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와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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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수의 대명사-평양랭면
평양랭면은 예로부터 평양사람들이 자랑하는 음식으로서 여러 지방들에서 만든 랭면가운데서 제일로 손꼽히였다.
《동국세시기》에는 《메밀국수를 모두 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넣은것을 랭면이라 하는데 관서(평안도)지방에서는 국수가 제일 좋다.》고 기록되여있으며 《해동죽지》에서도 평양랭면이 제일 좋다고 하였다.
사실 평양랭면은 국수감으로부터 국수국물, 꾸미와 고명, 담는 그릇 등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소홀히 보지 못할 독특한 맛과 꾸밈새를 갖추고있다.
그래서 《랭면》이라는 말그대로 찬 음식이지만 찬것을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겨울철에도 평양랭면만은 사양하지 않고먹었다.
대사때에도 평양랭면은 손님접대용으로 빠져서는 안될 음식으로 간주되여왔다.
오늘 평양랭면은 우리 나라 지경을 벗어 나 세계에 널리 알려져 조선국수의 대명사로 조선민족음식의 대표작의 하나로 세상사람들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있다.
평양랭면은 순메밀로 만들어야 하며 양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양념을 하면 마늘과 파냄새만 나면서 메밀국수의 고유한 맛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먹을 때 식초를 잘 쳐야 한다.
평양랭면은 식초를 고기국물에 치지 말고 국수사리에 쳐서 고기국물에 말아먹어야 제맛을 느낄수 있다.
전통적인 설명절음식-떡국
떡국은 우리 인민들이 정월초하루날 새해 첫 음식으로 끓여먹는 전통적인 명절음식의 하나이다.
떡국은 나이의 표상으로 간주되여왔는데 매해 한그릇씩 떡국을 먹는 수자가 늘어 남에 따라 나이도 한살씩 늘어난다고 하면서 떡국을 일명 《첨세병》이라고 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떡국을 부식물로서의 국으로보다 주로 주식물을 대신하는 음식으로 먹었다.
떡국은 대부분 떡가래를 만든 다음 타원형으로 되게 엇비슷이 썰어 고기국물에 넣고 끓여 만드는데 여러지방의 떡국가운데서 개성지방의 조롱떡국(조랭이떡국)이 유명하였다.
조롱떡국이란 떡의 생김새를 본따서 붙인 이름이다.
개성사람들은 섣달 그믐날이면 온 집안식구가 모여앉아 참대나무칼로 누에고치모양의 조롱떡을 만들어 함지에 가득 담아두었다가 설날아침에 떡국을 끓여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개성지방의 매 가정들에는 식구수에 해당한 참대나무칼이 항상 준비되여있었다.
나무칼은 600여년전 고려왕이 미각이 아주 예민하여 칼로 썬 떡에서 나는 쇠비린내까지 감촉하고 몹시 싫어하면서 떡을 나무칼로 썰도록 하면서부터 리용되였는데 나무칼로 떡을 썰면 모양은 비록 곱지 못해도 맛이 아주 좋다고 한다.
그것이 민간에 퍼져 개성지방에는 나무칼로 떡을 써는 풍습이 생겨나게 되였다.
아기의 백날상에 즐겨오른 백설기
백설기는 떡이 흰눈처럼 하얗다는데로부터 이름 지어진 떡으로 우리 인민들이 백날을 맞는 아기를 축하하는 음식상에 즐겨 올리던 음식이다.
백미로 백설기를 만들어 백날상에 차려놓는데는 백날이 될 때까지 색있는 옷을 입히지 않고 흰색의 천으로만 옷을 지어 입히는것과 마찬가지로 아이가 흰눈같이 깨끗하고 건강하게 자랄것을 바라는 우리 인민들의 소박한 마음이 깃들어있다.
우리 인민들은 백날상에 차려놓았던 음식을 이웃간에 나누어 먹으면 아이의 장래가 좋아진다고 하면서 이웃들과 함께 백설기떡을 나누어 먹으며 화목을 돋구기도 하였다.
전골의 유래
전골은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감들을 골라 전골남비에 두고 끓이면서 익은 차례로 먹는 민족료리의 하나이다.
고전《시의방》에는 전골을 만들어내고 먹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여있다.
원래 전골이라는 말뜻을 그대로 해석하면 뼈를 끓인다는것인데 그것은 이미 만들어먹다 남은 맛있는 음식을 다시 끓인 음식이라는 의미로 리해할수 있다.
전골이 생겨난것은 먼 옛날 고구려때라고 전해지고있다.
어느해 겨울 용맹한 고구려군사들이 외적을 물리치는 간고한 전투를 할 때였다.
아침부터 적들을 추격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먼길을 달린 군사들이 전투를 승리적으로 결속하고 어느 한 골짜기에 이르러 저녁식사준비를 하게 되였다.
그런데 며칠째 후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치렬한 전투를 계속하다보니 군량은 다 떨어지고 먹을것이란 몇몇 군사들에게 인민들이 도중식사로 싸주었던 음식이 얼마간 남아있었을뿐이였다.
그것마저도 차고 굳어져서 그대로 먹을수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끓여먹자고보니 가마와 같은 음식을 만드는 도구들을 전투에서 다 잃어버려 끓일수가 없었다.
군사들은 생각끝에 전투때 쓰는 전립(지금의 철갑모와 같은것)에 음식을 모아 담고 끓이기 시작하였다.
음식이 끓기 시작하면서 나는 구수한 냄새에 배고픔을 참지 못한 군사들은 뜨거운것도 마다하지 않고 음식이 익는 족족 골라 먹었는데 그 맛이 참 별맛이여서 그 후에도 그런 방법으로 음식을 만들어먹었다.
그때로부터 그 음식을 전골이라고 부르게 되였으니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오면서 이름난 민족료리로 발전하게 되였다고 한다.
특색있게 조리한 조선식양고기료리
우리 나라에서 양은 이미 고대시기부터 사육되였지만 8~9세기경까지는 주로 국가적인 제사때 제물로 쓰기 위해 길렀다.
양고기가 식용으로 쓰이기 시작한것은 고려시기였다고 볼수 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양고기는 《왕공귀족이 아니면 먹지 못하였다.》(《고려도경》)고 한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궁중이나 량반관리들속에도 양고기료리가 일정하게 보급되였다.
우리 선조들은 양고기료리를 함에 있어서도 양고기의 고유한 노린내가 조선사람의 식성에 맞지 않기때문에 소고기나 단고기료리를 만들던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다시 말하여 조선사람의 식성과 기호에 맞게 고유한 우리식 고기료리법으로 양고기료리를 만들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력사책과 전문료리책들에 수록된 몇가지 양고기료리방법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솥에 토막낸 양대가리를 물, 파, 생강, 후추 등과 같이 넣고 푹 고은 다음 식혀서 편육을 만들었다.
○ 솥에 참대 같은것을 걸치고 분지씨, 식초, 술, 양념으로 재운 양고기를 안친 다음 푹 쪘다.
먹을 때 양념이 배인 고기와 솥바닥에 고인 즙을 같이 먹었는데 이 방법은 고기찜이나 단고기《소주》를 만드는 방법과 비슷하다.
○ 양고기를 적당히 토막내여 물이 조금 든 단지에 넣고 그 아구리를 종이로 봉하여 푹 끓인 다음 술, 식초, 장, 생강 등을 넣고 익혔다.
○ 밸을 깨끗이 씻고 그속에 피를 채워서 삶았다.
○ 양갈비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양념에 재웠다가 구웠는데 굽는 과정에 찬물에 담그었다가 꺼내는것을 3번정도 반복하면서 익혔다.
○ 갈비나 내장으로 국을 끓이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 많은 량의 향신료와 소금, 후추, 식초 등을 리용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선조들은 전통료리들인 편육, 단고기《소주》, 선지피순대, 설야멱적 등의 가공방법을 양고기가공에 특색있게 적용하여 양고기료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료리가공방법은 양고기를 즐겨먹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수 없는것이였다.
평양사람들의 호방한 성격을 담은 어북쟁반
어북쟁반은 지난날 랭면과 함께 평양특유의 료리로 전해져 왔다.
평양의 랭면집들에서는 랭면과 함께 어북쟁반을 만들어 팔았으므로 사람들은 어북쟁반을 먹고 싶으면 의례히 랭면집에 찾아 들어갔다.
구절판, 신선로, 전골과 같이 쟁반도 그릇의 이름이자 료리의 이름으로 전해지고있다.
음식으로서 쟁반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랭면쟁반국수를 생각하지만 어북쟁반은 국수가 아니라 고기료리이다.
우리 나라 중세기의 전문료리책에 이 료리가 소개되여있지 않은것을 보면 근대에 생겨난것으로 인정된다.
어북쟁반은 질기지 않은 소의 어북살을 삶아 얇게 썰어 간장, 고추가루, 마늘, 참기름으로 연하게 양념을 하고 직경 50~60cm정도 되는 큰 놋쟁반에 담아 닭알, 버섯, 배, 파, 잣 등을 얹은 다음 초장종지를 놓아 고기를 집어서 찍어 먹게 하였는데 소고기에 간을 맞춘 따끈한 소고기국물을 부은 료리이다.
쟁반가운데에 닭고기를 섞기도 하였다.
어북쟁반은 한두사람이 아니라 3~4명이 이야기를 하면서 소주를 곁들여 담담하게 먹는데 적합한 료리였다.
이 료리식사에서 이채를 띠는것은 술안주로 고기를 집어먹으면서 국물을 마시고싶을 때에는 그릇에 입을 대고 마시는것이였다.
이때 쟁반이 커서 자기 혼자 그릇을 기울여 마시기 불편하므로 마주 앉은 사람이 그릇을 기울여 주어야 하였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웃으며 유쾌하게 국물까지도 마신다는데 어북쟁반의 진미가 있었다고 한다.
이 료리식사에서 재미나는것은 술과 고기를 다 먹고 국수생각이 날 때 랭면사리를 쟁반에 놓고 국물을 덧부어 가면서 말아먹는것이였다.
국수를 먹을 때 때로는 국수사리의 끝과 끝이 이쪽 사람의 입과 저쪽 사람의 입에 련결되여 그가운데를 웃으며 끊는 일이 벌어지군 했다고 한다.
따끈한 국수를 먹고싶을 때에는 숯불우에 쟁반을 얹어놓고 먹었다.
사람에 따라 작은 보시기를 따로 마련하여 고기나 국물, 국수를 떠다 먹기도 하였다.
직경 50~60cm나 되는 큰 놋쟁반, 여럿이 허물없이 둘러 앉아 먹으면서 화목을 도모하는 다정한 분위기, 료리에 어울리는 독한 소주, 술을 마신 뒤 랭면으로 이어지는 어북쟁반은 소박하고 호방하며 활달하고 랑만적인 평양사람들의 성품과 기호가 낳은 특이한 료리라고 할수 있다.
평양어북쟁반은 조선의 자랑할만한 료리로 되고있으며 이 료리를 먹어본 외국인들은 일생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기는 료리로 평가하고있다.
평양사람들은 이 료리를 《어북(물고기 어, 배 복)쟁반》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료리에 왜 《어북》이라는 말을 붙였는지 제대로 설명한것이 없다.
조선말사전들에서는 《어북》에 대하여 물고기배 또는 장딴지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 료리는 물고기로 만든것이 아니므로 분명히 초기에 소장딴지따위의 고기로 만들었다고 하여 《어북쟁반》이라고 불리우게 된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는 지금 소고기의 부위명칭에 어북살이 있고 어북고기로 만든 쟁반료리이므로 《어북쟁반》이라고 부르고있다.
신선하고 산뜻한 회료리
우리 인민은 일찍부터 회료리를 좋아하였다.
력사기록도 세나라시기에 사람들이 물고기회를 즐겨먹은 사실을 전하고있다.
그후 고려와 조선봉건왕조시기를 거쳐오면서 회는 민족음식의 하나로 발전하여왔다.
회는 고기회와 물고기회로 구분되는데 력사민속자료들에 있는 회의 몇가지 가공방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기회
고기회는 주로 소의 살고기, 콩팥, 처녑, 간, 양, 꿩고기 등으로 만들었다.
○ 기름층이나 힘줄이 없는 연한 살고기를 얇게 저며서 물에 담가 피기를 없애고 가늘게 채친다.
파, 마늘, 후추가루, 기름, 깨, 꿀을 섞어만든 양념에 재워서 잣가루를 뿌린다.
이것은 전형적인 고기회로서 생회라고 하였다.
○ 소의 처녑, 양을 뜨거운 물에 약간 데쳐내여 얇게 썬 다음 초장과 겨자장에 버무리거나 찍어 먹었다.
이것은 약간 데쳐냈다고 하여 숙회라고 하였다.
○ 소고기와 꿩고기를 섞어 칼탕질하여 기름장에 버무려 다식처럼 일정한 나무틀에 찍어내여 잠시 건조시킨 다음 초간장이나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이것은 회료리의 한가지이지만 일종의 고기《다식》이였다.
○ 겨울철때 꿩의 내장을 빼고 얼음이나 눈우에서 얼군 다음 살을 얇게 썰어 초장, 생강, 파를 두고 버무려먹었다.
○ 궁중료리에 갑회라는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소의 살고기, 양, 처녑, 간, 콩팥과 전복, 조개 등을 잘게 썰어서 참기름, 간장, 후추가루, 파, 마늘, 소금 등을 섞어서 만든 료리이다.
색갑회는 처녑과 조개를, 삼색갑회는 콩팥, 처녑, 전복을, 사색갑회는 처녑, 콩팥, 전복, 조개를 각각 섞어서 만들었다
-물고기회
물고기회음식감는 주로 명태, 숭어, 준치, 웅어, 넙치, 공치, 도미, 민어, 잉어, 홍어, 가물치, 쏘가리, 붕어와 해삼, 게 그리고 전복, 굴을 비롯한 각종 조개류이다.
물고기회는 일반적으로 껍질을 벗겨 살을 얇게 썰어 겨자나 초고추장에 버무려먹었다.
작은 물고기, 조개 등은 밸을 따내고 그대로, 낙지, 문어 소라, 전복, 해삼 등은 보통 살짝 데쳐서 회를 만들었다.
우리 조상들은 신선한 물고기를 투박하게 썰거나 작게 썰어서는 생선의 고유한 맛을 볼수 없다고 하여 대체로 입에 넣으면 혀에 사르르 감기면서 씹힐 정도의 크기로 얇게 썰었다.
생선을 써는 방법과 모양에 따라 볼품과 맛이 다를수 있기때문에 살결대로 가늘게 썰면서 모양은 입안에 넣기 좋게, 보기에도 알맞춤하게 하였다.
우리 인민들은 보통 회감을 초고추장에 버무리거나 초고추장이나 초간장에 찍어 먹었다.
그러나 진짜 회맛은 회감을 식초를 조금 탄 간장에 찍어 먹어야 느낄수 있다고 하였으며 홍어와 가오리는 초고추장에 찍어먹는것이 제격이라고 일러왔다.
여름철에는 쟁반에 얼음을 깔고 그우에 회를 담은 접시를 놓고 먹으면 회의 시원하고 생신한 맛이 더 돋구어진다고 하였다.
회료리의 양념으로는 고추가 재배되기 전에는 겨자장을 많이 썼고 17세기 이후부터는 주로 초고추장을 썼다.
조선두부
우리 나라에서 두부에 대한 최초의 력사기록은 고려때에 나온다.
리규보(1168~1241)는 두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나물국 오래동안 먹어 맛을 못느껴
두부가 새로운 맛을 돋구어주네
이 없는 사람 먹기 좋고
늙은 몸보신에 더없이 좋네
우리 나라 두부에는 새끼로 묶어 들고 다녀도 이지러지지 않는 단단한 막두부, 처녀의 고운 손 아니고는 문드러진다는 연두부, 굳어지기 전에 건져낸 순두부, 베천에 싸서 굳힌 베두부, 명주로 굳힌 명주두부 등 여러가지 종류가 있었다.
우리 나라의 두부 만드는 기술은 이웃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두부료리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다른 음식감와 함께 꼬챙이에 꿰여 만든 료리가 발전하였다.
그가운데서 삶은 굴과 두부를 섞어서 꼬챙이에 꿰여 기름장을 발라 구운것과 두부를 고기와 함께 꿰여 구운것을 높이 일러왔다.
콩나물이야기
우리 나라는 콩의 원산지로 알려져있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콩으로 콩밥, 콩국, 콩죽, 콩떡, 콩강정, 콩자반, 콩잎절임, 콩잎국 등 여러가지 콩음식을 만들어먹었다.
그리고 콩을 재배하는 과정에 심어먹는 콩종류도 다양해져 그 가지수가 또한 수십을 헤아리게 되였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서 콩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해왔는가 하는것은 18세기의 실학자 리익의 《대두론》에도 그 일단이 반영되여있다.
그는 만약 우리 나라에 콩이 나지 않았다면 그 잦았던 흉년과 기근, 외래침략에서 살아남을수 없었을것이라고 하면서 민족과 나라가 유지된 저력으로써 《대두국력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콩나물은 남새를 소금에 절여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던 그 시기에 모래무지에서 자라나는 콩싹에서 착안되여 유래된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콩나물은 주로 겨울철에 남새대신으로 집집마다 길러 먹었다.
콩나물은 인삼과 같이 우리 나라에서 나는 콩과 우리 나라의 물로 길러야 제맛이 난다.
콩자체에는 비타민C가 없지만 콩나물을 기르면 많은 비타민C가 생겨 콩나물 l00g만 먹어도 하루 필요량의 1/3을 섭취할수 있다.
옛날부터 콩나물은 해장에 좋다고 하여 국으로 많이 끓여먹었다.
오늘에 와서 확증된데 의하면 콩나물속에 알콜분해를 촉진하는 성분이 풍부히 들어있다.
최근에 와서 발표된 한 연구보고에 의하면 술기운을 해소하는 효소를 활성화시키는 《아스파르산》이 콩나물뿌리에 제일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해장국감으로 콩나물을 쓴 우리 조상들의 슬기도 놀랍지만 해장국을 끓일 때 콩나물뿌리를 다듬지 말아야 한다고 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 또한 감탄을 자아낸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구황식품
지난날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할 때 낟알대용으로 먹는 야생식물음식감을 구황식품이라고 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큰물이나 가물 등 자연재해로 인한 흉년을 수없이 겪어오는 과정에 식량을 절약하거나 대신할수 있는 여러가지 식물의 연한 싹과 잎, 꽃, 뿌리, 열매, 껍질 등을 찾아내여 가공해먹는것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경험을 체득하게 되였다.
16세기의 책인 《구황촬요》, 18세기말~19세기초의 책인 《중보산림경제》를 비롯한 여러 력사책들과 민속자료들에는 수많은 구황식료품들과 그 가공방법이 지적되여있다.
그 대표적인것으로는 소나무잎, 소나무껍질, 느릅나무껍질, 칡뿌리, 갈뿌리, 메밀꽃, 콩잎, 콩깍지, 토란, 마, 도토리, 삽주뿌리, 메뿌리, 둥굴레, 소리쟁이, 흰솔풍령, 나리뿌리(백합), 마름, 고욤, 개암, 들깨, 쑥, 황정, 대추, 은행, 잣, 호두, 곶감, 호마, 느티나무잎 등을 들수 있다.
이러한 구황식품가운데서 쉽게 얻을수 있거나 널리 알려지지 않고있는것 그리고 알려졌으나 가공방법을 잘 모르고있다고 보아지는 몇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소나무
소나무의 잎, 껍질, 송진, 솔방울 등이 식용으로 쓰이였다.
력사책들에는 솔잎을 으뜸가는 구황식품으로 꼽고있는데 느릅나무껍질과 섞어 먹으면 변비가 없어진다고 하였다.
솔잎으로는 죽과 경단을 만들었다.
솔잎죽은 솔잎가루, 쌀가루, 느릅나무껍질즙(3 : 1 : 0.1)을 섞어서 쑤었는데 찧은 솔잎을 묽게 쑨 낟알가루죽에 풀어서 먹었다.
솔잎죽은 주식을 대용할뿐아니라 병에 대한 저항력을 키워주는 식품으로 널리 알려져있었다.
솔잎경단은 솔잎을 찐 다음 말려서 가루를 내여 백미나 보리, 밀, 콩가루 등과 섞어서 만들었는데 쪄서 먹거나 삶아 먹었다.
소나무의 속껍질은 말려두었다가 필요할 때 재물에 담가 진을 빼고 절구에 찧은 다음 쌀이나 콩가루와 섞어 죽을 쑤어먹거나 낟알가루를 섞어서 떡을 만들어먹었다.
소나무꽃가루에 꿀이나 조청을 넣어 과자를 만들어먹거나 덜 여문 솔방울을 따서 말린 다음 가루를 내여 꿀에 버무려서 혹은 물에 타서 마셨다.
력사책에는 투명한 송진을 뽕나무재물에 우려내여 찬물에 넣고 응고시킨것을 끓여서 말린 다음 가루를 내여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 도라지
도라지를 푹 삶아 보자기에 싸서 물에 담그어 주무르거나 눌러 쓴맛을 뺀 다음 밥에 섞거나 낟알가루에 섞어 쪄서 먹었다.
말린 다음 가루를 내여 밥에 섞어 먹기도 하였다.
또한 도라지를 칼등으로 두드려 장을 발라 구워먹거나 파, 고기 등과 같이 꼬챙이에 꿰서 지지거나 튀겨 먹기도 하였다.
○ 칡뿌리
껍질을 벗겨 절구에 찧거나 돌우에 놓고 두드린 다음 물에 담그어 앙금을 앉혔다가 그 앙금으로 국수나 떡, 다식을 만들기도 하고 쌀과 섞어 죽을 쑤기도 하였다.
칡의 어린 잎은 나물을 만들어 밥에 얹어 먹고 다 자란 잎사귀는 그늘에서 말렸다가 가공하여 먹었다.
○ 도토리
구황식품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실록》에도 흉년에 도토리만한것이 없다고 기록되여있고 정다산도 그 효능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농마를 내여 밥에 섞어 먹거나 묵을 만들어 주식으로 리용하였다.
○ 갈뿌리
칡뿌리와 같은 방법으로 가공하여 록두가루나 메밀가루에 섞어 국수를 누르거나 밥에 섞어 먹었다.
○ 나리
봄과 가을에 뿌리를 캐서 굽거나 쪄서 먹었고 쌀, 보리 등에 섞어 밥을 짓거나 죽을 쑤어먹기도 하였다.
어린 잎은 나물로 먹고 다 자란 잎은 가루를 만들어 지져 먹었다.
○ 만삼
삶아서 가루를 내여 밥에 섞어 먹었다.
○ 쑥
데쳐서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다음 쌀과 섞어서 밥을 짓거나 죽을 쑤어먹었으며 국을 끓여먹기도 하였다.
○ 느릅나무
연한 잎은 쪄서 떡에 넣거나 국을 끓여먹었으며 속껍질에서 짜낸 즙은 솔잎경단을 만드는데 쓰거나 변비치료약으로 썼다.
속껍질을 잘게 썰어 말리웠다가 가루를 내여 지짐을 부치기도 하고 쌀, 보리 등에 섞어 죽을 쑤거나 경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 개암
말리워 먹기도 하고 삶거나 굽거나 쪄서 그리고 떡이나 밥에 넣어 먹기도 하였다.
○ 구기자
연한 잎은 나물로 먹거나 밥에 섞어 먹었다.
잎과 열매는 말려두었다가 필요한 때 먹기도 하였다.
○ 뽕나무
연한 잎은 무쳐 먹었으며 크게 자란 잎은 말려서 가루를 내여 두었다가 낟알과 섞어서 먹었다.
뽕나무속껍질을 찧어서 물에 담그면 앙금이 생기는데 이 앙금을 말려서 밥이나 죽, 떡을 만들어먹었다.
○ 더덕
새순은 나물을 하고 뿌리는 날것으로도 먹고 굽거나 삶아서 말린 다음 가루를 내여 밥에 섞어 먹기도 하였다.
○ 둥굴레
봄과 가을에 뿌리를 캐서 말린 다음 가루를 내여 밥이나 콩가루와 섞어 먹었다.
약한 불에 푹 고아서도 먹었다.
○ 질경이
잎을 따서 한시간정도 삶아 말린 다음 낟알과 함께 죽을 쑤어먹었다.
장의 《3형제》
예로부터 우리 인민은 간장은 음식물의 간을 맞추는데 썼고 된장은 그대로 혹은 부글부글 끓이거나 국을 끓이는데 써왔으며 고추장은 입맛을 당기게 하는 독특한 양념감으로 리용하여왔다.
간장, 된장, 고추장은 쓰이는 음식감나 만드는 방법에서 여러가지가 있지만 다같이 콩을 기본원료로 하고있고 콩을 삶아 가지고 적당하게 띄워서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한 콩식료품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은 수십까지나 되는 간장, 된장, 고추장을 《장》이라는 말로 통털어 표현해왔다.
원시사회말기부터 콩농사를 짓기 시작한 우리 선조들은 소나 말 등 집짐승의 겨울먹이로 콩을 삶아주군 하였는데 소나 말이 땅에 떨어져 곰팽이가 낀 콩을 유별나게 더 맛있게 먹는데 주목하게 되여 삶은 콩을 일부러 띄워서 먹기 시작한데로부터 장이 유래되였다고 한다.
간장과 된장은 매집에서 제각기 담그어먹게 됨으로써 그 방법과 맛이 또한 집집마다 독특했다고 하며 장을 얼마나 맛있게 담그는가에 따라 그 집의 품위가 론의되였다고 한다.
옛날 선조들은 딸을 《법도》있는 집으로 시집보내려면 33가지 장담그는 법을 익혀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하였다.
덕흥리 고구려벽화무덤에 있는 묘지명(묘지에 기록해 놓은 글)에 《많은 사람을 동원시켜 큰 공사를 벌렸는데 백미밥, 고기, 술과 함께 장도 한 창고분이나 먹었다.》고 기록되여있는것을 보면 고구려시기에 벌써 장이 백미밥과 함께 선조들의 식품가운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었음을 알수 있다.
고추장은 조선봉건왕조시기 우리 나라에 고추가 들어와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장의 감칠맛을 더 돋구고 그것이 시여지는것을 막는 고추의 독특한 성질을 리용하여 만들기 시작하였다.
고추장품종은 멥쌀고추장, 찹쌀고추장, 고기고추장, 약고추장 등 여러가지로 발전하였다.
이리하여 간장, 된장, 고추장은 조선음식가운데서도 가장 기초적인 식품으로 되였으며 조선고유의 민족음식과 식생활을 상징하는 대표적인것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아무리 좋은 고기국이라도 몇끼만 련거퍼 먹으면 물리여 못먹지만 된장국을 평생 먹어도 물리지 않는것은 그만큼 장의 독특한 맛이 조선사람의 피와 살에 배여있기때문이다.
《제6의 맛》을 내는 장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은 양념감, 부식물로서 사람들의 입맛을 당기게 할뿐아니라 콩에 있는 영양소를 효과있게 섭취할수 있게 한다.
예로부터 밭에서 나는 《고기》라고 하는 콩은 오곡가운데서 단백질함유량이 가장 많지만 날것대로 먹으면 전혀 소화할수 없고 볶아서 먹으면 겨우 60%, 삶아서 먹으면 70%밖에 소화할수 없으며 두부를 해먹는 경우라야 90%를 소화한다.
그러나 삶은 콩을 띄워서 장을 담그어먹으면 거의 100% 섭취할수 있다.
또한 간장, 된장, 고추장은 독특한 감칠맛을 내고있는데 이것은 지금 짜고 달고, 쓰고, 시고, 매운것을 말하는 5미를 벗어 나는 제6의 맛으로 알려지고있다.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낸 간장, 된장, 고추장은 어느 나라 사람들의 미각에서도 느낄수 없고 오직 조선사람들에게만 유별나게 발달되여있는 제6의 미각을 통하여 감칠맛을 완전하게 안겨준다.
간장, 된장, 고추장은 이처럼 우리 인민의 뛰여난 지혜와 창조력을 보여주는 좋은 음식이고 우리 민족의 독특한 식생활을 특징짓는 우수한 민족식품이라고 할수 있다.
특이한 고기장-어육장
우리 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젓갈이 유명한 음식으로 알려져있다.
원시시대나 고대에도 젓갈을 만들어먹었다고 생각되지만 전해지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세나라시기 결혼식에 젓갈이 쓰이고 고려시기에 새우를 많이 잡아 젓갈을 만들었는데 모두가 즐겨먹었다는 기록(《고려도경》)이 있는것은 우리 인민들이 일찍부터 젓갈을 만들어먹었으며 발전시켜 왔다는것을 자료적으로 실증해주고있다.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젓갈을 만드는 방법이 다른 음식가공에도 적용되군 하였는데 그 실례의 하나가 바로 어육장이다.
어육장은 특이한 고기장인데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지고있다.
독이나 단지에 소고기, 양고기, 노루고기, 토끼고기 등과 소의 간, 염통을 조금 넣고 그우에 약간 말린 여러가지 물고기와 데쳐 말린 문어, 낙지, 전복, 섭 등을 편 다음 꿩고기, 닭고기를 놓는데 사이마다 메주, 소금, 생강 등을 놓고 끓여 식힌 소금물을 붓는다.
이렇게 담그어 100일이상 삭히면 여러가지 고기맛이 혼합되여 장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 술의 기원
술은 원시시대에 자연적으로 발효된 과일이나 열매의 즙으로부터 유래되였다.
그후 신석기시대에 농사를 짓게 되면서 사람들은 낟알을 가지고 술을 만들어 마셨다.
그때 리용한 술잔들이 오늘 유물로 전해지고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술에 대한 력사기록은 고대에 처음 보인다.
고대국가들인 고조선에서는 10월에, 부여에서는 정월에, 마한에서는 5월에 사람들이 춤과 노래와 술로써 하루를 즐기였다고 한다.
그때 술은 막걸리같은 곡주였다고 인정된다.
고대사람들은 이미 발전된 양조법과 술보관법을 알고있었으며 술마시는 례절도 지켜왔다.
세나라시기이후 우리 나라의 술은 외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다른 나라의 력사책들에는 고구려사람들이 술을 잘 빚었다고 하였고 8~9세기 이웃나라의 풍류객들이 우리 나라 술을 널리 리용하였으며 고려의 술이 독하고 빨리 취하고 빨리 깨는데 그 맛이 좋다고 하였다.
고려때까지는 청주, 탁주가 기본을 이루었으며 그후 소주가 널리 퍼지게 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술의 종류는 매우 많아졌다.
기록들에 보이는 술만 하여도 백수십종이 넘는다.
조선술이 일찍부터 유명하고 명성이 높았던것은 우리 나라의 물이 수질이 좋으며 낟알 또한 기름지고 기후풍토가 알맞춤하였을뿐아니라 양조기술이 발전하였기때문이였다.
우리 나라의 술 몇가지
○ 소주
소주는 담근 술을 고아 증발시켜 이슬을 따로 받아낸 술이라고 하여 로주(이슬 로, 술 주)라고 하였고 화주, 한주, 기주라고도 하였다.
소주에 대한 력사자료는 《고려사》의 최영전에 처음 나온다.
기록에 의하면 최영이 무인으로서 명성을 날렸을뿐아니라 소주 또한 즐겨 마셨으므로 《소주군》이라는 별명을 받게 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 소주가운데서 특히 소주를 한두번 더 고아서 꿀과 지초를 깔고 이슬을 받아낸 감홍로는 색갈이 불그스레하고 맛이 달며 독한것으로 이름난 술이였다.
소주는 주정이 높아 큰 잔에 많은 량을 마시기 어렵다.
하여 조선봉건왕조시기 사람들은 작은 잔을 《소주잔》이라고 하였다.
○ 청주 - 약주
청주는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약주로 불리웠다.
때문에 약주는 청주의 다른 명칭이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청주에 속하는 술은 기록에 나온것만 보아도 수십종이나 된다.
청주를 약주로 부르게 된 리유에 대하여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하나는 18~19세기 이름있던 학자 서유구가 고심하던 끝에 특별히 좋은 술을 만들었는데 그의 아명이 약봉이고 그가 살던 곳이 약현이 였으므로 《약봉이 만든 술》, 《약현에서 만든 술》이라는데서 유래되였다는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봉건왕조정부에서 농사가 제대로 안되는 현에 금주령을 내리군 하였는데 그런속에서도 량반관리들은 술을 끊을수가 없어서 《약물》이라고 하면서 마셨기때문에 약주라는 말이 생겼다고도 한다.
그래서 《점잖은》 사람들이 마시는 술을 모두 약주로 부르게 된것으로 보아진다.
그리고 청주에 여러가지 약용식물을 넣어 보신에 썼기때문이라고도 하며 술을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된다는데서 나온 말이라고도 전하여온다.
○ 그밖의 술
과일술
우리 나라의 과일술은 과일류를 발효시킨것이 아니면 과일이나 나무열매의 성분을 우려내여 만든것이였다.
주로 잣, 포도, 측백나무열매, 호두, 매화나무열매 등을 우려서 만들어 약용이나 별미로 마셨다.
포도주는 고려이전에도 우리 나라에 있은것으로 인정되나 기록상으로는 고려중엽의 《한림별곡》에 처음 보인다.
우리 나라에서 오래전부터 포도를 재배하였으므로 포도주도 오랜 력사를 가진 술이라고 할수 있다.
가향술
가향술은 꽃이나 식물잎을 넣어 독특한 향기가 나도록 만든 술이였다.
가향술에는 복숭아꽃, 솔꽃, 련꽃잎, 참대잎, 유자껍질, 진달래꽃, 배꽃 등을 넣어서 빚은 술과 정주나 소주에 그것들을 넣어 우러나게 한 술이 있었다.
약용술
약용술은 여러가지 약재를 넣어 만든 술이였다.
주로 대추, 후추, 계피, 차조기, 오갈피, 령지버섯, 구기자, 록두묵, 솔잎, 솔방울, 인삼, 당귀, 최향, 두릅, 우엉, 마늘, 범뼈 등을 넣어서 만들었다.
이양술
우리 나라에는 나무통이나 참대통에서 빚거나 술항아리를 땅속에 묻거나 찬물속에 담가 익혀 만든 술도 있었다.
정상적인 양조법이 아닌 방법으로 만든 술이라 하여 이양술이라고 하였다.
명절분위기를 돋구는 찰떡과 백미떡
겨울철에는 우리 인민들이 예로부터 년중 가장 큰 명절로 쇠여 온 설명절이 있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사람들은 해마다 설을 맞으면 강가에 모여서 편을 갈라 돌팔매놀이와 눈끼얹기 등과 같은 명절놀이를 하면서 즐겼다고 한다.
이것은 상무적기풍이 강한 고구려사람들이 활기있는 여러가지 놀이를 하면서 설을 즐겁게 쇠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설은 백제에서도 쇠였다.
정월초하루날이 되면 왕이 조원전에 나와 앉아 백관들의 새해축하인사를 받았으며 민간에서도 서로 축하하고 여러가지 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즐기였다.
한편 백제에서 261년에 설맞이행사를 하였으며 왕이 정월초하루날에 옷을 단정히 입고 정사를 처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자료들은 세나라시기에 벌써 설명절을 쇠는 풍습이 일반화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데 실상 설명절은 고대시기에 그 연원을 두고 수천년을 내려오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명절이다.
현대에 와서 쇠고있는 양력설은 우리 나라에 양력력서가 도입되기 시작한 1896 년(구체적으로 1896 년 1월 1일, 음력으로는 1895년 11월 17일)부터 생겨난 명절이다.
설명절때가 되면 우리 인민들은 명절 썩 전날부터 집안팎을 깨끗이 거두고 명절기분으로 흥성거렸다.
설날아침에는 집집마다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웃어른들에게 먼저 드리고 온 식구가 한자리에 둘러앉아 나누어먹었으며 세배군들에게도 대접하군 하였다.
여느 명절들과 마찬가지로 설날에도 명절음식으로서 첫번째로 꼽은것은 찰떡, 절편을 비롯한 갖가지 떡들이였다.
찰기가 나게 잘 친 찰떡은 팥, 참깨, 대추, 밤, 잣, 당콩 등으로 만든 고물을 묻혀 일정한 크기로 잘라 접시에 소복하게 담았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연백(연안, 배천)지방의 찰떡을 제일로 일러주었다.
이 지방의 찰떡은 콩보숭이를 묻히는것으로 해서 팥고물을 위주로 하는 다른 지방의 찰떡과 달랐다.
이 지방에서는 잔치상에 꼭 찰떡을 올려놓았으며 사돈집에 보낼 때에는 《안반(떡을 칠때에 쓰는 두껍고 넓은 나무판)만 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찰떡을 크게 잘라서 고리짝에 담기도 하였다.
찰떡은 어디까지나 《찰떡》이라는 고유한 우리 말로 부를 때만이 졸깃졸깃한 그 독특한 맛이 잘 안겨오는 우리 민족고유의 음식이다.
설날에는 설기도 즐겨 만들어먹었다.
설날에 해먹은 설기가운데서 가장 이름난것은 개성의 소머리떡이였다.
소머리떡이란 떡을 식혀서 썬 모양이 마치 소대가리편육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말이다.
소머리떡은 썰었을 때 겉모양이 독특하고 희환할뿐아니라 맛 또한 일품이였다.
개성지방에서는 이 떡을 자그마한 시루에 쪄가지고 시루채로 사돈집에 설음식으로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우리 나라 여러 지방들에서는 설날에 절편, 가래떡, 골무떡, 꼬리떡과 같은 백미떡들도 즐겨 해먹었다.
절편은 떡살을 박아서 끊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방에 따라 절떡, 달떡, 룡떡, 색떡으로도 불리웠다.
그리고 가래떡은 백미떡을 늘구어 길다랗게 만든것이고 골무떡은 골무만큼씩 짧게 떡을 끊은것이며 꼬리떡은 량귀를 꼬리처럼 뾰족하게 만든것이다.
절편과 꼬리떡은 색소를 넣어 빨갛고 파랗게 물들여서 큰상에 웃기떡으로도 썼으며 가래떡은 떡국이나 떡볶음감으로도 리용하였다.
조선의 특산음식 록두지짐
지짐은 우리 나라의 고유한 민족음식의 하나이다.
우리 인민들은 오래전부터 지짐을 즐겨 지져 먹어왔다.
밀지짐, 찹쌀지짐, 팥지짐, 강냉이지짐, 감자지짐, 록두지짐 그리고 낟알음식감들과 다른 부음식감들을 배합하여 지진 다양한 지짐들은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을 이채롭게 장식하군 하였다.
우리 나라의 여러가지 지짐가운데서 제일 이름이 높은것은 록두를 물망에 갈거나 록두가루를 물에 개서 기름에 지져낸 록두지짐이였다.
록두가 세나라시기이전부터 재배되였고 록두지짐가공법이 단순한것으로 보아 우리 인민들이 이 음식을 분명히 고대나 세나라시기에도 만들어먹었을것으로 짐작되지만 기록상으로는 1670년대에 씌여진 《음식지미방》에 처음 나온다.
당시의 록두지짐은 록두반죽물을 지짐판에 조금 떠놓고 우에 삶은 밤을 으깨여 꿀에 버무린것을 놓은 다음 다시 록두 간것을 씌워 지지고 그우에 잣과 대추를 박은것이였다.
그런데 18~19세기이후부터 지짐은 소를 넣지 않고 그냥 지진것만을 가리키게 되였고 소를 넣고 지진 지짐은 평안도, 함경도를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 《부꾸미》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지난날 결혼식이나 환갑과 같은 경사로울 때의 큰상은 물론 제상에도 록두지짐을 놓는것이 풍습으로 되여있었는데 기름기가 많은 고기를 높이 괼 때 밑받침용으로 널리 쓰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록두지짐을 대사뿐아니라 평상시에도 특식으로 지져 먹군 하였다.
록두지짐은 20세기이후 세계적으로 김치, 불고기와 함께 조선의 특산음식으로 평가되고있다.
별미로 먹어온 동과와 토란, 마
동과, 토란, 마, 우엉, 련뿌리 등은 오랜 력사를 가진 우리 인민의 전통적인 음식감이다.
우리 인민들은 이것을 주로 별미로 먹었고 식량이 부족할 때에는 주식음식감로도 널리 리용하였다.
○ 동과
우리 인민들이 동과를 식생활에 리용한것은 오랜 옛날부터이지만 력사자료에는 13세기부터 나온다.
그후 《도문대작》, 《시의방》, 《산림경제》, 《규합총서》 등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나온 농서들과 료리책들에도 동과의 재배와 가공방법들이 소개되여있다.
우리 선조들은 흔히 동과로 석박지, 김치, 장절임, 죽 등을 만들어먹었다.
동과절임은 동과의 껍질을 벗기고 적당히 토막내여 소금에 절인 음식이였고 동과석박지는 속을 파낸 동과안에 동과살과 마늘, 청각, 미나리 등과 조개젓국을 채워넣고 익힌 음식이였다.
그리고 동과김치는 나박김치 담그듯이 동과살을 얇게 썰어 미나리, 파 등 양념감을 두고 담근 여름철김치였고 동과죽은 동과살과 고기를 넣고 끓인 다음 백하젓으로 간을 맞춘 음식이였다.
우리 인민들은 또한 동과살을 썰어 마늘, 장과 함께 기름에 볶다가 지져 먹기도 하고 동과살에 꿀을 넣어 졸여먹기도 하였다.
○ 토란
토란도 력사책들에 많이 기록되여있는 음식감인데 우리 나라 중부지방에서 예로부터 리용한 남새의 하나이다.
덩이줄기, 잎 등은 반찬을 만드는데와 과자의 원료로 썼다.
덩이줄기가 작은것은 그대로, 큰것은 토막내여 삶아 먹거나 국, 볶음, 졸임을 만들어먹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루내여 쌀에 섞어 밥을 짓거나 지짐 또는 죽도 만들어먹었다.
평안도, 황해도, 개성 등지에서는 8월 추석날에 토란국을 끓여먹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이날의 첫 인사가 《토란국을 먹었는가.》라는것이였다.
일상적으로 먹는것도 좋았지만 토란은 특히 큰물이나 가물로 농사가 안되여 기근이 들었을 때 큰 은을 냈는데 이 경우 서리가 올 때 거둔 토란을 껍질벗겨 쌀 씻은 물에 우리고 데쳐서 말려두었다가 그대로 또는 가루를 내여먹었다.
○ 마
마는 고대부터 우리 인민이 즐긴 남새의 하나였다.
백제의 무왕은 어릴 때 마를 캐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를 서동(마를 파는 아이)이라고 이름지었다고 전하고있다.
마를 팔던 아이가 왕이 되였다는 이야기를 믿을수는 없으나 이 기록은 당시 마를 캐여 시장에 내다팔면서 생계를 유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며 그것이 일상음식감으로 리용되였다는것을 말해준다고 볼수 있다.
그후 20세기 초까지 마는 전통음식감으로 귀하게 리용되였다.
우리 인민들은 마를 고구마처럼 그대로 껍질을 벗겨 먹기도 하고 강판에 갈아서 즙을 내여 간을 맞추어 마시거나 밥에 섞어 비벼먹기도 하였으며 국거리로도 썼다.
또 가루를 내여 국수를 만들어먹기도 하고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반죽하여 마수제비를 만들거나 쌀과 함께 죽을 쑤어먹기도 하였다.
마를 오래전부터 식생활에 리용하여왔으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남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일만 그대로 하는 사람을 비겨 이르는 《귀 먹은 중 마 캐듯》과 남의 물건을 훔쳐가거나 떼여먹는 경우를 이르는 《남의것을 마 캐여먹듯 하다.》와 같은 속담들도 생겼던것이다.
지방의 특색있는 김치들
김치는 조선의 고유한 민족음식으로서의 일반적속성을 가지면서도 지방적특성이 있다.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자기 지방에서 나는 음식감들을 리용하여 모양과 맛, 색갈과 향기 등에서 지방적색채가 짙은 여러가지 김치를 담그어먹었으며 그 가공법을 후세에 길이 전하여왔다.
평안도의 백김치와 동치미
백김치는 고추를 전혀 넣지 않거나 적게 넣고 담그므로 허옇게 보이는데서 붙은 김치이름이다.
다른 김치보다 간을 연하게 맞춘 김치물을 많이 넣고 담근다.
백김치는 우리 나라에서 고추가 재배되기 전부터 담그어왔으므로 다른 김치보다 력사가 오래다.
이 김치는 다른 지방의 김치와 달리 사발이나 대접과 같은 큰 그릇에 국물을 많이 부어서 먹는다.
백김치는 국수나 밥을 말아먹는데도 좋다.
동치미는 독에 통무우를 넣고 김치국을 해부은것인데 이른봄까지 먹는 김치이다.
배, 생강, 고추 등과 같은 조미료를 적게 쓰며 국물을 많이 해넣는것이 특징이다.
동치미는 깨끗한 독에 무우를 한돌기 넣고 소금을 한줌 뿌리고 또 무우를 넣고 소금을 뿌리는 식으로 한독을 거의 채운 다음 여기에 소금물로 국물을 해붓고 양념감을 천에 싼채로 띄운다.
양념감을 싸는것은 그것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여 김치국물이 맑아지게 하기 위한것이다.
좋은 무우를 가지고 삼삼하게 담근 동치미는 익으면서 맛이 산뜻하고 쩡해지는데 그 국물로 흔히 메밀국수를 말았다.
유명한 평양랭면도 이 동치미물에 말았기때문에 그처럼 이름떨치게 되였다.
평안도의 특색있는 김치에는 이밖에도 콩나물을 슬쩍 데쳐 양념하여 익힌 콩나물김치와 가지를 데쳐서 손으로 찢거나 칼로 썰어 고추, 마늘, 파 등 여러가지 양념을 하여 익힌 짭짤한 가지김치가 있다.
함경도의 갓김치와 영채김치
함경도산간지대에서는 배추보다 갓이 더 잘 되였으므로 이곳 사람들은 갓김치를 즐겨 해먹었다.
갓김치는 갓의 잎과 줄기로 담근 김치이다.
절인 갓에 파, 마늘, 생강, 고추가루를 두고 골고루 버무려 독에 무우와 한돌기씩 엇바꾸어 넣고 우거지를 덮어서 익히는데 국물이 발그스름한 고운 색을 띠고 냄새가 향긋하며 약간 매울사하면서 시원한 맛을 내는것이 특징이다.
함경도의 산간지대들에서는 예로부터 산골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김치독을 묻어놓고 갓김치의 고유한 맛을 보존하면서 여름철까지 먹는 풍습이 전해내려왔다.
또한 갓김치국물로 언감자국수, 귀밀국수를 말아먹는 식생활풍습도 있었는데 이렇게 만 국수는 그 맛이 하도 좋아 셋이 모여 갓김치국물에 국수를 말아서 먹느라면 그가운데 한사람이 갑산으로 가도 모른다는 말까지 생겼다.
함경도지방에서 특별히 일러준것은 영채김치이다.
영채김치는 갓김치의 한 종류인데 상갓의 잎을 따서 소금에 절였다가 양념을 섞어 항아리에 넣고 봉해서 익힌 김치이다.
색이 누르스름하고 맵고 상쾌한 맛을 내는것이 특징이다.
옛날 함경도사람들은 이 김치를 귀한 손님이 오면 밥반찬으로 내놓군 하였다.
영채김치를 《영갈채김치》, 《상갓김치》라고도 하였다.
이밖에 무산지방의 무우청김치도 산간지대의 별식의 하나였다.
황해도의 고수김치
고수는 미나리 비슷한 남새인데 고수로 담근 김치는 황해도의 특산이였다.
고수김치는 고수의 잎만 가지고 담그거나 배추에 고수잎을 넣어 담근다.
황해도에서는 또한 늙은 호박과 배추, 무우를 섞고 파, 마늘, 생강, 고추가루를 두고 버무린 다음 새우젓국물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 호박김치도 명물이였다.
강원도의 참나물김치
참나물김치는 참나물을 양념에 버무려서 담근 김치이다.
참나물에 소금을 쳐서 숨을 죽인 다음 쌀 씻은 물로 김치국물을 해붓고 뚜껑을 꼭 덮어놓으면 잠시후에 새큼하고 향기로운 김치가 된다.
이 김치는 늦은 봄부터 여름에 걸쳐 참나물 애잎을 뜯어 담그는데 향기롭고 시원하며 불그스레한 고운 색갈을 내여 입맛을 돋군다.
강원도에서는 배추김치보다 무우김치(동치미)를 더 즐겨 담그었으며 열무김치나 도루메기, 명태, 무우를 토막내여 고추가루물을 들이고 마늘, 생강, 파, 미나리 등과 고루 섞어서 버무려 익힌 해산물김치 같은것도 담그어먹었다.
개성의 보쌈김치
개성보쌈김치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통배추를 가로 두토막이나 세토막을 내서 매 배추갈피사이에 낙지, 마른명태, 돼지고기나 소고기, 참나무버섯, 밤, 잣, 무우, 고추가루 등을 버무려 넣고 배추잎으로 싸서 독안에 차곡차곡 넣어 익힌 김치이고 다른 하나는 통배추를 나박김치처럼 모가 나게 썰어 여러가지 양념을 함께 버무려 배추잎으로 싸서 독안에 넣어 익힌 김치이다.
보쌈김치는 좋은 양념감을 쓰고 배추잎으로 쌌기때문에 배추의 신선한 맛이 변하지 않는 장점이 있어 다른 김치보다 고급한것으로 여긴다.
개성지방에는 보쌈김치를 음력 10월경에 담그어 주로 설이나 정월대보름 또는 4월 8일을 전후하여 먹는 풍습이 있었다.
추석과 송편
예로부터 《5월농부, 8월신선》이라는 말이 전해오고있듯이 음력 8월은 봄내여름내 땀흘려 일하던 농민들이 허리를 쭉 펴고 오곡이 무르익는 기름진 들판과 갖가지 향기로운 과일들이 주렁지게 열린 산판을 흐뭇이 바라보며 풍년의 기쁨을 누리는 시기이다.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이 음력 8월의 달밝은 보름날을 풍년농사를 지어놓은 기쁨을 즐기고 돌아간 조상들께 지성을 표시하는 명절로 쇠였다.
이날이 바로 《가을저녁》이라는 뜻을 가진 추석이다.
추석은 아름다운 가을날이라고 하여 《가위날》 또는 《한가위날》, 가을의 가운데달인 8월의 명절이라 하여 《중추절》이라고 일러오기도 하였다.
세나라시기에는 추석을 《가배날》이라고 하면서 큰 명절중의 하나로 꼽았다.
추석이 가까와오면 사람들은 햇곡식을 먼저 조상들에게 《맛》보인다는 즉 천신을 시킨다는 뜻에서 올벼를 베여 쌀을 내고 록두, 팥, 콩 등을 준비하였으며 추석전날에는 명절음식을 만들기에 바쁜 시간을 보냈다.
풍요한 가을철의 명절인것으로 하여 추석날에 만들어먹는 음식은 그 가지수도 많고 맛도 이채로왔다.
그 하많은 음식들가운데서 꼭 놓치지 않고 준비하군 한 음식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송편이였다.
추석날에는 찰떡도 있어야 하였지만 특히 송편이 빠져서는 안되였다.
우리 인민의 생활에서 송편은 추석을 상징하는 떡으로 되여왔다.
그래서 추석날에 만들어먹는 송편은 특별히 《추석송편》이라고 일러왔다.
송편은 솔잎을 깔고 찐 떡이라는데서 붙은 이름이다.
송편은 백미가루를 익반죽하여 둥글납작하게 밀고 거기에 소를 넣어 빚은 다음 쪄서 참기름을 바르는 방법으로 만드는데 그것의 크기나 빚는 방법은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지방에서는 손바닥만 하게 크게 빚었고 일부지방에서는 밤톨크기로 통통하게 빚었다.
그런가 하면 황해도지방에서는 손으로 살짝 눌러서 빚었고 강원도지방에서는 손으로 막 쥐였다가 놓은것처럼 빚었다.
강원도지방에서는 송편을 감자가루떡반죽에다 당콩소를 넣어서 빚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이 지방의 감자가 앙금이 많이 나고 질적거리지 않으며 맛이 유별난것과 관련된다.
이렇게 만든 송편은 다른 지방의 백미송편에 못지 않은 특식으로 일러주었다.
대체로 추석날에는 송편을 비롯한 떡들을 백미, 찹쌀 같은것으로 만들었지만 이런것이 잘되지 않는 함경도지방에서는 그곳에서 많이 나는 귀밀로 떡을 해먹었다.
이곳 사람들은 귀밀떡을 기름을 찰찰 발라 내놓았는데 이것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예로부터 삼수, 갑산지방에서는 《귀밀떡에 기름을 발라 저가락으로 잘못 집으면 후치령을 넘어간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송편은 추석날뿐이 아닌 여느 다른 명절때에도 특식으로 많이 해먹군 하였다.
특히 지난날 봄철의 명절이였던 일군날에 송편을 만들어먹는 풍습이 이채로왔다.
이날에는 곡식낟가리에서 털어낸 얼마되지 않는 쌀에 다른 쌀을 보태여 송편을 만들었는데 흔히 자기나이만한 개수를 먹었다고 한다.
어떤 고장에서는 이날에 집안식구들의 나이를 합한 수만큼 숟가락으로 쌀을 떠내여 송편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기회에도 만들어먹군 하였지만 어쨌든 송편은 풍요한 가을철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며 빼놓지 말아야 할 추석날의 절식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