대사를 치를 때 리용하군 하였다.
우리 나라의 명물 조선부루와 부루쌈
쌈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음식의 하나이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여러가지 남새나 나물의 잎으로 쌈싸먹기를 좋아하였다.
쌈감으로는 부루, 곰취, 배추잎, 콩잎, 호박잎, 깨잎 등을 썼다.
이러한 쌈감으로 밥을 싸서 먹는것은 우리 나라에만 있는 고유한 풍습이다.
그가운데서도 부루쌈을 으뜸으로 꼽아왔다.
부루쌈은 고구려시기의 기록들에서부터 보이는 오랜 연원을 가진 남새음식의 하나이다.
부루쌈을 좋아하는 우리 인민의 풍습은 고구려, 고려를 거쳐 오늘까지도 계승되고있다.
예로부터 부루는 물을 갈아대면서 씻다가 마지막으로 헹구는 물에 기름을 몇방울 떨구어 씻으면 맛이 고소해지고 연해지며 그렇게 씻어낸 부루에 고추장을 바르고 쑥갓과 실파를 한대씩 놓아 싸먹어야 제맛이 난다고 하였다.
우리 인민은 부루쌈을 먹을 때 고추장에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자료에 의하면 부루쌈에 쓸 고추장은 잘게 다진 소고기와 생선에 파를 약간 넣고 기름으로 끓여서 만든다고 하였다.
부루쌈이 여름에 더위를 막아주는 음식이라 하여 민간에서는 물론 궁중에서도 이것을 즐겨먹었다.
부루쌈을 먹은 다음 계피차를 마시면 부루에 체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력사를 가진 구이료리
우리 민족은 인류력사의 첫 시기부터 이 땅에 뿌리내린 슬기롭고 지혜로운 민족으로서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창조적활동과정에 고유한 민족료리들을 수많이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구이는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료리들가운데서 그 연원이 가장 오래고 종류도 많고 조리법과 음식맛도 독특한 료리이다.
고고학적발굴자료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이 불을 발견한것은 구석기시대 중기쯤인 10만년전부터였다고 한다.
불의 발견은 원시인들의 식생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불을 발견한 다음 고기를 비롯한 모든 음식감들을 날것 그대로 먹던것을 불에 구워 먹게 되면서부터 차츰 익혀먹는 식생활로 전환되게 되였다.
그러므로 구이는 맨 처음으로 나타난 료리로서 민족음식가운데서 그 연원이 가장 오랜 료리이라고 말할수 있다.
원시인들은 처음에는 음식감들을 그대로 손에 쥐고 불에 구워먹다가 꼬챙이에 꿰여서 굽거나 불무지에 올려놓고 구워먹었으며 돌 같은것을 달구어 그 우에 고기점을 놓아 구워먹기도 하였다.
쇠가 나온 후에는 구이방법도 더욱 다양해지게 되였는데 그것은 쇠를 가지고 여러가지 구이도구들을 많이 만들어 리용한것과 관련된다.
당시 쇠를 가지고 구이료리에 리용한 도구들을 보면 볶음판이나 석쇠 같은것들이였다.
볶음판은 굽는 쇠판이란 뜻으로서 여기에 기름을 두르기도 하고 굽는다고 하여 《전철》이라고 불러왔다.
석쇠는 쇠줄을 가지고 일정한 크기의 테두리를 만들고 구멍이 작게 그물처럼 엮어 고기 같은것을 굽는다고 하여 《적철》이라고도 불렀다.
특히 고구려는 백제보다 목축업이 발전된 나라였고 식생활에서도 고기료리의 비중이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고려시기에 와서 구이료리는 더욱 발전하였다.
구이료리는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만드는 방법도 더욱 발전하였다.
당시 기록에는 고기, 물고기, 산나물 등을 가지고 구이료리를 만드는 방법과 그 종류가 구체적으로 씌여있다.
《음식지미방》, 《규합총서》, 《증보산림경제》 등에 의하면 소고기구이, 돼지고기구이, 소갈비구이, 꿩구이, 오리고기구이, 붕어구이, 전어구이, 조기구이, 도미구이, 전복구이, 조개구이, 더덕구이, 도라지구이, 당귀구이 등이 아주 유명하였다고 씌여져있다.
그리고 구이방법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는데 음식감의 특성에 따라서 굽는 방법이 각이하였다.
대표적인 구이방법을 보면 여러가지 양념에 재운 고기들을 쇠꼬챙이에 꿰여 숯불에 굽는 방법, 불우에 적쇠를 놓고 고기편을 굽는 방법, 구이음식감을 종이와 진흙으로 싸서 뜨거운 재속에 묻어서 익히는 찜구이방법, 고기나 물고기를 얇게 편내여 양념에 재워서 말리웠다가 굽는 방법 등이였다.
《규합총서》에는 돼지고기, 꿩, 게, 붕어 굽는 법이, 《음식지미방》에는 닭굽는 법이, 《증보산림경제》에는 소발쪽, 소꼬리를 삶아 익혀 다시 굽는 방법 등이 상세히 적혀있다.
*돼지고기 굽는 법
돼지고기덩이를 쇠꼬챙이에 꿰여 숯불에 비치여 굽는데 한번 굽고는 깨끗한 쌀씻은 물에 여러번 잠그었다가 다시 굽는다.
그리고 속을 뒤집어 대꼬챙이로 살을 찔러 기름장을 발라서 구워낸 다음 칼로 저며 쓴다.
*꿩 굽는 방법
깨끗한 조선지를 물에 적셔 고기를 틈없이 싸서 구워 반숙되거든 종이를 벗기고 기름장을 발라 쓴다.
*붕어 굽는 방법
숯불을 많이 피우고 재로 우를 얇게 덮는다.
그리고 깨끗이 씻은 붕어를 불우에 놓고 비늘이 말라 거스러지거든 찬물을 대여섯번 바르고 꿩의 깃으로 기름장을 발라 구우면 비늘이 스스로 떨어지고 맛도 좋다.
구이료리에 쓰이는 양념감들을 리용한 구이방법도 다양하였다.
양념감들로서는 간장, 소금, 참기름, 고추가루, 후추가루 등이였다.
소고기구이, 통닭구이, 더덕구이 같은것은 양념장에 재웠다가 구우며 뱀장어나 마른명태 등은 구이감에 양념장을 바르면서 구워먹기도 하였다.
기름구이는 마른물고기를 물에 슬쩍 씻거나 잠그었다가 기름을 바르면서 구운것이였다.
소금구이는 물고기나 산나물 등을 소금에 약간 절였다가 구운것으로서 맛이 또한 독특하였다.
대표적인 소금구이로서는 전어구이, 조기구이, 도미구이, 민어구이, 전복구이, 조개구이, 송이버섯구이 등이였다.
특히 전어구이는 굽는 냄새가 하도 좋아 전국에 소문이 났는데 시부모의 구박에 못이겨 집을 뛰쳐나갔던 한 며느리가 전어 굽는 냄새에 끌리는 마음을 참지 못하여 다시 돌아오게 되였다는 이야기가 속담으로 되여 지금까지도 전해지고있다.
구이의 일종인 산적도 발전하여 고급한 료리로 이름났다.
산적은 여러가지 고기나 물고기, 남새를 편내여 양념에 재운 다음 꼬치에 꿰여 굽거나 고기를 잘게 다져 반대기를 빚어 적쇠에 구워낸것이다.
산적은 오랜 세월을 거쳐 발전하여 그 가지수도 늘어났는데 소고기약산적, 생선약산적, 닭고기약산적 등이 유명하였다.
화양적도 쓰이는 음식감이 다양하고 그 맛이 독특하여 모든 명절이나 대사의 상차림에 반드시 리용되던 료리였다.
콩나물기르기
콩나물은 남새를 소금에 절여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던 그 시기에 모래무지에서 자라나는 콩싹에서 창안되여 유래된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콩의 원산지인 우리 나라의 북부지역은 대륙성기후대로서 겨울추위가 류달리 엄혹하다.
추위가 심한 겨울에 밭에서 재배할수 있는 작물이란 하나도 없다.
더우기 옛날에는 오늘처럼 재배남새의 품종개량도, 온실재배같은 방법도 없었으며 남새의 저장, 운반수단도 발전되여있지 않았다.
이런 형편에서 겨울에 남새를 해결한다는것은 그 시기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아름찬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자연의 도전에 그저 순응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식물의 발아원리를 리용하여 콩을 싹틔워 남새로 리용할 기발한 착상을 하고 생활에 받아들였다.
콩나물은 콩에 어느 정도의 온도를 보장하고 물만 대주면 충분히 발근, 발아한다.
식물의 종자가 한번 발아하여 성장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훌륭한 남새로 된다.
발아한 콩나물로서의 콩의 조성은 마른콩과는 전혀 달라 비타민C가 새로 생기고 비타민B₁, B₂의 량도 증가하는데 특히 비타민C는 콩나물 100g만 먹어도 그것의 하루필요량을 다 섭취할 정도로 그 량이 많다.
콩나물을 기르게 됨으로써 우리 인민들은 땅을 쓰지 않고도 남새를 대량 생산하여 겨울철에 부족되는 비타민C를 충분히 섭취할수 있게 되였으며 기르기조건 즉 온도와 물을 임의로 조절하면서 사람의 요구에 따라 그 수확을 할수 있게 되였다.
오래전부터 우리 인민들은 콩나물은 숙취(마신 술이 깨지 않은 취한 기운)를 푸는데도 특효가 있다고 하면서 뿌리를 다듬지 않은 콩나물로 해장국을 끓여먹군 하였다.
오늘에 와서 확증된데 의하면 콩나물속에는 알콜분해를 촉진하는 성분이 풍부히 들어있는데 특히 술기운을 해소하는 효소를 활성화시키는 아스파트산이 콩나물뿌리에 제일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해장국감으로 콩나물을 쓴 우리 조상들의 슬기도 놀랍지만 해장국을 끓일 때 그 뿌리를 다듬지 말아야 한다고 한 그 지혜에 우리는 다시금 찬사를 보내지 않을수 없다.
콩나물은 인삼과 같이 우리 나라에서 나는 콩과 우리 나라의 물로 길러야 제맛이 난다.
우리 인민의 일상음식
일상음식은 말그대로 사람들이 끼니때마다 늘 먹군 하는 음식이다.
우리 인민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에는 대체로 밥, 국, 김치 그리고 지지재, 찌개, 졸임, 장절임 등이 있다.
밥은 우리 인민들의 가장 기본적인 주식물이며 우리 나라 민족음식에서 그 연원이 가장 오랜 음식중의 하나이다.
우리 인민들이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밥을 주식으로 하게 된것은 밥짓기에 알맞는 알곡작물들이 일찍부터 널리 재배되고 밥이 조선사람의 구미와 기호에 아주 잘 맞으며 조리방법이 간단하고 짧은 시간에 지어먹을수 있는 음식이라는 사정과 관련되여있다.
밥은 크게 알곡만으로 지은 밥과 알곡에 기타 다른 음식감들을 넣고 지은 밥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알곡만으로 지은 밥에는 백미밥과 잡곡밥이 있다.
백미밥은 기름이 흐르는듯 윤기가 돌며 눈처럼 햐얀 색을 띠기때문에 정갈한것을 좋아하는 우리 인민의 민족적생활정서에 꼭 맞으며 씹으면 씹을수록 구수하면서도 단맛이 느껴져 매일 먹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잡곡밥에는 한가지 또는 두가지이상의 잡곡을 섞어 지은 밥, 백미와 잡곡을 섞어서 지은 밥이 있다.
한가지 잡곡만으로 지은 밥은 꼿꼿하여 먹기 힘들다는데로부터 강조밥, 강보리밥 등으로 불리웠는데 이런 밥들은 옛날 벼를 많이 생산하지 못하는 지방에서 흔히 먹었다.
백미에 다른 잡곡을 섞어 지은 밥에는 기장밥, 밀밥, 보리밥, 강냉이밥 등이 있다.
알곡에 남새를 비롯한 보조음식감들을 넣고 지은 밥에는 대표적으로 김치밥, 콩나물밥, 산나물밥 등이 있다.
이러한 밥들은 대체로 식량을 절약하거나 밥맛을 특색있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지어먹은 밥들이였다.
국과 김치는 우리 인민이 일상적으로 끼니때마다 주식물에 곁들여먹는 주요부식물이다.
국이 우리 인민의 일상음식에서 기본부식물로 되여온것은 기본주식물인 밥이 국물이 있어야 먹기 쉬운 음식이였던 사정과 함께 여러가지 국을 만드는데 가장 효과적인 간장, 된장이 일찍부터 양념감으로 널리 리용되여온것과 주요하게 관련되여있다.
우리 인민들은 사시장철 아침저녁으로 국을 만들어 밥에 곁들여먹었는데 더운국을 기본으로 하면서 무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랭국도 즐겨 만들어먹었다.
우리 나라에 《술적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밥에 국을 곁들여내는것은 우리 인민의 전통화된 식생활관습이다.
《술적심》은 밥상을 차릴 때 《특별하게 잘 끓인 국은 아니라도 밥을 뜨기에 앞서 숟가락을 국물에 적실수 있도록 간단하게라도 국을 끓였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국에 밥을 말아먹기 좋아하는 우리 인민의 식생활풍습도 오랜 기간 국을 식생활에 리용해오는 과정에 생겨난것이였다.
국은 음식감에 따라 남새국, 고기국, 물고기국 등으로, 내는 온도에 따라 더운국과 랭국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김치는 국과 함께 밥을 더 맛있게 먹게 하고 식욕을 돋구어주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부식물이다.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밥상에 김치가 없으면 밥의 진미를 다 맛볼수 없는것으로 여겨왔으며 밥상에 다른 찬은 비록 못놓아도 김치만은 사시장철 떨구지 않고 반드시 차려놓는것을 조선사람의 고유한 식생활풍습으로 전해왔다.
지난날 우리 인민들이 즐겨 만들어먹은 대표적인 김치들을 보면 통배추김치를 비롯하여 석박김치, 동치미, 깍두기, 풋절이김치, 오이소박이김치 같은것들이다.
지지개, 찌개, 졸임은 여러가지 음식감들로 좀 짭짤하게 만든 반찬으로서 조선사람의 구미에 잘 맞아 누구나 즐겨먹었으며 장절임, 젓갈은 김치처럼 반찬구성에서 큰 몫을 차지하거나 많이 먹는 찬은 아니여도 밥맛을 돋구어주기때문에 간단한 끼니음식상을 차릴 때에는 밑반찬으로 언제나 놓이군 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일상음식에 포함되는 부식물들을 보통 《반찬》, 《찔게》라고 하였는데 평안도사람들은 《찔게》라고 하고 《반찬》이라고 하면 물고기를 가공한것을 가리켰으며 함경도지방에서는 《찔게》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부식물일반을 《반찬》이라고 하였다.
화전놀이
화전은 옛날 우리 인민들이 주요한 봄명절로 쇠여온 삼질날의 절식이자 봄철의 특식이였다.
음력 3월이 되면 하늘이 구름 한점없이 맑게 개이고 산과 들이 울긋불긋 아름다운 들과 파릇파릇 돋아나는 아름다운 새 싹들로 곱게 단장된다.
그래서 춘삼월을 호시절이라고도 한다.
우리 인민들은 이러한 봄의 향취를 한껏 맛보기 위해 음력 3월 3일을 명절로 정하고 이날에 한바탕 논 다음 한해농사에 달라붙군 하였다.
이날이 바로 삼질이였다.
삼질은 력사기록에 《상사》, 《답청절(봄철에 풀을 밟아보는 명절이라는 뜻)》로 소개되여있으며 민간에서는 《삼질날》이라고도 하였다.
3월 삼질에 우리 인민들이 즐긴것은 화전놀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길수로 여겨오는 《석삼》이 중복되는 날인 삼질에 식구들끼리 혹은 가까운 이웃이나 부녀자들끼리 들놀이를 조직하고 화전과 같은 특색있는 음식들을 만들어먹으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는데 이날의 들놀이를 꽃을 보며 즐기는 놀이라고 하여 《꽃놀이》, 《화류놀이》 또는 화전을 지져먹는 놀이라고 하여 《화전놀이》라고 하였다.
화전놀이는 우리 조상들이 세나라시기부터 즐긴 민속놀이였다.
온갖 꽃들이 피여나는 화창한 3월의 이날 꽃구경, 산천구경을 하면서 화전도 지져먹고 노래도 부르고 시도 지어 읊던 이 화전놀이는 녀성들에게 있어서 음식재능을 보여주는 마당이기도 하였다.
녀인들은 이날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소담해지고 기름기가 돈다고 하면서 내가에서 머리를 감기도 하였다.
3월 삼질에 화전을 지져먹기 좋아한 우리 인민들은 《내가에서 돌을 고이여 소댕걸고 가루반죽 참기름에 꽃을 지졌네 집어다가 맛을 보니 혀끝 새로와 이해 한해 봄빛이 배에 넘치네》라는 민요도 지어불렀다.
이날에 우리 인민들이 주로 지져먹은 화전은 진달래화전이였다.
진달래화전은 보기에도 좋을뿐아니라 그 맛 또한 향기로와 잔치상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큰 상에 놓이기도 하였다.
화전놀이때의 음식에는 수면과 화면도 있었다.
수면은 진달래꽃잎에 록두농마반죽물을 씌워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다음 붉은색을 들인 꿀물에 넣어 만든 음료이고 화면은 록두가루를 반죽하여 가늘게 썰어 국수발을 만든 다음 이것을 오미자물과 꿀을 섞은것에 두고 잣을 띄워내는 음료이다.
수면과 화면은 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빼놓을수 없는 철음식이기도 하였다.
봄철과 나물
봄이 오면 겨울내 불어대던 찬바람이 수그러들고 훈훈한 바람이 불어온다.
산과 들은 울긋불긋 꽃바다에 잠기고 엄혹한 겨울을 이겨낸 갖가지 식물들이 파아란 잎새를 내밀며 자기의 소생을 알린다.
우리 인민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이 하많은 식물들가운데서 뜯거나 캐여서 반찬감으로 리용할수 있는 식물들을 나물이라 하면서 봄이 오면 이것들을 채취하여 만물이 소생하고 온갖 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계절의 정서에 맞게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 가정의 음식상을 이채롭게 장식하였으며 겨울기간 부족되였던 비타민도 보충하면서 건강을 돌보았다.
뿐만아니라 이 시기에 나물들을 많이 채취하여 말리거나 절이는 방법으로 보관해두었다가 명절날, 대사때는 물론 귀한 손님이 오거나 가정적으로 의의있는 날들에 별식을 만들어먹으면서 식생활을 다양하게 조직하여왔다.
뽀얀 쌀 씻은 물을 받아서 가무잡잡한 모시조개를 약간 넣고 된장을 풀어넣어 끓인것이 맛이 하도 좋아 봄철의 으뜸으로 쳐준 냉이국, 《귀신》도 좋아한다는 고사리나물, 향긋한 곰취쌈…
우리 인민들이 식생활에 리용하여온 나물의 종류는 참으로 많으며 그것으로 만든 개개의 음식 또한 독특한 맛과 향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준다.
19세기에 창작된 《농가월령가》는 우리 인민들의 이러한 풍속에 대해 이월(음력)에는 고들빼기, 씀바귀, 소리쟁이, 물쑥, 달래, 냉이와 같은 들나물을 캐여먹었고 삼월(음력)에는 삽주, 두릅, 고사리, 고비, 도라지를 비롯한 산나물들을 채취하여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먹는다고 노래하였다.
산과 들에서 자라는 식용식물들중에는 버섯을 비롯한 하등식물들과 산열매들도 있지만 우리 인민들은 전통적으로 써오는 나물이라는 범주에 이것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산에서 나는 나물은 산나물, 들에서 자라는 나물은 들나물이라고 하는데 산에서도 자라고 들에서도 자라는 나물들이 적지 않기때문에 이러한 구분이 명백치 않고 또 산에서 자라는 나물이 대부분이므로 우리 인민들은 흔히 전통적인 밭남새처럼 심어가꾸지 않고 자연적으로 자라는 야생식용식물들을 산에서 자라든 들에서 자라든 구별없이 산나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식용으로 리용할수 있는 야생식물이 수백종 있는데 그중 80%이상이 산에서 난다.
지금은 일부 나물들을 재배하여 먹기도 하고 특히 온실농법이 발전하면서 그 품종이 더욱 많아지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나물은 산과들에서 절로 자란것을 채취하는것이 기본이므로 사람들은 여전히 나물을 야생식용식물로 리해하고있다.
갖가지 나물들로 봄철의 식생활을 이채롭게 장식하는 풍속은 조선사람들의 고유한 식생활방식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구수한 토장국
최근에 콩된장의 효능이 과학적으로 밝혀짐으로써 그것이 건강장수에 매우 좋은 식료품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있다.
콩된장이 큰 주목을 끌고있는 기본요인은 암을 방지하는데 있다.
자료에 의하면 된장국을 매일 먹는 사람은 된장국을 먹지 않는 사람에 비하여 암으로 죽는률이 40%나 낮다고 한다.
이것은 콩단백질이 기본성분으로 되여있는 된장이 암을 막는 작용을 한다는것을 보여준다.
된장속에 있는 효모와 젖산균도 발암성물질들을 제거하고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며 위를 든든하게 한다.
콩을 띄워서 만든 토장을 걸러서 끓인 토장국(된장국)은 우리 나라의 가장 보편적인 일상 음식의 하나이다.
우리 인민이 토장국을 먹어 온 력사는 력사자료에 보이는 때로부터 계산하여도 1 500년이상이나 된다.
우리 인민들이 오래전부터 즐겨 만들어먹어온 토장국가운데서 몇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겨울철에 소뼈를 고은 국물에 된장, 배추, 콩나물, 무우 등을 넣고 끓인 토장국이 있다.
맛이 짙은 이 토장국은 평양사람들이 특별히 즐기였는데 지방에 따라 덜 말린 청어나 멸치를 넣고 끓이기도 하고 남새만으로 끓이기도 하였다.
쌀씻은 물에 된장, 기름기가 있는 고기, 시금치, 아욱, 냉이, 파, 마늘 등을 넣고 끓인 토장국이 있다.
이 토장국은 된장과 부음식감들의 고유한 맛성분, 향신료의 성분, 쌀 씻은 물에 들어있는 효소성분이 잘 조화되여있어 맛이 좋다.
토장국을 끓일 때 쌀 씻은 물을 리용하는것은 벼농사를 많이 하여온 지방들의 풍습이였다.
날콩가루를 넣고 끓인 토장국이 있다.
이 토장국은 우리 나라의 북부지방과 산간지역사람들이 많이 끓여먹었다.
날콩가루를 넣고 끓인 이 된장국은 맛이 구수할뿐아니라 단백질의 공급원천으로서의 가치도 가진다.
콩가루를 쓰는것은 닦은 콩가루가 더운 국물에 잘 풀리지 않기때문이다.
이외에 김장철에 말리워두었던 시래기나 감자, 기름기가 있는 고기 등을 리용하여 끓인 토장국도 있었는데 이 국은 밥반찬은 물론 술안주로도 널리 쓰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