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생활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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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문화
청명
청명은 날씨가 맑고 봄이 시작된다는 뜻을 가진 24절기의 하나인데 양력으로 4월 5일에 든다.
청명날에 국수, 지짐, 젓갈, 포, 탕, 과일 등을 준비하여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경칩날에는 단풍나무를 잘라 나무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 마시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러면 위탈이 생기지 않는다고 전해져오고있다.
류두날
음력 6월 15일은 류두날이라 하였는데 류두란 《동류두목욕》이라는 말이 함축된것이다.
그 뜻은 동쪽의 내가에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으며 몸을 깨끗이 씻는다는 말이였다.
《렬양세시기》에 의하면 이날에 음식을 갖추어 가지고 동쪽에 있는 내가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며 잔치를 베풀고 즐겁게 놀았다고 썼다.
12세기 사람 김극기가 쓴 글에도 류두날에 대한 자료가 있는것으로 보아 세나라시기에 이미 민속명절로 쇠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류두날은 오랜 옛날부터 무더운 여름철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그리고 개체위생을 강조하고 장려하기 위하여 생겨난 좋은것이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에 수단, 건단, 수각아, 쉬움떡, 련병, 류두면, 어죽, 팥죽 등을 해먹었다고 한다.
류두날에 해먹는 국수라고 하여 《류두면》이라고 부르던 음식은 햇밀쌀을 가루내여 만든 국수를 말하는것이였다.
수단은 찹쌀이나 백미, 찰수수가루를 쪄서 만든 가래떡을 밤알처럼 빚어 얼음을 넣은 꿀물이나 오미자물에 담그어먹는 달고 시원한 찬음식이였다.
건단은 밤알처럼 빚은 떡을 물에 담그지 않고 고물을 묻히거나 꿀을 발라먹는것이였다.
북쪽지방에서는 보통 팥이나 당콩을 삶고 거기에 백미나 수수쌀가루로 빚어 만든 밤알같은 떡을 뜯어 넣어 범벅을 만들어먹었다.
련병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밀어서 기름에 지진 다음 《조호미》(고채의 열매)나 꿀에 버무린 콩 또는 깨를 소로 넣고 여러가지 모양으로 말아 접어서 만들었다.
삼복
삼복은 여름철의 명절도 절기도 아니였지만 옛날 사람들은 한 여름의 가장 더운 때를 가리키는 날로 정하고 쇠여왔다.
복이란 말은 땅에 엎드린다는 뜻으로서 너무 무더워 움직이기 싫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있는데 사람들은 이 무더위를 피하여 서늘한 곳(피서지)으로 가거나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먹었다.
복날들에 해먹는 음식은 보리밥, 팥죽, 단고기국, 닭탕 등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식으로는 단고기국, 소고기매운탕(육개장), 닭탕(삼계탕)을 제일로 일러주었다.
단고기국을 먹으면 땀을 많이 흘려 허약해진 몸을 추켜세우고 더위도 막을수 있다고 하여 오래전부터 풍습으로 전해왔다.
소고기탕은 단고기국처럼 푹 끓여 잘게 찢어 양념한것이고 삼계탕은 햇병아리의 배속에 인삼, 대추, 찹쌀을 넣고 푹 고아낸것으로서 단고기국을 멀리하는 사람들과 녀성들이 주로 먹었다.
이러한 음식들은 모두 팔팔 끓여서 땀을 흘리면서 뜨거운것을 먹어야 효과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더위는 더위로 다스려야 된다는데서부터 나온것이였다.
팥죽 역시 영양가가 높고 맛이 있으므로 더위로부터 오는 허약을 막고 입맛을 돋굴수 있는 음식이여서 누구나 즐겨먹었다.
삼복때 평양지방에서는 불고기, 비빔밥 같은것도 해먹었는데 이것 역시 몸보신을 위하여 특별히 만든 음식이였다.
칠월칠석
칠월칠석은 명절은 아니였으나 밤하늘에 비낀 견우성과 직녀성의 움직임을 살펴보면서 즐기는 날이였다.
옛날부터 《칠월칠석(음력 7월 7일)》수단이요, 팔월추석 송편이라고 하였는데 칠석날에 수단을 해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일러왔다.
칠석날 저녁이면 집집마다 수단을 만들어 저녁밥을 일찌기 먹고 토방이나 앞마당에 펴놓은 멍석우에 둘러앉아 할아버지, 할머니들로부터 견우와 직녀에 대한 전설을 들으며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였다.
견우성과 직녀성에 대한 전설은 지방마다 다르며 사람마다 흥미를 돋구려고 이야기를 덧붙이다보니 그 종류가 많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간단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았다.
아득한 옛날 하늘나라에 소를 기르는 견우라는 총각과 천을 짜는 직녀라는 처녀가 살고있었는데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들이 사랑에 빠져 일을 게을리하는것을 눈치챈 옥황상제는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견우를 동쪽에, 직녀를 서쪽에 갈라놓고 한해에 한번씩 7월 7일에만 만날수 있게 허락하였다.
7월 7일이 되면 그들의 상봉을 도와주기 위해 땅우에 있는 까막까치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서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주었는데 이 다리를 《오작교》라고 하였다.
견우와 직녀는 이 다리를 건너서 서로 만나 쌓였던 정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칠석날 밤에 비가 오면 그것은 견우와 직녀가 오래간만에 만나 기쁨에 겨워 흘리는 눈물이고 다음날 새벽에 비가 오면 서로 헤여지기 아쉬워 흘리는 리별의 눈물이라고 말하군 하였다.
아이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신기하게 들으며 밤하늘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을 찾으며 바라보군 하였고 처녀들은 직녀성에게 바느질과 수놓이솜씨가 늘게 해달라고 빌었으며 총각들은 견우직녀를 주제로 하여 시를 짓기도 하였다.
견우직녀전설이 고구려의 덕흥리무덤벽화에도 있는것으로 보아 칠월칠석맞이풍습은 5세기 초 이전부터 년년이 계승되여 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칠석날의 이러한 풍습은 옛날부터 아이들에게 천체에 대한 상식과 탐구심을 키워주며 남녀간의 사랑에서 신의를 가지고 대하도록 하는데서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
한가위(추석)
한가위날은 음력 8월 15일에 쇠는 명절로서 한해 민속명절가운데서 가장 크게 쇠는 명절의 하나이다.
추석이란 말은 가을철의 저녁풍경이라는데서 유래된것인데 한자어로 된 발음이였다.
오곡이 무르익는 좋은 계절인 가을철의 달밝은 보름날을 명절로 정한데서 생긴 한가위를 두고 옛날에는 《5월농부 8월신선》이라는 말도 있었다.
이것은 음력 5월은 농부들이 이름 그대로 농사일로 등거리가 마를 날이 없이 일하지만 음력 8월은 한해농사를 마무리할 때여서 일을 해도 기쁘고 성수가 나서 신선처럼 지낼수 있다는 말로서 그만큼 8월 가위날이 풍요한 시기라는것이였다.
력사적으로 보면 세나라시기에 《가배날》, 《가위날》이라고 불러왔는데 《가위》라는 말은 가을의 중간, 《한가위》라는 말은 가을의 큰 명절이라는 뜻을 담고있다.
한가위날은 발해, 고려와 조선봉건왕조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력사적과정에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큰 민속명절의 하나로 고착되였다.
한가위날에는 햇곡식을 먼저 조상들에게 맛 보인다는 의미에서 올벼를 골라 쌀을 내였고 록두, 팥, 콩 등은 여문것을 골라 지짐이나 고물감을 마련했다.
이날의 독특한 음식으로는 송편, 찰떡, 시루떡, 밤단자, 청주 등이였다.
한가위날은 송편을 먼저 꼽았는데 송편은 이날에 빠져서는 안될 음식이였다.
이날에 지방마다 특색있는 음식을 만들어먹기도 하였는데 연안, 배천지방에서는 잡아당겨야 끊어진다는 찰떡을, 평양지방에서는 유명한 노치를, 개성지방에서는 토란국과 토란단자를 해먹었다.
한 가위날에 햇곡식으로 성의껏 지은 음식과 갖가지 과일 등으로 제물을 마련한 사람들은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음식들을 나누면서 즐기는것은 우리 나라 그 어디서나 볼수 있는 전통적인 풍습으로서 조상을 잘 모시는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 인민의 고유한 민족적전통으로 되였다.
한가위날 저녁은 둥근 보름달이 떠올라 사람들은 달구경놀이를 하였다.
밝고 시원한 은백색으로 대지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둥근달을 바라보며 제나름으로 깊은 사색에 잠기군 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둥근달을 바라보며 자기들의 소박한 꿈이 담긴 시를 읊거나 《달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풍습도 내려오고있다.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사람들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농사결실을 예언하기도 하였는데 달이 밝으면 올해에 풍년이 들것이라고 좋아하였고 구름이 끼면 밭곡식이 잘 여물지 못할것이라고 걱정하기도 하였다.
물론 한가위날의 날씨가 가을철의 기상현상을 좌우하는것은 아니지만 당면한 가을걷이를 앞두고있는지라 달이 밝고 흐림을 보고 농사형편을 가늠하는것은 전혀 허황한것이라고는 말할수 없다.
중구
중구는 음력 9월 9일에 맞는 민속명절로서 산에 올라 단풍을 구경하며 국화지짐을 지져 먹거나 국화술을 마시면서 즐기는 날이였다.
중구란 아홉구자가 중복되는 날이라는데서 유래되였는데 즉 9월 9일이라는 뜻이다.
중구를 《중양》이라고도 하였는데 중양은 양수(기수)가 겹친 날이라는 뜻이다.
우리 나라에서 중구를 명절로 맞은 기록은 세나라시기에 처음 보이고있다.
고려시기에는 《경인년 9월 9일》이라는 시도 전해진다.
임금의 수레앞에서 란리가 일어나
사람 죽이기를 삼대베듯 하였구나
그래도 좋은 시절 그대로 보낼수 없어
술잔에 국화꽃을 띄워서 마시는가
19세기 기록인 《렬양세시기》의 기록에는 중구에 대하여 《단풍이 들고 국화가 피는 시절에 남녀가 유람하는것이 대체로 화류놀이와 같은데 량반들가운데 옛날 풍속을 좋아하는 자는 9월 9일에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짓는다.》라고 썼다.
보는것처럼 중구에 노는것이 화전놀이와 같다는것은 꽃과 버들이 피는 봄날의 놀이인 삼월삼질놀이와 같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중구날에 해먹는 독특한 음식으로서는 국화지짐과 화채였다.
국화지짐은 삼월삼질날에 먹던 진달래지짐과 같은것이였는데 이것을 《화전》이라고도 하였다.
국화지짐은 찹쌀가루와 국화를 따넣어서 지진것이고 화채는 가을철에 흔한 배와 유자, 석류, 잣 같은것을 잘게 썰어 꿀물에 타서 마시는것이였다.
국화술은 술에 국화를 띄워놓은것을 말하였다.
중구는 단풍을 즐기는 명절이였으므로 국화지짐이나 국화술외에 다른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먹는것은 없었다.
동지
음력 11월 동지달이라고 하며 이달안에서 밤이 제일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을 《동지날》이라고 불러 오고있다.
하기에 낮이 제일 길어졌다가 점차 줄어져서 동지날에 이르러 가장 짧아지여 다음날부터 다시 조금씩 길어지며 밤은 점차 짧아진다.
우리 선조들은 낮과 밤, 시간이 반대로 바꾸어지는 변화를 계기로 명절을 정하고 쇠기 시작하였다.
동지달은 몹시 추운때이고 설날이 가까와오므로 동지날을 《작은설》이라고도 불렀다.
이날에는 반드시 동지팥죽을 쑤어먹었는데 이날에 먹는 팥죽은 나이를 한살 더 먹는것으로 여기는 관습이 있었다.
동지팥죽을 먹어야 나이를 한번 더 먹는다고 한것은 동지날을 설날로 여겼던 옛 풍습에서 온것이라고 볼수 있다.
동지죽에 찹쌀가루(수수가루, 밀가루)반죽을 새알같이 빚어 넣고 동지죽을 쑤었는데 이것을 《새알심》 또는 《오그랭이》라고 하였고 자기 나이만큼 먹어야 몸이 건강해진다는 말도 전해온다.
그리고 동지날에 팥죽을 먹으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팥죽을 꼭 쑤어먹도록 하려는데서 건강에다 비유한것이였다고 볼수 있다.
동지팥죽을 여러 그릇에 담아 놓고 끼니를 에우기도 하였으며 이웃간에 서로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평양지방에서는 해가 떠오르기 전에 쑤어먹는 풍습이 있었다.
동지날에는 팥죽외에도 랭면이나 신선로를 즐기였으며 수정과, 동치미, 청어, 조기, 굴, 곶감, 잣 등을 먹었다.
동지가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라고 하였고 초순을 지나서 들면 《로동지》라고 하였다.
애동지가 드는 해는 그해 겨울이 춥고 로동지가 드는 해는 춥지 않다는 말이 전해 온다.
철음식
철음식이란 철따라 나는 음식감을 가지고 계절적특성을 살려 조리한 음식을 말한다.
설음식을 일명 계절음식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의 식생활은 계절적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그것은 음식감의 생산 및 채취가 계절성을 띠며 사람들의 입맛, 식욕, 소화능력도 계절에 따르는 기후의 영향을 받게 되는것과 관련된다.
우리 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철바뀜의 변화가 명확하고 철에 따르는 음식감의 생산이 다양한데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계절에 맞는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먹음으로써 식생활에서 계절적특성을 잘 살려왔다.
지난 시기 우리 선조들은 새싹이 움트고 꽃이 피는 봄철이 오면 산과 들에서 싹트고 자라는 쑥과 두릅, 냉이, 고사리, 고비 등 향기로운 산나물과 들나물, 봄남새로 밥상을 차렸고 더위로 입맛이 떨어지는 여름철에는 시원한 랭국과 햇김치로 땀을 들이군 하였다.
오곡백과 무르익고 한해농사를 마감 짓는 풍요한 가을에는 햇곡식으로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먹는것을 풍습으로 여겨왔다.
늦가을부터는 어느 가정에서나 겨울나이김장을 담그는것이 하나의 풍경으로 되여왔으며 추운 겨울에는 뜨끈한 떡국을 먹는것이 즐거운 식생활의 한부분으로 되여왔다.
지난 시기 이러한 철음식을 《시식》이라고 불렀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농경생활과 관련한 계절적인 명절이 많았으므로 명절음식이 철음식과 깊은 련관속에서 발전하였던것이다.
이러한 명절음식을 《절식》이라고도 불렀다.
봄철음식
봄은 활력의 계절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산과 들에는 아지랑이 피여오르며 부푼땅에서는 온갖 식물의 새싹이 움트며 아름다운 꽃들이 피여나는 봄이 오면 사람들은 입맛이 당기고 기력을 돋구는 음식들을 요구하게 된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봄철이면 입맛을 돋구고 몸의 저항성을 높여줄수 있는 음식들을 만들어 식생활에 리용하였다.
특히 비타민을 많이 섭취할수 있는 냉이, 달래, 쑥, 고사리, 고비, 삽주, 두릅, 닥지싹, 무수해, 시금치 등 신선한 봄남새와 산나물, 들나물을 가지고 국, 김치, 무침과 같은 여러가지 음식을 해먹었다.
대표적인 봄철음식으로서는 냉이국과 냉이무침, 달래김치, 달래무침, 쑥떡, 쑥절편, 두릅김치, 더덕구이, 시금치나물, 미나리김치, 고사리나물 등이다.
냉이는 이른 봄철에 제일 먼저 돋아 나는 들나물인데 냉이에는 비타민과 광물질이 많고 영양가가 높아 입맛을 돋구는 향기로운 식품으로 우리 인민들이 각별히 좋아하는 봄철음식감이다.
토장을 두고 끓인 냉이국은 향긋하고 시원하며 구수한 맛으로 하여 예로부터 돼지고기국 못지 않다고 높이 일러주었다.
달래무침도 봄철에 누구나 좋아하는 좋은 봄음식이다.
달래를 기름에 살짝 볶다가 여러가지 양념을 두고 무쳐 만든다.
또한 달래를 밥가마에 넣고 살짝 찌든가 끓는 물에 슬쩍 데쳐내여 양념장이나 초고추장에 무치여도 별맛이다.
달래로 만든 달래김치 역시 시원하고 독특한 향기로운 맛을 주는것으로 하여 널리 알려졌다.
쑥은 예로부터 소화를 돕고 식욕을 증진시켜 주는 약으로 알려져있다.
이로부터 어린 쑥을 짓찧어 쌀가루와 섞어만든 쑥떡은 향기롭고 입맛을 돋구어주며 쉽게 변하지 않는 음식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쑥은 구충효과도 있으므로 쑥떡은 예로부터 봄철에 어느 가정에서나 꼭 해먹어야 되는것으로 인정된 봄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두릅김치는 봄철에 두릅나무의 만문한 어리순을 채취하여 만든것이다.
두릅으로는 무침, 볶음, 산적, 초침 등을 해먹어도 좋다.
두릅은 그 영양가치와 맛, 향기에 있어서 닭고기에 못지 않는 좋은 음식감으로 알려져있다.
더덕구이는 더덕을 방망이로 두드린 다음 껍질을 벗기고 고추장, 간장, 파, 마늘, 깨소금, 사탕가루 등으로 만든 양념장을 발라 슬쩍 구워서 만든 별미음식이다.
더덕은 약효성이 많고 쓴맛이 적기때문에 껍질을 벗겨 그대로 장에 찍어 먹어도 좋다.
시금치는 비타민과 단백질이 많이 들어있고 맛이 좋은 고급잎남새로서 봄철에 우리 인민들이 널리 먹어왔다.
미나리는 약효성이 많고 독특한 향미를 주는 남새로서 미나리김치뿐아니라 생채로 먹기도 한다.
여름철음식
봄이 가고 록음이 짙어지면 무더운 여름철이 시작되고 들판에서는 바쁜 농사일이 한창이다.
바깥기온이 높은 여름철에는 땀을 많이 흘리게 되며 더위때문에 피로하고 입맛이 떨어지게 된다.
우리 인민들은 이런데로부터 여름철이면 더위를 극복하고 원기를 돋구는 여러가지 음식들을 만들어 식생활을 조직하였다.
우선 여러가지 신선한 남새로 생채와 랭국을 많이 만들어먹었다.
우리 인민들은 한여름의 더위속에서 일하다가도 쉴참에 시원한 랭국을 마시면서 땀을 들이군 하였는데 이것은 땀으로 빠진 소금과 비타민을 보충하는것으로 여겨왔다.
여름철음식으로서 부루쌈이 이채를 띠였는데 부루쌈을 먹으면 더위를 막고 갈증을 해소한다고 믿어왔다.
또한 한여름에 많이 나는 애호박과 오이, 맵싸한 향기를 주는 풋고추, 풋마늘 등을 가지고 입맛을 돋굴수 있게 식생활을 다양하게 조직하였다.
여름철음식으로서 랭면과 록두묵도 소문났다.
콩국과 깨국도 단백질과 기름을 보충해주고 사람들의 원기를 보충해주는 좋은 음식으로 되였는데 콩국이나 깨국에 칼국수, 록두묵을 말아먹기도 하였다.
삼복중에는 단고기국과 삼계탕(닭인삼탕)을 즐기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삼복날에는 단고기를 푹 무르도록 삶아서 파와 양념을 두고 백반을 발라먹으면 땀을 빼고 더위와 허약한 증세에서 오는 병을 예방할수 있다고 하였다.
단고기가 식성에 맞지 않는 사람은 소고기매운탕(육개장)을 먹었다.
삼복에 일부 지방에서는 팥죽을 쑤어먹기도 하였다.
삼복때 평양지방의 음식으로는 랭면, 비빔밥, 불고기, 평양어죽과 대동강숭어탕이였다.
회도 우리 인민들속에 알려진 여름철영양음식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잉어회, 가물치회, 숭어회, 쏘가리회, 낙지회, 오징어회, 문어회 등을 해먹었는데 여러가지 생선회가운데서도 잉어회는 여름철 몸보신에 좋은것으로 각별히 일러왔다.
여름철음식으로 뱀장어, 칠색송어로 만든 구이와 졸임도 이름났다.
옛 사람들은 소서때의 뱀장어는 인삼과 같다고 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여름철음식으로 깨국, 미역국, 밀가루호박지짐, 호박에 돼지고기와 백미떡을 썰어 넣고 끓인 떡국과 같은 음식도 있었으며 이밖에 철에 나는 참외, 수박 등 생신한 과일로 만든 철음식도 있다.
술은 《창포주》를 철에 맞는것으로 일러왔다고 한다.
가을철음식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산과 들에 오곡백과 무르익은 풍요한 가을이 온다.
벼이삭은 고개를 숙이며 산천은 저저마다 아름다운 가을풍경을 드러내놓는다.
이때면 여름한철 잃었던 입맛이 되살아나게 되므로 여기에 맞게 식생할을 풍만하게 조직하는것이 중요하다.
우리 인민들은 가을철을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여 힘을 축적하는 좋은 계절로 여기면서 영양가 높은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먹었다.
우리 인민들은 한해농사를 결속짓는 가을철이 오면 한가위날 햇곡식으로 만든 떡과 송편 등을 만들어먹으며 즐기는것을 풍습으로 전해왔다.
파란 햇콩과 햇대추, 햇밤으로 속을 넣고 송편을 빚어 찐 떡은 맛도 좋고 볼품도 있어 특색있는 가을철음식으로 알려졌다.
또한 고기나 다시마를 넣고 끓인 토란국은 가을에나 맛볼수 있는 감칠맛 나는 음식이였다.
햇콩을 갈아서 만든 햇두부와 햇비지 그리고 무우밥과 무우설기떡, 마밥, 햇닭찜도 가을철음식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가을철은 송이버섯이 나는 계절이므로 여러가지 송이버섯료리도 유명하다.
가을철음식으로는 또한 여러가지 보쌈들과 벼가을이 끝난뒤 기러기와 물오리를 사냥하여 만든 찜, 구이, 탕, 졸임 등을 들수 있다.
가을에는 여러가지 김치를 담그기에 마을마다 집집마다 여념이 없었고 갖가지 절임도 많이 하였다.
겨울철음식
강산이 눈속에 묻히고 칼바람이 불어오는 추운 겨울이 되면 추위를 막아낼수 있도록 몸을 덥히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도록 식생활을 조직해야 한다.
우리 인민들은 추운 겨울에는 몸의 저항력을 높이고 추위에 견딜수 있도록 합리적인 영양을 보장하는것을 겨울철식생활의 기본내용으로 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더운 방안에서 더운밥과 뜨끈한 국을 먹으며 문밖의 설경을 바라보는것을 제일로 여겨왔다.
그런데로부터 동지날에는 팥죽, 설날이면 떡국을 해먹는 풍습이 생겨났으며 《설야멱적》과 같은 유명한 조선식불고기도 생겨나게 되였다.
겨울철에는 무우시래기국, 설렁탕, 콩나물국도 특색이 있었다.
또한 눈속을 헤치며 사냥한 꿩, 노루 등으로 불고기, 탕, 전골을 만들어먹기도 하였다.
겨울철식생활에서 특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김치였다.
겨울철에는 생남새와 나물이 부족한데로부터 김치는 우리 인민들의 중요한 남새음식으로 되였을뿐아니라 비타민C의 중요한 공급원천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예로부터 김치를 겨울나이반량식이라고 하였던것이다.
겨울철에 동해바다가에서 많이 잡히던 명태로 만든 명태국, 명태매운탕, 명태찜, 명태순대, 명란젓, 창난젓, 명태회국수도 겨울철음식으로서 우리 민족이 즐겨먹어온것이다.
특히 동해안일대에서는 털게찜과 자게찜이 유명하였는데 가을부터 다음해 3월까지의 게가 맛이 제일 좋았다.
서해안에서 많이 잡던 조개로 회, 구이, 볶음, 어죽을 쑤어먹는것도 겨울철 어촌풍경의 하나였다.
겨울에는 도루메기도 많이 잡히였는데 이것으로 구이, 식혜, 국, 찜을 해먹었다.
한겨울에 얼음구멍을 까고 잡아낸 잉어나 붕어료리도 특색있는 음식이였다.
무우오가리, 호박오가리, 가지오가리, 말린고사리, 말린고추잎, 말린고구마순 등으로 나물을 해먹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철음식은 계절적인 명절과도 밀접히 련관되면서 훨씬 다양해졌다.
명절은 해마다 정해진 날에 쇠며 사람들은 설날에는 떡국을, 한가위날에는 송편과 같이 명절때마다 서로 다른 음식을 만들어먹었으므로 대체로 명절에 차리는 음식은 철음식으로도 되였다.
별식을 주식으로 먹을 때의 상차림풍습
우리 인민들은 밥을 주식으로 하였지만 때에 따라 밥대신 국수, 죽, 떡, 지짐, 온반 등 별식을 주식으로 차려먹기도 하였다.
이때의 상차림은 반상차림과는 달리하였다.
- 국수상차림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국수를 좋아하였던것으로 하여 국수도 랭면, 온면, 비빔국수, 쟁반국수 등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국수에 따라 상차림이 달랐다.
찬국수(랭면)상에는 겨자, 간장, 식초, 고추가루를, 더운국수(온면)상에는 김치, 간장, 후추가루를 곁들이였다.
비빔국수와 쟁반국수는 다같이 양념에 비벼 국물을 두지 않고 상에 놓았다.
비빔국수는 단병두리(대접)에 담아내고 쟁반국수는 놋쟁반에 담아 낸다.
비빔국수나 쟁반국수를 상에 놓는 경우에 국수국물을 딴 그릇에 담아냈다.
그것은 상을 받는 사람에 따라 국수를 먹다가 국물을 더 부어 말아먹을수도 있기때문이다.
- 죽상차림
죽도 우리 인민이 즐겨먹는 음식들의 하나로서 평양어죽, 팥죽, 록두죽, 콩죽, 백미죽 등 이름난 음식들이 많다.
죽상에는 죽과 공기, 수저를 상앞에 차려놓고 가운데에 간장종지를 놓고 그뒤에 동치미를 놓았다.
그리고 그 좌우에 한두가지 찬을 놓았다.
미음상인 경우에는 앞에 미음과 공기, 수저를 놓고 가운데에 꿀, 간장, 소금을 놓았으며 그뒤에 동치미와 한두가지의 찬을 차려놓았다.
- 떡상차림
떡을 먹을 때는 국이나 김치국물을 마셔가며 천천히 먹는것이 우리 인민의 식생활관습이다.
따라서 떡상에는 떡을 담은 큰 접시와 국사발, 김치보시기가 반드시 놓이였다.
그리고 찰떡과 같이 고물을 필요로 하는 떡상에는 고물을 담은 접시가 더 놓이였다.
떡상에는 저가락과 함께 국이나 김치국을 먹기 위한 숟가락도 갖추어 차리였다.
- 지짐상차림
지짐상에는 접시에 담은 지짐과 함께 보시기에 담은 김치와 양념장을 곁들여냈다.
그리고 상앞에 저가락과 숟가락이 놓이였다.
- 국밥상차림
국밥상은 밥과 국을 각각 한그릇씩 놓고 김치와 양념장은 곁들여 내는 간소한 음식상이다.
국그릇은 국의 특성에 맞게 골라쓰군 하였다.
가령 생선국은 남비에 담아내고 갈비국이나 소고기탕국 같은것은 사기대접에 담으며 설렁탕은 오지그릇이나 뚝배기에 담았다.
- 온반상차림
온반상차림에는 보통 대접에 담은 온반과 보시기에 담은 김치 그리고 양념장이 놓이였다.
큰상에 고기와 술을 쓰는 풍습의 유래
오랜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은 잔치상에 술과 고기를 놓는것을 풍습으로 전해왔다.
우리 선조들이 술과 고기를 혼례음식의 필수품으로 써온 력사는 아주 오래다.
옛 기록들에 의하면 고구려사람들은 혼례때 남자의 집에서 녀자의 집으로 돼지고기와 술을 보냈다고 하였다.
이 사실은 우리 나라에서 일찍부터 고기와 술을 혼례음식으로 썼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혼례음식의 필수품인 고기에서 특별히 일러온것은 돼지고기와 닭고기였는데 이것은 돼지를 순산과 다산을 상징하는 동물로, 닭 역시 다산을 상징하는 날짐승으로 일러온데서 생긴 풍습이였다.
특히 교배상에 닭을 올려놓는것은 공통적인 풍습이였는데 수닭에게는 자식을 상징하여 밤을 물리우고 암탉에게는 장수를 상징하여 대추를 물리우기도 하고 붉은고추꼬투리를 물리우기도 하였다.
붉은고추꼬투리 역시 아들을 상징하였다.
닭을 교배상에 놓는 풍습은 닭을 《길조》 즉 상서로운 새로 보던 옛 이야기와 련관시켜보기도 하지만 기본은 아들딸을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라는 《다남다복》의 념원이 깃들어있었다.
술은 많은 민족들이 피를 대신하는 신성한것으로 여겨왔던것만큼 술을 나누어 마시는것으로써 부부간의 신의를 지킬것을 맹세하는 의례로 삼았던것이다.
돌잔치풍습과 돌상차림
예로부터 어린이출생 한돌을 흔히 첫돌이라고 하였으며 이날에 돌잔치를 차려온 풍습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우리 인민들은 아들딸들의 출생 한돌을 기념하는 첫돌맞이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고 뜻깊게 맞이하였다.
돌날에는 출생 첫돌을 맞는 귀여운 아들딸들에게 색동옷을 비롯한 아름다운 옷을 입혀 곱게 단장시켰으며 돌상을 차려주었다.
돌상에는 백설기, 수수송편, 무지개떡 그리고 능금(사과), 배, 감 등 제철의 과일을 차려놓고 그 앞으로 쌀, 실, 붓, 책, 활, 돈 등을 놓았다.
이렇게 차린 돌상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어린 아이를 지켜보면서 어른들은 애기의 정상적인 발육과 장래의 행복 그리고 좋은 재주를 가지고 복을 많이 받기를 기원하였다.
돌상음식에도 백설기와 수수경단은 돌상에서 빠져서는 안되는것으로 여기는 기본음식이였다.
백미로 백설기를 만들어 돌상에 차려놓는데는 아이가 흰눈같이 깨끗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로 건강하게 자랄것을 바라는 소박한 마음이 깃들어있었다.
팥고물에 묻힌 수수경단은 고유한 품격의 소유자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념원과 함께 건강한 체력과 장수를 상징하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때문에 부모들은 첫돌때만이 아니라 해마다 자식들의 생일때가 되면 백설기와 팥고물에 묻힌 수수경단을 만들어주려고 성의를 다하였다.
송편은 사람이 속에 든것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아롱다롱 오색찬연한 무지개떡은 무럭무럭 자라라는 념원을 담고있다고 한다.
우린 인민들은 돌상에 차려놓았던 음식을 이웃간에 나누어먹으면 아이의 장래가 좋아진다고 하면서 이웃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먹으며 화목을 돋구기도 하였다.
이러한 돌잔치는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먼 옛날부터 전국적으로 널리 진행되였다.
《갑일축수》와 환갑상차림풍습
환갑은 부모의 생일 60돐을 맞으며 부모를 위하여 자손들이 마련하는 생일맞이이다.
환갑을 《회갑》, 《환력》, 《주갑》 또는 《화갑》이라고도 하였다.
지난날의 봉건사회에서는 출생 60돐을 맞는 사람은 오래 산 장수자로 간주되였다.
그러므로 자손들은 부모의 장수를 축하하고 더 오래 앉아계시기를 축원하는 의미에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고려사》에 《갑일축수》(환갑날에 장수를 축하하다)라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고려시기에 벌써 환갑을 축하하는 풍습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환갑잔치에는 부모를 존경하고 성심성의로 공대하여온 우리 인민의 미풍량속이 담겨져있다.
봉건사회에서는 환갑을 맞이하는 부모들에 대한 성의가 흔히 잔치의 차림새와 규모에 따라서 평가되였으므로 환갑상차림에서는 지나친 랑비와 허례허식이 동반되군 하였다.
환갑상에는 밤, 대추, 살구씨, 호두, 감, 귤, 사과, 배와 같은 과일로부터 시작하여 약과, 강정, 빈사과, 다식, 사탕같은 각종 당과류와 서리, 쉬움떡, 송편, 절편, 찰떡을 비롯한 떡과 국수, 산적, 편육, 구이, 회, 찜, 신선로에 이르기까지 놓을수 있는 음식들은 최대한으로 올려놓았다.
이러한 환갑상을 《망상》 즉 바라보는 상이라 하였는데 혼례상보다 음식가지수가 많고 화려하게 차렸다.
환갑상에 올려놓는 음식가지수는 홑수로 하였으며 가지수와 높이에 의해 부모에 대한 효성의 정도를 가늠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환갑상을 준비할 때 높이 고일수 있도록 우선 둥근모양의 확이 얕은 접시를 고일 음식수만큼 준비하고 음식을 높이 고일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들을 써서 재치있게 쌓았다.
대추와 둥글넙적하게 다듬은 곶감에는 잣을 박아 곱게 보이게 하였다.
또한 떡을 고일 때에는 송편이나 절편, 찰떡 등을 각각 높이 담고 그우에는 주악, 화전, 단자와 같은 작고 고운 떡을 장식삼아 올려놓았다.
이와 같은 섬세한 기교를 필요로 하는 음식고임은 숙련된 솜씨가 필요한것이여서 큰상을 고일 때에는 《숙수》라고 불리우는 전문가를 청하는 일이 많았으나 가정의 주부들도 고이는 솜씨를 익히여 자체로 하기도 하였다.
회혼례풍습과 회혼례상
로인을 존경하는 의례로서 특이할만한것은 회혼례였다.
혼인을 기념하는 회혼례는 출생을 기념하는 생일맞이와 함께 세계적으로 널리 일반화된 공통적인 풍습으로서 우리 나라에도 있었다.
우리 나라의 회혼례는 혼인 60돐을 계기로 자손들이 부모를 축하하여 잔치를 베푸는것이였다.
그러므로 회혼례는 보통 80살안팎에 이르러서야 할수 있었고 그것도 부부가 생존하고있어야만 하였다.
우리 나라의 회혼례는 혼인잔치때와 꼭같은 의례절차를 걸치였다.
그러므로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 그것도 부유한 량반사대부들의 가정에서나 차리였다.
옛 기록에 1769년 봄에 안윤행이라는 사람이 회혼례를 하였는데 그는 79살이였고 부인 민씨는 80살이였다고 하며 혼인잔치때와 같이 하였다고 한다.
회혼례의 의례절차와 관련한 보다 생동한 자료는 18세기의 이름있는 화가 신윤복의 그림 《혼인 60돐》이다.
그림에는 대청마루앞에 4개의 긴 장대를 세워 특별히 장막을 쳐놓고 가운데 전안상을 놓았다.
그리고 전안상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는 퍽 늙은 부부가 젊은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혼인잔치때의 신랑, 신부와 같이 사모관대, 칠보단장을 하고 마주서서 허리굽혀 절하고있다.
그 두리에는 알아볼수 있는 사람만 하여도 50명정도나 그려져있다.
전해오는데 의하면 근세까지 회혼례를 진행하는 경우 늙은 부부는 젊었던 혼인잔치때와 같이 사모관대, 칠보단장을 하고 청실, 홍실을 늘인 조롱박술잔을 나누었으며 큰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자손들이 차례로 축배잔을 올리고 절을 하였는데 남자는 두번 절하고 녀자는 네번 절하였다고 한다.
회혼례때의 큰상차림은 잔치상차림과 같았다.
이러한 회혼례는 환갑을 비롯한 생일맞이와 함께 부모를 존경하고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우리 인민의 아름다운 풍습의 하나였다.
장담그기풍습
수천년동안 내려오는 조선사람의 식생활에서 장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것으로 되고있다.
우리 인민의 식생활에서 장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식료품으로 되는것은 간장, 된장이 직접 부식물로 리용될뿐아니라 부식물의 맛을 돋구어주는 주원료이기때문이다.
장맛이 좋으면 그것을 친 반찬맛도 다 좋아지고 장맛이 없으면 반찬맛이 다 떨어진다.
그리하여 우리 인민들속에서는 장을 정성들여 담그는 풍습이 일찍부터 생겨났다.
장맛이 음식맛을 좌우하였기때문에 민간에서 장을 맛있게 담그지 못하는 며느리는 시어머니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말까지 생기게 되였으며 지어 로인들은 장을 담글 때에 집식구들이 나들이를 가면 장맛이 나들이하는 집으로 따라간다고 하면서 나들이가는것을 막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사람들의 식생활에서 장담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장을 맛있게 담그는 일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돌렸는가 하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콩가을이 끝나면 그해 난 햇콩으로 된장담그기에 들어갔다.
콩가을은 대체로 조, 수수가을이 끝난 다음 추분이 지나서 하였는데 늦어도 상강(양력 10월하순)전으로 끝내였다.
장은 대체로 정월 우수 또는 10월 립동때에 담그었는데 그것은 이 시기에 장을 담그면 변질되지 않고 잘 익었기때문이다.
장은 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들어 가지고 담그었다.
《규합총서》, 《증보산림경제》를 비롯한 여러 고전료리도서들에 의하면 옛날의 장 담그는 법은 다음과 같다.
콩을 하루쯤 불구어 큰 가마에서 충분히 익혀 방아나 절구에 찧는다.
이것을 둥글게 빚어 단단하게 만든다.
이렇게 만든 메주를 벼짚우에 놓고 10~15일정도 있으면 누런색, 록색의 곰팽이가 끼게 되는데 이것을 벼짚으로 싸서 두석달 잘 말리워서 굳어지면 물에 깨끗이 씻어 독에 넣는다.
이때 독밑에 말똥불 또는 숯불을 피워놓고 꿀을 조금 넣어 타는 냄새가 날 때 메주를 넣는다.
소금과 물을 1:3 비률로 타서 독에 가득히 붓는다.
매일 이른 새벽이면 장독뚜껑을 열고 맑은 공기를 쏘이고 아침해빛을 쪼이며 맑은 물로 장독겉을 깨끗이 닦아낸다.
이와 같이 한 목적은 장이 익는 과정에 변질되지 않게 하며 나쁜 균이 침습하지 못하게 하자는데 있었다.
장을 익힐 때 보름에 한번정도씩 장을 휘저어주어야 장이 잘 익는다.
10월 립동에 담근 메주에서는 두달쯤 지나면 맛이 우러나면서 까만빛의 물이 생기는데 이 물을 가마에 붓고 졸이면 간장이 된다.
간장을 만들고 남은것에 메주 부스러뜨린것을 소금물에 담그어 삭히면 된장이 된다.
메주는 소금물과 배합되면서 익는 동안에 효모성분이 생겨나고 발효되는 과정에 구수하고 단맛을 내는 장으로 된다.
우리 인민들은 어느 집에 가든 그집 음식맛은 장맛이라고 일러왔다.
그리고 녀성들의 일솜씨와 재주도 바느질, 부엌일과 함께 장 담그는 솜씨를 가지고 평가하였으며 어느 가정에서나 장맛을 더 돋구기에 힘썼다.
장은 오래 묵여 들수록 더 맛있다고 하여 우리 인민들은 한두해 또는 그 이상으로 저장해두고 일상적으로 먹었다.
건강약식료리로 이름높은 조선료리
조선료리는 대대손손 민족의 우수한 지혜와 동식물자원을 식용으로 하는 과정에 우리 인민들이 쌓은 풍부한 경험이 합쳐져 이루어진 음식문화의 우수한 창조물이며 자랑이다.
조선료리의 첫째가는 우월성은 사람들의 건강과 장수를 위하여 착상하고 발전시킨 건강약식료리가 많은것이다.
우리 나라 료리를 만민의 념원을 푸는 《건강약식료리》라고 평하는 리유는 조선료리의 시발점이 사람들의 건강과 장수의 념원으로부터 착상되고 발전하여 왔기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식생활을 건강장수와 결부하여 발전시켜왔다.
우리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약식동원》리론을 내놓고 그에 준하여 료리를 발전시켜왔다.
우리 나라의 이름있는 의학자 허준은 《동의보감》(1611년)에서 수천년동안 우리 민족의 식생활분야에서 축적하여 내놓은것을 체계화하여 《약식동원》이라는 말로 정식화하였다.
이 말은 약과 식사는 같은 근원을 가진다는 뜻으로서 약이자 식사이고 식사이자 약이라는 내용을 담고있다.
허준은 우리 나라의 산야에서 자라는 식물과 동물자원 365종을 골라서 상약, 중약, 하약으로 정했다.
상약으로 120종을 정했는데 여기에는 쌀, 조, 보리, 밀, 참깨, 대추, 생강 등 일상적으로 먹고있는 식료품이 속하며 중약으로 120종을 정했는데 그가운데는 독이 있는것도 있고 없는것도 있으나 오래동안 먹어 병을 예방하고 만성질환치료에 쓰는것들이 속하며 하약으로 125종을 정했는데 독이 있으나 급성질환에 약으로 쓰며 오래동안 복용할수 없는것들이 속하였다.
식생활에 대한 이러한 리론으로부터 우리 민족료리에는 《약》이라는 이름이 붙은 음식들이 적지 않은데 약밥, 약과, 약죽, 약산적, 약밤, 약주 등을 꼽을수 있다.
조선료리를 건강약식료리라고 하는것은 우선 양념을 쓰는 목적이 뚜렷한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우리 나라 료리에서는 양념이란 말로 쓰이는데 그것은 단순히 맛을 조화시킨다는 뜻만이 아니라 그량을 조금씩 먹어서 약효력을 매 음식에서 바라며 조금씩 먹는것이라는 뜻을 담고있다.
양념에 대한 이러한 리해는 현대 료리학과 약리학이 잘 증명하여주고있다.
그것은 파, 마늘, 겨자 등 양념감에는 살균력을 가지는 정유성분들과 중추신경에 작용하는 알칼로이드, 배당체화합물이 많이 들어있기때문이다.
조선료리를 약효성료리라고 하는것은 다음으로 산나물료리가 유명한데서 볼수 있다.
우리 나라의 산나물에서 유명한 두릅, 참나물, 참취, 더덕, 송이, 참나물버섯과 같은것에는 항암제, 거담제, 강심제의 기능을 수행하는 성분들이 많이 들어있다.
조선료리를 건강장수료리라고 하는것은 또한 자양음식이 많은데서 볼수 있다.
조선료리에는 약죽, 곰, 탕 등 자양음식이 많다.
약죽은 약으로 병을 치료하고 죽으로 영양을 보충하는 좋은 자양음식이다.
예로부터 찹쌀죽은 비위를 튼튼하고 영양을 보장하는데 리용하였으며 홍당무우죽은 고혈압병을 예방하며 율무쌀죽은 설사와 각기병, 암을 예방하는데 썼다.
그리고 련꽃잎죽, 록두죽은 더위를 막고 독풀이작용을 하는데 썼고 만성콩팥염에는 단너삼죽, 만성변비증때에는 잣죽과 함께 참깨죽을 써왔다.
조선료리를 보양과 치료에 쓰는데서 기본은 국, 탕, 찜 등으로 적용하였다.
그것은 음식감속에 들어있는 여러가지 약효성분들이 추출물로 뽑아서 먹었을 때 빨리 흡수되고 효과가 빨리 나타나기때문이다.
고려약재를 약탕관에서 달여서 먹은 방법과 같은 원리에서 국, 탕, 곰의 료리법이 발전하였다.
대표적인것으로 인삼닭곰, 자라탕, 뱀장어탕, 황구탕, 룡봉탕, 추복탕, 완자탕, 열구자탕, 골탕 등을 볼수 있다.
건강과 장수에 좋은 료리로 발쪽료리, 참새고기료리도 소개되고있다.
동물의 발쪽에는 원기를 돋구고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효능이 있는 콜라겐단백이 많이 들어있으며 또 돼지발쪽료리는 애기어머니들이 먹으면 젖이 잘 나오게 하는 효능이 있다.
참새고기료리도 보양치료용으로 많이 쓰이였는데 《동의보감》에는 참새고기를 비롯하여 닭고기, 꿩고기, 양고기, 사슴고기, 노루고기, 메추리고기, 돼지고기 등의 효능에 대해서도 널리 소개되여있다.
이처럼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과 민족료리발전에 깃들어있는 《약식동원리론》은 우리 조선료리를 세상사람들이 평하는 건강약식료리로 발전시킬수 있게 한 리론적기초로 되고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조선료리는 오래오래 살며 행복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무병장수료리의 표본으로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쌈싸먹기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부루, 곰취, 배추잎, 콩잎, 깨잎, 호박잎 등 여러가지 잎으로 쌈싸먹기를 좋아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서만 찾아볼수 있는 고유한 식생활풍습이다.
여러가지 쌈가운데서 부루쌈은 고구려시기의 기록들에서부터 보이는 오랜 연원을 가진 남새음식의 하나이다.
붉은 주름이 굵게 잡힌 소담한 잎사귀를 넓게 펼쳐놓고 밥한술 떠놓은 다음 쌈장을 발라 겹겹으로 포개여서 두볼이 불룩하게 우적우적 먹는 부루쌈의 맛은 참으로 말할수없이 좋다.
특히 부루쌈은 덥고 식욕이 떨어지는 여름철에 더위를 막고 입맛을 돋구는데 더없이 좋은 음식으로 알려져왔다.
이런것으로 하여 우리 인민들은 집집의 터밭마다 부루를 심어놓고 한 여름철에 더위를 막는다고 하며 부루쌈을 즐겨먹군 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오랜 세월 변함없이 이어져 오늘 우리의 농촌마을 그 어느 문화주택에 가보아도 푸르싱싱한 자태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부루밭 전경이 펼쳐지고있다.
예로부터 부루는 물을 갈아대면서 씻다가 마지막으로 씻는 물에 기름을 몇방울 떨구어넣고 헹구어내면 맛이 고소하고 연해지며 그렇게 씻어낸 부루에 고추장을 바르고 실파를 한대씩 놓아 싸먹어야 제맛이 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가지 더 전해지고있는 자료는 부루를 뒤집어 싸먹으면 부드러운 면이 입안과 목구멍을 스치게 되기때문에 넘기기 편안하며 또 절대로 체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우리 인민들은 부루쌈을 먹을 때 쌈장에 특별한 관심을 돌렸다.
자료에 의하면 부루쌈에 쓸 쌈장은 잘게 다진 소고기나 물고기살과 함께 파를 약간 넣고 기름에 볶아서 만든다고 하였다.
쌈은 여름에만 싸먹는것이 아니였다.
봄철에는 취와 같은 생나물로 쌈을 싸먹었고 겨울철 특히 대보름날에는 《복쌈》 혹은 《명쌈》이라고 하면서 김으로 쌈을 싸서 먹군 하였다.
대보름날에 복쌈을 먹는것은 그해에 복이 있을것을 바라는 사람들의 념원과 결부되여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온 풍습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콩잎이나 호박잎 같은것을 리용하여서도 쌈을 싸먹었다.
콩잎쌈이나 호박잎쌈을 먹는 풍습은 우리 나라 전지역에 일반화되여있지 않고 일부지방에 국한되여있었다.
백미가 잘 되지 않고 조와 같은 곡식이 낟알생산에서 위주로 되여있던 함경도지방에서 흩어지기 쉬운 조밥 같은것을 그곳 밭작물에서 기본인 콩잎으로 싸서 먹는 콩잎쌈은 이 지방 사람들에게 있어서 낟알에 부족한 단백질이나 비타민을 보충해주는 음식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