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와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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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료리의 걸작품-신선로
신선로는 고급하고 다양한 음식감, 상차림을 돋구는 호화롭고 흥미를 자아내는 그릇, 먹음직스러운 료리의 예술적꾸밈새, 끓는 음식감이 어울려 안겨오는 상쾌하면서도 후더분한 느낌 등으로 하여 조선료리의 걸작품으로 일러온다.
신선로는 우리 인민이 산해진미를 한번에 맛볼수 있게 꾸며놓은 희귀한 음식이다.
신선로를 만드는데는 소고기, 해삼, 왕새우, 떡국대, 밤, 대추, 호두, 잣 등 수십여가지의 음식감들이 쓰인다.
조선료리가운데서는 신선로가 음식감의 가지수에 있어서 단연 첫 자리를 차지한다고 할수 있다.
매 음식감을 1차가공한 다음 다시 종합가공하는 신선로는 그것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음식이 그대로 먹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맛이 좋고 향기로운데다가 차림새 또한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것이 참으로 조선음식의 진미를 맛볼수 있게 하는 료리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신선로를 《열구자탕》 즉 입을 기쁘게 해주는 탕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러왔다.
신선로는 본래 음식을 끓이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그릇이름인데 이것이 점차 그안에 끓인 음식의 이름으로도 되였다.
신선로의 유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연산군이 조선봉건왕조 10대왕으로 있을때 일이다.
당시 시와 문장을 잘 짓는다는 정희량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생활을 하였다.
산속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기묘한 형태의 화로를 만들어 매일 허리에 차고다니면서 여러가지 산짐승을 잡거나 산나물을 채취하여 화로에 넣고 끓여먹으며 살았는데 그의 모습이 마치 신선과 같다고 하여 그가 끓여먹은 음식을 《신선로》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고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깊은 산속에서 사는 정희량을 만나 음식대접을 받았는데 그에게는 정희량의 생활이 《신선의 생활》같이 느껴졌고 더우기 대접받은 음식맛이나 그것을 끓이는 화로의 모양이 매우 신비스럽게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정희량과 만났던 이야기를 여기저기에 퍼뜨리고 산에서 보았던것과 꼭같은 화로를 만들어 음식을 해먹으면서 그것의 이름을 신선이 쓰는 신비한 화로라는 뜻에서 또 신선이 먹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맛좋은 음식이라는 뜻에서《신선로》라고 지었다고 한다.
력사기록들에 의하면 지난날 신선로는 궁중음식의 하나로, 량반귀족들이 먹는 음식의 하나로 되여있었으며 지역적으로는 개성지방사람들이 주로 만들어먹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해마다 여러차례에 걸쳐 진행되군 하던 궁중연회들에는 반드시 신선로가 올랐으며 그 종류도 탕신선로, 면신선로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궁중연회음식의 하나로 되여있던 신선로는 점차 봉건량반들의 가정에 펴져나가 그들의 식탁에도 오르게 되였고 나중에는 비교적 살림이 넉넉한 가정들에서도 간혹 만들어먹었다.
신선로는 정말로 진귀하고 품위있는 음식인것으로 하여 지체높은 량반들도 년중 몇번 먹어보지 못하였다.
먹어보았다고 해야 명절가운데서도 제일 큰 명절로 여겨온 설날이나 환갑과 같은 큰 가정대사때였을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해삼과 왕새우와 같은 질좋은 해산물이 많아 진짜 신선로가 나올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신선로가 그렇듯 유명해지게 된것이다.
신선로는 맛이 좋을뿐아니라 많은 영양소들을 골고루 함유하고있어 건강과 장수에 좋은 음식으로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다.
또한 그릇이 우아하고 특이한 모양새를 가지고있으며 음식감이 아기자기하고 다채로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며 직접 끓이면서 먹기때문에 소화흡수에는 물론 위생문화적으로도 매우 우월한 음식이다.
신선로는 여러 사람들이 같이 또 나누어먹게 만든 음식이므로 신선로를 내는 상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따로따로 떠놓고 먹을수 있게 작은 보시기와 숟가락을 함께 놓았다.
토장국
가정주부들이 집에서 담근 장을 가지고 끓인 토장국은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가장 보편적인 겨울철 일상음식의 하나로 되고있다.
우리 인민들이 토장국을 먹어온 력사는 자료에 보이는 때로부터 계산하여도 1500년이상이나 된다.
겨울철에 소뼈를 고은 국물에 토장을 풀어두고 배추, 콩나물, 무우 등을 넣고 끓인 남새토장국은 향토적인 맛이 짙은 국으로 널리 알려져있었다.
지방에 따라 덜 말린 청어나 멸치를 넣고 끓인 토장국, 쌀씻은 물에다 토장을 두고 기름기가 있는 고기나 남새, 향신료 같은것을 넣고 끓인 토장국도 있었다.
우리 나라 북부지방과 산간지역들에서는 콩가루를 넣어서 토장국을 끓이기도 하였다.
날콩가루를 넣고 토장국을 끓이면 그 맛이 구수할뿐아니라 단백질도 충분히 섭취할수 있었다.
날콩가루를 쓰는것은 닦은 콩가루가 더운 국물에 잘 풀리지 않기때문이다.
김장철에 말려두었던 무우시래기나 감자, 기름기가 있는 고기, 콩나물을 섞어 끓인 토장국은 밥반찬은 물론 술안주로도 널리 리용되였다.
토장국에 콩나물만 넣고 끓인 국도 소박하기는 하지만 인기가 있었다.
토장국은 술로 시달린 속과 흐려진 기분을 풀어주는 해장국(해정국) 으로도 많이 쓰이였다.
조선사람에게는 토장국이 그저그만이다.
아무리 좋은 고기국이라도 몇끼만 련거퍼 먹으면 물리여 못먹지만 토장국은 평생 먹어도 물리지 않는것은 독특한 그 맛이 조선사람의 피와 살에 배여있기때문이다.
조선사람들의 겨울철 반량식-김장김치
재능있고 탐구심이 강한 우리 인민들은 오랜 생활체험과정에 겨울에도 비교적 싱싱한 남새를 먹을수 있는 방법을 창안해냈다.
그것이 바로 김장을 담그는것이였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장담그기와 함께 김장을 년중 가정의 중요하고 큰 일로 여겨왔으며 어느 가정에서나 겨울나이준비로, 가을철에는 장담그기에 분주하였다.
김장을 담그는 시기는 지방과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로는 립동을 기준으로 하였다.
즉 립동이 음력으로 9월에 들면 립동이 지난 뒤에, 10월에 들면 립동전에 김치를 담그었다.
김장김치는 제철에 맞추어 담그어야 제맛이 난다.
그러므로 가정들에서는 김장을 만사를 제쳐놓고 제때에 하였다.
지어 궁중에서까지 김장때에는 한달동안 모든 일을 전페하고 김장담그기로 분주히 지내며 아홉방부녀가 다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좀처럼 바깥출입을 않던 궁중처녀들도 김장때에만은 나온다는데서 생긴 말이다.
이렇게 품을 들여서 김장김치를 해넣으면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다섯달분의 남새를 저장해놓은것과 같기때문에 조선사람들은 김장김치를 겨울철의 절반량식이라고 한다.
우리 인민들은 김장김치를 제때에 맛있게 담그는데 깊은 관심을 돌렸을뿐아니라 그 보관관리에도 정성을 기울여왔다.
김치움은 될수록 해빛이 직접 비치지 않는 곳에 땅을 파서 만들고 그안에 독을 벼짚으로 감싸서 파묻었으며 그우에 나래를 덮어주었다.
그리하여 겨울날의 심한 추위때에도 김치에 바람이 들거나 어는 현상이 없게 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겨울김장을 담글 때 서로 도와주는 아름다운 풍습을 창조하고 그것을 전통적으로 계승하여왔다.
김장철에는 가까이에 사는 이웃들과 친척들이 한데 어울려 배추를 씻고 양념소를 만들며 김치움을 파는데 이르기까지 서로 돕는것을 응당한 일로 여겼고 집에서 담근 김치와 양념을 이웃이나 친척집들에 보내여 맛을 보게 하면서 조언을 받거나 김장을 성과적으로 담근데 대해 서로 축하하고 기뻐하였다.
지난 시기 김장김치에서 대표적인것은 통배추김지, 석박김치, 보쌈김치, 동치미, 깍두기 등이였다.
통배추김치
통배추김치는 어느 지방, 어느 가정에서나 다 담그는것으로서 김장김치를 갖가지로 담그는 경우에도 기본으로 되여있었다.
통배추김치에 쓰이는 양념은 채친 무우에 고추가루, 파, 마늘, 생강 등을 기본으로 하면서 밤, 배, 젓갈, 명태, 가재미 등을 섞어만들었는데 젓갈과 물고기는 자기 지방에서 나는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서해안일대에서는 조기를 봄에 잡아서 절구었다가 김장때에 썼으며 동해안일대에서는 명태를 위주로 하였다.
평안도와 황해도일대에서는 여러가지 젓갈을 썼다.
통배추김치에 해붓는 국물도 지방마다 차이가 있었다.
서북지방에서는 간을 싱겁게 하여 김치국물을 많이 넣었고 중부지방에서는 젓국물을 달여부었다.
일반적으로 고추가루, 파, 마늘, 소금을 적게 넣어 통배추김치의 신선한 맛을 충분히 살렸다.
보쌈김치
보쌈김치란 말그대로 배추잎을 보로 하여 싸서 만든 김치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보쌈김치는 양념감으로 고추, 마늘, 파, 생강과 함께 낙지, 전복, 미나리, 버섯, 배, 밤, 잣, 고기같은 맛좋고 영양가높은 감들을 더 쓰며 양념한 김치가 배추잎에 싸여있어 음식감의 맛과 향기가 그대로 보존되면서 잘 조화되기때문에 다른 김치에서 느낄수 없는 독특한 맛을 낸다.
그래서 보쌈김치는 여러 김치가운데서 으뜸가는 명물로, 고급한 김치의 하나로 일러주었다.
보쌈김치는 개성지방에서 처음으로 담그기 시작하여 이 지방의 특산음식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설명절에 보쌈김치를 먹는 풍습이 계승되고있다.
이것은 개성지방이 일찌기 우리 나라 음식문화발전의 중심지의 하나로 되여있었으며 이 지방 가정주부들의 음식솜씨가 좋았던 사정과 함께 남편을 공대하고 자식을 귀히 여기는 우리 조선녀성들의 아름다운 미풍과 관련된다.
조선봉건왕조시기 개성은 번창한 상업도시였으므로 이곳 남정들은 장사 등의 명목으로 집을 떠나 오래동안 외지에 나가있다가 설명절을 계기로 돌아오군 하였다.
이때 가정주부들은 가정을 위해 수고하는 남정들을 위해 색다른 음식 한가지라도 더 대접하려고 애썼는데 이로부터 설날이면 보쌈김치가 의례히 개성지방사람들의 명절음식상에 오르군 하였다는것이다.
석박김치
석박김치는 기본김장김치가 맛이 들동안 먼저 먹기 위해 만든것으로서 김장을 하기 전에 담그거나 김장이 끝난 다음 남은 감을 가지고 담근다.
석박김치는 어느 지방에서나 다 담그었는데 지방에 따라서 《써레기김치》 또는 《지름김치》라고 불렀으며 여러가지 감을 넣고 만든다는데서부터 《교침채》라고도 하였다.
동치미
동치미라는 말은 《동침(겨울에 담그는 김치)》이라는 말이 전해져오는 과정에 《침》자가 《치미》로 변화되여 생긴것이다.
동치미는 고려 이전시기부터 만들어먹었는데 당시에는 고추가 재배되지 않았기때문에 무우를 소금물에 잠그어 절이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와서 통고추, 통마늘, 생강 등 여러가지 양념감들이 동치미 만드는데 리용되여 그 맛이 한층 돋구어지게 되였다.
17세기이후 동치미는 지방에 따라 그 가공방법이 다양해지고 가지수도 많아졌다.
평양지방에서는 동치미를 마늘, 파, 생강, 배, 밤, 젓갈 등의 양념을 넣어 만들었는데 그 국물이 시원하고 쩡하며 감칠맛이 있었다.
평양랭면이 그처럼 소문나게 된것도 동치미 물에 말아먹었기때문이라고 한다.
총각김치
평양이북지역은 추위가 일찍 시작되므로 무우를 비롯한 김장남새가 잘 자라지 못하는 지역적특성이 있다.
그래서 옛날에 북쪽지방사람들은 채 자라지 못한 무우를 수확하여 김치를 담가 먹게 되였는데 이것이 바로 총각김치의 시원으로 된다.
총각김치는 장가들지 않은 남자아이나 어른들을 총각이라고 하는것처럼 채 자라지 못한 어린 무우로 담근 김치라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였다.
총각김치는 동치미와 함께 김치의 원종이라고 할만큼 그 력사가 오랜 김치이다.
옛날에 만들던 총각김치는 동치미와 비슷하게 소금물을 부어 담그었는데 삼삼하게 담근 총각김치는 익는 동안에 산뜻하면서도 시원하고 찡한 맛을 내였다.
그 국물로 국수를 말아먹으면 답답하던 가슴이 후련해지고 머리가 상쾌해지므로 현재와 같이 맛내기, 겨자 등 다른 양념감을 넣지 않아도 맛이 아주 좋았다.
총각김치도 기본은 추운 겨울에 저장해놓고 이른 봄날까지 먹는 김장김치이다.
갓김치
갓김치는 함경도지방의 산간지대사람들이 주로 담그어먹는 김치이다.
지난시기 이 지방에서는 잘 안되는 배추나 무우보다 추운 산지대에서도 잘 자라는 갓으로 김장김치를 담그어 리용하여왔다.
갓김치에 대한 자료는 여러 고전들에 보이는데 1611년에 출판된 《도문대작》에는 《갓김치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회양, 명강 등에 있는데 맛은 맵고 상쾌하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갓김치는 17세기이전부터 만들어먹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특이한 향기가 나는 갓으로 짭짤하게 담근 갓김치는 알싸한 향기와 독특한 맛으로 하여 입맛을 부쩍 돋구어준다.
산간지대들에서는 갓김치의 고유한 맛을 보존하며 오래 두고 먹기 위해 산골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김치독을 묻어놓고 한여름까지 먹군 하였다.
함경도지방에서는 언감자국수나 귀밀국수를 갓김치국물에 말아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렇게 만 국수는 그 맛이 하도 좋아 셋이 모여 먹다가 그가운데 한사람이 갑산으로 가도 모른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함경도지방에서 특별히 일러준것은 갓김치의 일종인 영채김치이다.
산갓의 잎을 따서 담근 영채김치는 색이 누르스름하고 매우며 상쾌한 맛을 내는것이 특징이였다.
옛날 함경도사람들은 이 김치를 귀한 손님이 오면 밥반찬으로 내놓군 하였다.
영채김치는 영갈채김치, 산갓김치라고도 불리웠다.
백김치
백김치는 고추를 전혀 넣지 않거나 적게 넣고 담그므로 허옇게 보이는데서 붙은 김치이름이다.
백김치는 다른 김치보다 연하게 간을 맞춘 국물을 많이 넣고 담근다.
백김치는 우리 나라에서 고추가 재배되기 전부터 담그어먹은 김치로서 다른 김치들의 조상이라고 할수 있다.
이 김치는 여느 김치와는 달리 사발이나 대접과 같은 큰 그릇에 국물을 많이 담아서 먹는다.
백김치는 국수나 밥을 말아먹기에도 좋았다.
독특한 고기구이
우리 인민의 겨울철특식에서 이채를 띠는것중의 하나는 고기구이이다.
조선사람들은 예로부터 고기구이가운데서도 소고기구이를 가장 고급한것으로 쳤다.
우리 나라에서 소를 집짐승으로 기르기 시작한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7천년전부터이다.
고조선과 부여에서는 말, 돼지, 양, 개 등과 함께 소를 많이 길러 식생활에 리용하였다고 한다.
세나라시기에 와서도 소는 중요한 고기원천으로 되여있었으며 이로부터 소고기음식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었다.
고려시기와 그 이후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소고기는 중요한 음식감으로 리용되여왔다.
1508년 봉건정부에 올린 건의서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평안도에서는 소를 잡아 손님을 접대하는것이 하나의 관습처럼 되여버렸다. 례하면 의주와 같은 곳에서는 손님이 왕래하면 소를 잡는것을 닭을 잡는것처럼 하였다.》
이것을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소를 많이 길렀을뿐아니라 소고기음식을 발전시켜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소를 주요한 부림집짐승으로 자지의 살붙이처럼 애지중지 키우며 관리해온 우리 인민들이 닭 잡듯이 소를 잡아 식용으로 했다는것이 잘 믿어지지는 않지만 어쨌든 우리 나라의 옛 료리책들에는 설렁탕, 족편, 약산적, 소고기구이를 비롯한 소고기음식들이 적지 않게 올라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다 맛이 절묘한 고급음식으로 평가되여있다.
소고기구이는 벌써 고구려때에 《맥적》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었는데 《맥적》에서 《맥》은 고구려의 기본주민집단을, 《적》은 구이를 가리켰으므로 맥적은 고구려의 소고기구이를 의미하였다.
맥적은 그후 고려시기에 이르러 《설야멱적》이라는 이름으로 계승되였다.
설야멱적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지방의 명물이였으며 고려시기에 그 가공법이 이웃나라에까지 알려져 그 나라 궁중에서까지 소문이 자자하던 유명한 음식이였다.
이 음식은 처음에 《설야멱》이라고 불리웠는데 이에 대하여 《송남잡지》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있다.
《옛날 어느 임금이 눈오는 밤에 급한 정사를 론하기 위해 한 신하를 찾아가니 마침 그는 숯불화로와 물그릇을 놓고 고기를 굽고있었다. 그후 이 음식이 보급되면서 눈오는 밤에 찾아가 맛본 음식이라는 뜻에서 <설야멱(눈 설, 방 야, 찾을 멱)>이라고 하였다.》
후세에 와서 설야멱은 구이라는 의미에서 《적》자가 덧붙어 《설야멱적》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설야멱적은 명실공히 고구려의 맥적에서 기원된 조선고유의 전통음식으로서 오랜 력사적기간 우리 인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해내려왔다.
소고기구이는 특히 설명절의 절식이였다.
꿩구이와 참새구이도 소고기구이에 못지않게 겨울철에 즐겨 만들어먹은 맛있는 특별음식이였다.
정월대보름의 절식-오곡밥
정월대보름은 설을 쇠고 처음으로 맞는 보름날을 명절로 이르는 말이다. 옛날에는 이날을 《상원》이라고 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세나라시기부터 정월대보름을 명절로 쇠여왔는데 고려때에는 국가적으로 정한 9개 명절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정월대보름은 보통 그 전날 즉 1월 14일부터 쇠였다.
그래서 14일을 《작은보름》, 15일을 《대(큰)보름》이라고 하였다.
대보름날 우리 인민들은 대체로 설날에 준비하였던 음식을 이날까지 깨끗이 저장하였다가 먹기도 하였지만 또 이날에는 이날대로 여러가지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먹군 하였다.
그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오곡밥이다.
오곡밥은 다섯가지 알곡으로 지은 밥으로서 《오곡잡밥》이라고도 불리워왔다.
우리 나라에서 오곡의 재배력사는 매우 오래다.
고대의 남경유적에서 벼, 조, 수수, 기장, 콩 등 오곡이 나왔고 세나라시기의 기록들에는 오곡이 잘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오곡에 포함시키는 낟알은 시기마다 지방마다 달랐다.
옛 문헌자료들을 보면 《림원십륙지》에서는 벼, 조, 수수, 기장, 팥을 오곡으로 꼽았고 《규합총서》에서는 찰벼, 조, 수수, 콩, 팥을 《세종실록》에서는 벼, 콩, 기장, 보리, 피를 들고있다. .
그러니 오곡이란 꼭 찍어 어느 곡식인것이 아니라 해당 시기에 그 고장에서 가장 많이 나는 임의의 낟알 다섯가지를 념두에 둔 개념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오곡의 재배력사가 오랜것만큼 우리 인민들이 오곡밥을 지어먹는 풍습도 그만큼 오래전에 생겼다.
《동국세시기》에는 《정월대보름에 오곡밥을 지어먹는데 옛날부터 전해오는 풍속이다.》는 기록이 있다.
정월대보름에 오곡밥을 지어먹은것은 사람들이 애써 지은 곡식을 명절을 계기로 골고루 맛보려 하고 또 오곡이 사람의 몸에 좋은데로부터 생겨난 풍습이다.
이 풍습에는 새해에는 오곡이 잘되여 풍년이 들며 오복이 있기를 바라는 인민들의 소박한 념원이 깃들어있다.
옛날부터 오곡밥을 먹을 때에는 꼭 나물음식을 곁들이는것을 풍습으로 전해왔다.
오곡밥은 오늘 명절뿐아니라 여느때에도 즐겨 지어먹는 음식으로 되고있다.
천하절미-약밥
약밥은 대보름날에 별식으로 해먹는 영양가 높은 고급한 음식이다.
이름그대로 약밥은 찹쌀과 꿀, 밤, 대추 등 약재로 쓰이는 음식감들로 만들기때문에 사람들의 건강과 원기회복에서 큰 효과를 나타낸다.
약밥의 어원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먹는것이 약이라는데서 이를테면 약주, 약과, 약수 등과 같이 밥중에 약과 가장 접근된 음식이라 하여 약밥이라고 했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꿀이 들어간 음식에 흔히 《약》 자를 붙인데서부터 왔다는것이다.
옛 문헌들에는 약밥이 세나라시기와 조선봉건왕조시기에는 정월대보름날에, 고려시기에는 정월의 첫 사일에 먹는 음식으로 기록되여있다.
그러니 약밥을 정월명절음식으로 먹어온 관습은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고 볼수 있다.
약밥은 대보름날의 명절음식으로 되여있었을뿐아니라 대사상에도 빠지지 않고 오르는 대사음식, 귀한 손님이 오면 대접하는 특식이기도 하였다.
《목은집》에는 약밥에 대해 갖풀같은 찰밥을 한덩어리로 뭉치게 하여 산꿀을 고루게 버무리니 빛갈이 곱고 게다가 다시 대추와 밤, 잣을 섞으니 이발과 혀사이에서 달콤한 맛이 난다고 씌여있다.
약밥은 특이한 맛과 향기로 하여 옛 기록에 향밥(향기로운 밥), 잡과반(여러가지 과일을 섞은 밥) 등 각이한 이름으로 올라있다.
이웃나라들에서는 우리 나라의 약밥을 《고려반》이라고 하면서 진귀한 밥으로 높이 찬양하였다고 한다.
명절분위기를 돋구는 찰떡과 백미떡
겨울철에는 우리 인민들이 예로부터 년중 가장 큰 명절로 쇠여온 설명절이 있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사람들은 해마다 설을 맞으면 강가에 모여서 편을 갈라 돌팔매놀이와 눈끼얹기 등과 같은 명절놀이를 하면서 즐겼다고 한다.
이것은 상무적기풍이 강한 고구려사람들이 활기있는 여러가지 놀이를 하면서 설을 즐겁게 쇠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설은 백제에서도 쇠였다.
정월초하루날이 되면 왕이 조원전에 나와 앉아 백관들의 새해 축하인사를 받았으며 민간에서도 서로 축하하고 여러가지 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즐기였다.
한편 백제에서 261년에 설맞이행사를 하였으며 왕이 정월초하루날에 옷을 단정히 입고 정사를 처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자료들은 세나라시기에 벌써 설명절을 쇠는 풍습이 일반화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데 실상 설명절은 고대시기에 그 연원을 두고 수천년을 내려오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명절이다.
현대에 와서 쇠고있는 양력설은 우리 나라에 양력력서가 도입되기 시작한 1896년(구체적으로 1896년 1월 1일, 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부터 생겨난 명절이다.
설명절때가 되면 우리 인민들은 명절 썩 전날부터 집안팎을 깨끗이 거두고 명절기분으로 흥성거렸다.
설날아침에는 집집마다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웃어른들에게 먼저 드리고 온 식구가 한자리에 둘러앉아 나누어 먹었으며 세배군들에게도 대접하군 하였다.
여느 명절들과 마찬가지로 설날에도 명절음식으로서 첫번째로 꼽은것은 찰떡, 절편을 비롯한 갖가지 떡들이였다.
설날아침에 팔소매를 걷어올리고 떡메를 번쩍 들어 기운차게 휘두르며 떡을 치는 남정들과 깨끗한 앞치마를 두르고 일손을 거들어주는 녀인들의 모습은 참으로 설명절의 이채로운 풍치이기도 하였다.
찰기가 나게 잘 친 찰떡은 팥, 참깨, 대추, 밤, 잣, 당콩 등으로 만든 고물을 묻혀 일정한 크기로 잘라 접시에 소복하게 담았다.
고대시기부터 만들어먹은 찰떡은 위병에 좋고 몸보신에 효과가 매우 좋은 음식으로 일러왔다.
찰떡은 찰기가 있어 잘 굳어지지 않기때문에 며칠 두었다가도 구워서 꿀을 발라먹으면 그 맛이 참으로 절묘하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연백(연안, 배천)지방의 찰떡을 제일로 일러주었다.
이 지방의 찰떡은 콩보숭이를 묻히는것으로 해서 팥고물을 위주로 하는 다른 지방의 찰떡과 달랐다.
이 지방에서는 잔치상에 꼭 찰떡을 올려놓았으며 사돈집에 보낼 때에는 《안반(떡을 칠 때에 쓰는 두껍고 넓은 나무판)만 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찰떡을 크게 잘라서 고리짝에 담기도 하였다.
찰떡은 어디까지나 《찰떡》이라는 고유한 우리 말로 부를 때만이 졸깃졸깃한 그 독특한 맛이 잘 안겨오는 우리 민족고유의 음식이다.
설날에는 설기도 즐겨 만들어먹었다. 설날에 해먹은 설기가운데서 가장 이름난것은 개성의 소머리떡이였다.
소머리떡이란 떡을 식혀서 썬 모양이 마치 소대가리편육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말이다.
소머리떡은 썰었을 때 겉모양이 독특하고 희한할뿐아니라 맛 또한 일품이였다.
개성지방에서는 이 떡을 자그마한 시루에 쪄가지고 시루채로 사돈집에 설음식으로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우리 나라 여러 지방들에서는 설날에 절편, 가래떡, 골무떡, 꼬리떡과 같은 백미떡들도 즐겨 해먹었다.
절편은 떡살을 박아서 끊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방에 따라 절떡, 달떡, 룡떡, 색떡으로도 불리웠다.
그리고 가래떡은 백미떡을 늘구어 길다랗게 만든것이고 골무떡은 골무만큼씩 짧게 떡을 끊은것이며 꼬리떡은 량귀를 꼬리처럼 뾰족하게 만든것이다.
절편과 꼬리떡은 색소를 넣어 빨갛고 파랗게 물들여서 큰상에 웃기떡으로도 썼으며 가래떡은 떡국이나 떡볶음감으로도 리용되였다.
동지날의 동지죽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동지날을 한해가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에서 《아세》 또는 《작은 설》이라고 하며 하나의 큰 명절로 쇠여왔다.
우리 조상들이 동지를 한해의 시작날로 본것은 동지 다음날부터 점차 해가 길어지기때문이였다.
우리 나라에서 동지를 명절로 쇤 력사는 매우 오래다.
세나라시기에 벌써 동지를 력서계산에 포함시켰다고 하며 《고려사》에는 동지가 고려의 9개 명절중의 하나로 기록되여있다.
지난 시기 민간에서는 동지가 음력으로 11월 상순에 들면 《애동지》, 상순을 지나서 들면 《로동지》라고 하면서 애동지가 드는 해는 겨울이 춥고 로동지가 드는 해는 춥지 않다고 하였다.
또한 동지달에 눈이 많이 오면 다음해 5월에는 비가 내려 모내기에 좋고 풍작을 이루게 되며 동지달에 눈이 내리지 않고 찬바람이 많이 불면 다음해 5월의 기후가 나빠지고 흉작이 든다고 하면서 동지를 5월과 련결시켜 《5동지》라고도 하였다.
궁중에서는 동지를 년중 가장 중요한 명절로 여긴데로부터 동지날에 특별히 연회를 차리군 하였다.
동지죽은 오랜 세월 우리 인민들의 동지특식으로 되여왔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동지라고 하면 의례히 동지죽을 생각하며 또 꼭 쑤어먹고있다.
동지팥죽의 유래에 대해서는 한해가 시작되는 날로, 큰 명절로 여긴 동지날을 계기로 그해에 지어놓은 햇곡식가운데서 붉은 팥을 맛보려고 팥죽을 쑤어먹은것이 풍습으로 굳어졌다고 볼수 있다.
고려말기의 시인 리색(1328~1396)은 동지팥죽에 대하여 《동지엔 고을풍속 / 팥죽을 되게 끓여 / 차름차름 담으면 / 빛갈도 고울시고 / 꿀을 타서 후룩후룩 / 마셔나보오》라는 시를 남기였다.
동지팥죽은 여느 팥죽과는 달리 찹쌀가루로 새알만 하게 동그랗게 빚은 오그랑이(알심 또는 새알심이라고도 함)를 두고 쑤었다.
동지죽을 쑬 때에는 다른것들보다 류달리 큰 오그랑이를 몇알 만들어넣군 하였는데 큰 오그랑이가 차례지는 아이에게는 복이 차례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어머니들은 팥죽을 그릇에 담을 때 큰 오그랑이가 아이들에게 고루 차례지도록 하는데 관심을 돌렸다.
대부분의 지방들에서는 더운 팥죽을 훌훌 불면서 먹기를 좋아하였지만 강원도에서는 팥죽을 그릇에 담아 살얼음이 질 정도로 차지도록 장독대에 올려놓았다가 뜨뜻한 온돌방에서 밤참으로 먹기도 하였다.
평양지방에서는 예로부터 동지죽을 동지날 해가 떠오르기 전에 쑤어먹는 풍습이 있었다.
동지죽은 좋은 음식이라 하여 이웃집에서 서로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우수한 발명식품 《콩나물》
선조들은 일찍부터 콩으로 콩밥, 콩국, 콩떡, 콩강정, 콩자반, 콩잎절임 등 여러가지 콩음식을 만들어먹었다.
그리고 단백질의 염석원리를 리용하여 두부를 만들고 콩을 발효시켜 장을 담가먹었으며 콩을 발아시켜 콩나물을 길러 남새부식물로 리용하였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서 콩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해왔는가 하는것은 18세기의 실학자 리익의 《대두론》에도 그 일단이 반영되여있다.
그는 만약 우리 나라에 콩이 나지 않았다면 그 잦았던 흉년과 기근, 외래침략에서 살아남을수 없었을것이라고 하면서 민족과 나라가 유지된 저력으로서 《대두국력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콩나물은 남새를 소금에 절여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던 그 시기에 모래무지에서 자라나는 콩싹에서 창안하여 유래된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콩나물은 주로 겨울철에 남새대신 집집마다 길러 먹었다.
추운 겨울에 남새를 해결한다는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러나 우리 인민들은 콩을 발아시켜 콩나물을 길러서 남새로 리용함으로써 한겨울에도 《겨울남새》를 생산하여 비타민C를 해결하였던것이다.
콩나물의 조성은 마른 콩과는 전혀 다르다.
특히 많은 비타민C가 새로 생기고 비타민B1, B2의 량도 증가한다.
콩나물 100g만 먹어도 하루 필요량의 1/3을 섭취할수 있다고 한다.
콩나물은 숙취(술에 푹 취하여 취기가 오래 가는것)를 푸는데 특효가 있다고 전해지고있다.
옛날부터 콩나물은 해장에 좋다고 하여 국으로 많이 끓여먹었다.
오늘에 와서 확증한데 의하면 콩나물속에 알콜을 분해하는 성분이 충분히 들어있는데 특히 콩나물뿌리에 제일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해장국감으로 콩나물을 쓴 우리 선조들의 슬기도 놀랍지만 해장국을 끓일 때 콩나물뿌리를 다듬지 말아야 한다고 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 또한 감탄을 자아낸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지금 우리의 김치, 두부가 세계적인 음식으로 되여가고있듯이 오래지 않아 콩나물도 그만한 지위에 올라 빛을 뿌릴날도 올것이다.
독특한 민족음료 숭늉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속에서는 식사 뒤끝에 숭늉을 즐겨 마시는 풍습이 전해져온다.
숭늉에 대한 력사기록이 16~17세기경부터 보이고 19세기초의 책인 《림원십륙지》에 숭늉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여있지만 밥이 주식이고 차나 소젖대신 맑은 물이 풍부한 우리 나라에서는 숭늉이 고대나 세나라시기에도 일상음료로 적용되였다고 볼수 있다.
숭늉은 우리 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음료이다.
숭늉은 그 맛이 독특하고 영양가가 높은 음료이다.
우리 인민은 밥을 거의 다 먹고 몇숟가락정도 남았을 때 그것을 따끈한 숭늉에 말아 마른 반찬이나 짭짤한 절임, 젓갈 등으로 식사를 끝내는것을 좋아하였다.
숭늉은 집에서 밥을 지어 먹을때마다 만들수 있는 매우 편리한 음료이다.
쌀이 익을 때 불을 물리고 뜸을 들인 다음 다시 불을 때면 솥밑바닥에 수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밑바닥의 온도가 2백수십℃로 오르고 그에 붙은 낟알이 누룽지로 되면서 아미노카르보닐화합물이 생긴다.
이 누룽지에 물을 붓고 다시 끓이면 맛좋은 숭늉이 된다.
지난날 가정들에서는 숭늉대접을 하나의 식사범절로 지켜왔다.
며느리가 시부모나 웃사람들의 식사시중을 들 때 또는 제사때에는 반드시 숭늉을 대접하거나 놓았으며 이것은 하나의 풍습으로 되여왔다.
봉건관료들의 가정에서도 밥상을 차리는데서 상은 하인이 차려도 숭늉만은 반드시 안해가 아니면 며느리가 시중들었다.
궁중에서 왕이나 왕비를 위한 수라상(밥상)을 차릴 때에도 꼭 숭늉을 대접하는 절차가 있었다.
시중드는 궁녀가 왕의 식사가 끝날무렵에 국그릇을 놓았던 자리에 숭늉그릇을 놓으면 밥을 한술 말아서 개운하게 먹고 수저를 제자리에 놓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식사를 끝낼 때에는 숭늉에 밥을 말아먹어야 딸이 잘 산다는 말이 전해져오고있다.
그리고 숭늉에 밥을 말아먹으면 식기나 수저가 물에 젖어있는것처럼 생활이 메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멀리 시집간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들의 심정을 담아 생겨난 말이며 다른 측면으로는 밥을 다 먹게 함으로써 랑비를 없애려는 뜻도 담고있다.
숭늉마시는 풍습이 우리 인민의 생활속에 오래동안 계승되여 왔으므로 오늘도 그와 결부된 교훈적인 속담들이 많이 전해지고있다.
《급하기는 우물에 가 숭늉 달라겠다.》, 《보리밭에 가 숭늉 찾겠다.》,《숭늉에 물탄 맛이다.》등은 그러한 실례로 된다.
숭늉은 영양위생적으로 유익하고 우리 인민의 창조적슬기와 담담한 성격이 반영되여있는 전통적인 음료로서 오늘도 계승되고있다.
21세기의 인기상품으로 당선된 두부
우리 선조들이 창조하고 오늘도 우리 인민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두부는 현재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는 인기있는 장수식료품으로 알려지고있다.
최근 어느 한 국제여론조사기구가 《21세기 사람들에게 제일 인기를 끌 상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여론조사를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응답자의 대다수가 두부에 대하여 지정하였다.
정보산업의 시대인 21세기에 주요상품들인 콤퓨터, 휴대용전화기같은 각종 전자제품과 미술작품, 오락기구들을 밀어내고 두부가 단연 첫 자리에 오른 리유는 무엇인가.
새 세기를 맞이하여 건강과 장수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는 더 높고 강렬해지고있다.
콩은 사람들의 건강과 장수를 보장하는데서 가장 리상적인 알곡으로서 《밭의 고기》라고 불리우고있다.
이 세상 력대 장수자들치고 콩음식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먹기도 좋고 소화도 잘되며 인체에 필요한 영양성분들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있는것으로 하여 사람들은 두부를 리상적인 《장수식품》으로 간주하고있다.
이런 리유로 하여 두부가 21세기 제일 수요가 높은 상품으로까지 된것이다.
21세기에 와서야 세상사람들이 비로소 인정하고 저마다 찾는 두부를 우리 선조들은 이미 1500년전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먹었다.
두부를 언제부터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우리 나라가 콩의 발원지이고 콩으로 만든 식료가공품이 발전한것으로 보아 대단히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다고 볼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두부가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난것은 고려시기의 《목은집》에서였다 .
고려의 유명한 시인 리규보는 두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였다.
나물국 오래동안 먹어 맛을 못느껴
두부가 새로운 맛을 돋구어주네
이 없는 사람 먹기 좋고
늙은 몸보신에 더없이 좋네
이 시는 당시 두부가 널리 파급된 대중음식이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고려시기를 이어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와서 두부 만드는 기술이 상당히 발전하여 이웃나라에까지 보급되였다.
우리 나라 두부에는 새끼로 싸서 들고 다녀도 형체가 이지러 지지 않고 단단한 막두부, 처녀의 고운 손 아니고는 문드러진다는 연두부, 굳어지기 전에 건져낸 순두부, 베에 싸서 굳힌 베두부, 명주로 굳힌 명주두부 등 여러가지 종류가 있었다.
두부는 단백질이 많은 음식으로서 고기나 물고기에 못지 않게 영양가가 높다.
특히 하들하들하게 엉긴 순두부를 더운 김에 양념을 잘하여 먹으면 맛이 있을뿐아니라 몸에 좋기때문에 예로부터 즐겨먹는 민족음식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있다.
1611년의 《도문대작》과 1815년의 《규합총서》에 두부만드는 법과 두부의 명산지가 소개되여있다.
《규합총서》에 《여문 콩을 해빛에 말리고 돌절구에 봏아서 찬물에 담그고 다시한번 돌절구에서 보드랍게 봏는다.
가마에 물을 끓이고 돌절구에서 봏은 콩을 여기에 넣는다.
이것을 면천자루에 넣고 질그릇의 평평한 그릇우에 눌러 넣으면서 짜낸다.
짜면서 거기에 끓는 물을 두고 눌러서 충분히 짠다.
가루부분이 전부 짜지면 다시 한번 가마에 두고 불을 세게 때서 끓인다.
밥주걱으로 잘 휘저으면서 질그릇에 퍼넣는다.
한번 쉬였다가 서슬을 조금씩 넣어서 굳힌다.
굳혀서 부드럽게 된것을 적당히 절단한다.
서슬을 지나치게 많이 넣으면 쉰 냄새가 난다.》라고 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두부를 음식감로 하여 국, 전, 튀기, 구이, 탕, 지지개, 볶음, 완자 등 수많은 료리를 만들었다.
두부는 단백질의 질이 좋으며 단백질영양원천음식감들이 가지고있는 일반적특성인 콜레스테롤, 푸린화합물, 포화기름산 등이 적게 들어있고 100g당 열량이 낮으므로 고혈압, 동맥경화증, 비만증치료에 아주 좋다.
세상에 이름난 민족음식 국수
국수는 여러가지 가루를 리용하여 사리를 만들고 여기에 국수물, 꾸미와 고명감을 넣어 만든 음식이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우리 나라의 국수는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과 밀접히 결부되여있는 훌륭한 민족음식중의 하나이다.
고려시기에 쓴 책인 《룡비어천가》에 고려사람들이 손님들을 대접할 때 국수를 많이 썼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국수가 고려시기는 물론 그 이전시기부터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 널리 리용되여왔으며 그 가공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른 음식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무더운 여름철이면 얇게 썬 시원한 배와 오이, 삶은 꿩고기, 닭알전을 꾸미로 놓고 얼음을 박은 국수를 으뜸가는 음식으로 여겼으며 추운 겨울에는 따끈한 고기국물에 말고 양념과 고기를 놓은 국수를 즐겨먹었다.
특히 생일날, 잔치날을 비롯한 대사때에는 국수를 장수의 상징으로, 없어서는 안될 별식으로 여겼으며 민속명절날에도 여러가지 국수를 만들어먹었다.
우리 나라에는 음력 정월 작은 보름(14일)날 점심이면 긴 국수오리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국수를 만들어먹는 풍습이 있었다.
국수는 리용하는 가루종류에 따라 메밀국수, 감자농마국수, 강냉이국수, 밀국수 등으로 나누며 마는 방법에 따라 찬국수, 더운국수, 쟁반국수, 비빔국수, 칼국수, 회국수 등으로 나눈다.
소비적특성에 따라서는 물국수, 마른국수, 즉석국수, 분탕 등 여러가지가 있다.
예로부터 랭면이나 쟁반국수는 평양지방의 유명한 음식이다.
특히 평양랭면은 국수사리를 향기롭고 구수하며 촉감이 부드러운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들고 국수물로는 동치미국물과 영양가 높은 소고기국물을 리용하는데로부터 우리 나라의 국수중에서도 제일 맛좋은 국수로 널리 알려져있다.
감자농마국수는 소고기국물을 국수물로 쓰는 함흥농마국수가 유명하다.
감자를 많이 심는 지방들인 혜산, 삼수, 갑산일대에서 만들어먹는 감자농마국수는 고소하고 달큰한 콩깨국을 국수물로 하는것이 특징이다.
강냉이국수나 올챙이국수는 강냉이산지로 유명한 창성, 삭주, 태천, 벽동, 녕변, 자성, 의주지방에서 많이 만들어먹고있다.
강계, 만포지방에서는 느릅나무뿌리가루를 섞어만든 질기고 매끈매끈한 강냉이가루국수를 많이 만들어먹고있다.
이외에도 우리 인민들은 공통된 민족적기호에 기초하여 서로 다른 지방적특성을 반영한 여러가지 국수를 특색있게 만들어먹고있다.
국수는 우리 인민의 민족적슬기와 창조적지혜의 산물로서 오랜 력사적과정을 통하여 계승발전되여온 우수한 민족음식이다.
무엇보다도 국수는 그 어느 음식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독특한 맛을 가지고있어 사람들의 식욕을 돋구어준다.
국수의 기본음식감인 국수사리의 맛은 국수의 독특한 맛을 살리는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메밀가루나 밀가루, 강냉이가루 등을 리용하여 만든 국수사리는 구수한 맛을 내는것이 특징이다.
특히 향기롭고 구수하며 촉감이 부드러운 메밀가루를 리용하여 만든 국수사리는 독특한 향기와 구수한 입맛을 낸다.
감자, 록두, 강냉이농마를 리용하여 만든 국수사리는 희고 가늘며 매끈매끈하여 눈맛을 살려주는 동시에 질긴것이 특징이다.
메밀가루나 밀가루, 강냉이가루에 감자, 록두, 강냉이농마를 알맞춤하게 섞어만든 국수사리는 매끈매끈하고 구수한 맛과 질긴 맛이 잘 어울린 독특한 맛을 낸다.
국수물은 시원하고 산뜻하며 감칠맛이 있어 국수의 독특한 맛을 살려준다.
국수물로서는 예로부터 김치국물과 고기국물이 유명하다.
김치국물중에서도 동치미국물은 대단히 맑고 쩡한 맛, 향기롭고 산뜻한 맛, 새큼달달한 맛이 있어 예로부터 랭면을 마는 국수물로 널리 알려져있다.
고기국물은 맑고 산뜻할뿐아니라 단맛과 구수한 맛이 한데 어울려 감칠맛을 내는것이 특징이다.
국수꾸미나 양념도 국수의 맛을 독특하게 살려준다.
고기, 물고기, 남새, 과일 등으로 만든 꾸미의 맛은 국수오리의 맛, 국수물의 맛과 조화를 이루면서 국수맛을 돋구어주며 양념장과 곁들이는 겨자나 식초 등 여러가지 양념감들은 국수의 입맛과 향기를 살려준다.
이처럼 국수는 그 어느 음식에도 비길수 없는 독특한 맛을 가지고있다.
아시아나라들과 일부 유럽나라들에도 국수와 비슷한 음식들이 많지만 우리 나라의 국수와 같이 독특한 맛을 가지고있는 음식은 찾아볼수 없다.
다음으로 국수는 영양가가 높고 소화흡수가 잘된다.
국수는 국수사리와 국수물, 꾸미에 당질, 단백질, 기름질, 무기질, 비타민의 5대영양소가 충분히 들어있으므로 영양가가 아주 높다.
국수가루는 당질의 주되는 원천으로서 영양학적가치가 높다.
특히 메밀은 리진과 트립토판을 비롯한 필수아미노산함량이 다른 낟알에 비하여 특별히 높으며 불포화기름산함량이 포화기름산함량에 비하여 4배나 된다.
또한 비타민P의 일종인 루틴이 많이 들어있을뿐아니라 비타민B₁, B₂과 철함량이 높다.
그러므로 메밀국수를 정상적으로 먹으면 뇌혈전, 고혈압병, 동맥경화증과 같은 병들을 예방할수 있으며 방광염, 빈혈증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
국수국물로 리용하는 동치미국물을 비롯한 김치국물은 사람의 몸에 필요한 비타민C와 여러가지 광물질을 공급해주는 훌륭한 원천이다.
소고기국물이나 닭고기국물을 비롯한 고기국물은 함질소 및 무질소에끼스물질과 함께 광물질을 많이 포함하고있으므로 소화액분비를 촉진시키는 동시에 강장작용을 한다.
국수꾸미도 여러가지 영양소들을 많이 가지고있으므로 국수의 영양가를 높이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국수는 다른 음식에 비하여 소화흡수도 잘된다.
일반적으로 강냉이를 그대로 먹었을 때 소화흡수률이 30~40%밖에 안되지만 강냉이가루로 국수를 눌러 먹으면 소화흡수률이 86~90%에 이른다.
또한 밀쌀로 밥을 지어먹었을 때 소화흡수률이 75%밖에 되지 않지만 가루내여 국수를 눌러 먹으면 소화흡수률이 95%로 높아진다.
밥이나 떡을 먹었을 때 비하여 국수를 먹었을 때 배고픈감을 먼저 느끼게 되는것이라든가 《국수가 들어가는 배는 따로 있다.》는 말이 생겨난것은 국수가 어떤 음식보다도 소화흡수가 잘 되는 음식이라는것을 보여주는 실례들이라고 말할수 있다.
다음으로 국수는 가공방법이 독특하고 가공공정의 현대화에 유리할뿐아니라 식생활을 간편하고 문명하게 조직할수 있게 하는 훌륭한 음식이다.
가루를 반죽하여 국수분통에 넣고 일정한 압력을 주어 국수오리를 뽑은 다음 1~2분의 짧은 시간안에 끓는 물에 삶아내고 찬물에 식히는 방법은 다른 낟알음식가공에서 찾아볼수 없으며 이러한 가공방법은 오직 우리 나라 국수가공방법밖에 없다.
국수는 음식감준비, 반죽, 누르기, 삶기 및 씻기 등 그 가공공정의 구분이 뚜렷하고 단순한데로부터 매 가공공정마다 현대화를 실현하는데 유리하다.
또한 마른국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가공국수는 모든 가정들에서 품을 적게 들이고도 짧은 시간안에 음식상을 차리는데 아주 유리한 음식으로 된다.
다음으로 국수는 그 어느 음식과도 비길수없이 대중봉사에 편리하다.
국수는 적은 로력으로도 단위시간당 생산능률을 높여 짧은 시간안에 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원만히 보장할수 있는 훌륭한 대중봉사음식이다.
국수는 한그릇에 국수사리와 국수물, 꾸미와 고명이 다 들어가게 만든 음식으로서 그릇리용이 단순하고 상차림이 매우 간단하다.
국수는 끼당 식사시간이 다른 음식들에 비하여 훨씬 짧기때문에 적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보장하는데 유리하다.
이처럼 국수는 맛과 영양가에 있어서나 가공과 봉사에 있어서 그 어느 음식에도 비길수 없이 우월한 민족음식이다.
하기에 우리 인민들은 물론 우리 나라에 찾아오는 수많은 외국손님들도 국수를 즐겨 찾으며 《천하별미》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조선국수 특히 평양랭면의 가공방법을 배워가기 위해 노력하고있다.
대중음식-국밥
국말이, 장국밥 등으로 불리워 온 국밥은 국에다 직접 밥을 만 음식으로서 조선음식의 기본차림인 국과 밥을 동시에 먹을수 있게 하는 음식이다.
국밥은 전쟁터나 일터, 장터, 주막 등지에서 바쁘거나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해야 할 때 기다리지 않고 간편하면서도 뜨겁게 먹을수 있는 장점이 있어 단체음식용으로 발전하였다.
국밥은 콩나물국, 고기국, 토장국, 김치국, 곰탕 등 아무 국으로나 이루어지며 여러가지 음식감들이 골고루 들어있어 영양소도 풍부하고 찬이 별로 필요없다.
때문에 비빔밥과 함께 대중음식으로 널리 리용되여왔다.
옛 료리책에 국밥이 구체적으로 소개된것은 오래지만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는것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발행된 《년대규곤요람》과 《시의방》이다.
《년대규곤요람》에는 장국밥이 국수를 마는 법과 같으나 국수대신 밥을 마는것이며 밥우에 고기를 졸인 장물을 붓는다고 설명하고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