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와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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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개와 찌개
지지개와 찌개는 우리 인민들이 오래전부터 밥반찬으로 널리 만들어먹어온 우리 나라의 향토적인 료리이다.
지지개는 고기, 물고기, 남새 등 음식감을 일정한 크기로 썰어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 또는 젓갈을 두고 끓여서 국물이 진하게 만든 간이 센 료리이다.
지지개는 지방에 따라 《장》이라고도 하고 《감정》이라고도 불렀다.
지지개는 국이나 탕보다 건데기가 많고 국물이 적으며 진한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지지개로는 우리 인민들과 친숙해진 소고기지지개, 무우젓국지지개, 김치지지개, 호박고추장지지개, 감자지지개, 명태두부지지개 등을 들수 있다.
소고기지지개는 소고기, 두부, 남새들을 알맞춤하게 썰어두고 끓였는데 여기에 버섯을 두고 맛을 돋구기도 하였다.
무우젓국지지개는 얄팍하게 썬 무우를 볶다가 새우젓국으로 간을 하여 끓인것이다.
새우젓국을 넣었기때문에 무우가 푹 물러도 누린내가 나지 않고 달달하면서도 구수하며 소화가 잘 된다.
김치지지개는 김치를 돼지비게와 함께 국물이 자박자박하게 지진것이다.
돼지비게를 잘게 썰어서 졸여 기름을 낸 다음 고기와 김치를 두고 볶다가 물을 약간 두고 양념을 하여 끓이기도 한다.
김치지지개는 마지막에 파를 많이 썰어넣어 향미를 돋구었다.
호박지지개는 여문 호박을 고추장으로 간을 맞추면서 끓인것이다.
맵싸하고 달달한 맛을 주는 맛있는 음식으로서 우리 인민들이 지금도 많이 만들어먹는 음식중의 하나이다.
감자지지개는 《감자장》으로 통용되고있는 좋은 음식이다.
풋고추와 감자를 넣고 된장으로 간을 맞추어 끓인다.
감자와 풋고추의 맛이 잘 어울려 구수하면서도 맵싸한 맛을 주는것이 감자장의 진미이다.
구수한 맛을 돋구기 위해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넣기도 하며 함경도지방에서는 마른명태대가리를 넣어 끓이기도 하였다.
감자장은 앓고난 뒤 입맛을 돋구는데 좋은 음식으로 알려져있다.
함경도사람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특산음식이였다.
찌개는 일명《조치》라고도 불리웠다.
찌개는 고기, 물고기, 젓갈류, 알류 등을 국물이 없이 찌거나 중탕하여 만든 랭료리이다.
찌개는 국물을 두지 않으므로 음식감자체에서 즙이 있거나 즙이 없는것도 있다.
지지개는 국을 대신하여 쓰이지만 찌개는 국과 관계없이 반찬으로만 쓰인다.
지지개에는 된장, 간장, 고추장 등 장이 꼭 들어가는것이 특징이지만 찌개는 장을 넣지 않고 만드는것도 있다.
지지개는 일반적으로 고기나 물고기에 남새를 섞어서 만들지만 찌개는 섞지 않고 만드는것이 더 많다.
찌개는 생선찌개, 풋고추된장찌개, 풋고추소고기찌개, 닭알찌개, 송이버섯된장찌개, 련어알찌개 등 가지수가 많다.
생선찌개는 일반적으로 토막낸 생선, 파, 풋고추, 버섯 등을 썰어넣고 장과 기름을 알맞게 쳐서 끊인다.
옛 고서 《시의방》에 의하면 말린천어를 비롯한 말린물고기를 가지고 찌개를 만들 때 고추가루에 기름을 두고 개서 찌개우에 넣으면 색갈이 고와진다고 하였다.
풋고추된장찌개는 된장에 풋고추를 넣고 짭짤하게 끓인 음식이다.
이 찌개를 만들때에는 서서히 끓여서 건데기에 장맛이 푹 배고 국물에 풋고추맛이 잘 우러나오게 하였다.
파된장찌개는 굵은 파를 썰어 넣고 된장으로 짭짤하게 간을 하여 끓인 음식이다.
파된장찌개에 분지가루를 조금 넣으면 구수하면서도 독특한 향기가 난다.
송이버섯된장찌개는 고기를 볶다가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넣고 얇게 썬 송이버섯을 두고 끓인것이다.
짭짤하면서도 향긋하고 감칠맛 나는 찌개이다.
닭알찌개는 닭알에 국물을 조금 두고 새우젓을 풀어 넣은 다음 가늘게 채진 소고기, 참나무버섯 그리고 실파와 실고추를 고명하여 꺼낸것이다.
련어알찌개는 련어알을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 말리웠던것을 물에 잠그었다가 간장에 졸인것이다.
인차 쓰는것은 꾸둑꾸둑하게 말리운것을 그대로 써도 된다.
련어알은 참기름에 볶다가 고추가루를 둔 다음 파, 마늘을 두고 간장을 부어 졸여서 만든다.
지지개와 찌개는 조리도구에서도 차이가 있었는데 찌개는 뚝배기에 지지개는 밑굽이 두터운 남비에 끓이는것이 관습으로 되여있었다.
감자장을 지질 때는 특별히 장사기를 리용하였다.
젓갈과 식혜
젓갈과 식혜는 발효법을 리용하여 만든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적인 민족료리이다.
젓갈은 각종 물고기와 조개류, 물고기의 알과 내장, 새우 등을 소금에 절였다가 양념을 하여 일정한 온도에서 삭힌 특이한 음식이다.
옛기록에는 우리 나라에서는 세나라시기의 결혼식에 젓갈이 쓰이였다고 한다.
고려시기의 《고려도경》에는 새우잡이를 잘하여 젓갈을 만들었는데 모두 즐겨하였다고 썼다.
이것은 우리 인민들이 일찍부터 젓갈을 만들어먹었으며 발전시켜왔다는것을 말해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와서는 젓갈이 더 다양해지고 발전하였으며 끼니밥상에 없어서는 안될 품목으로 되였다.
력사기록에 14세기에 백하젓, 건뎅이젓, 게젓이 유명하였으며 새우젓, 조기젓, 호드기젓, 명란젓, 굴젓 등이 널리 리용되였다고 한다.
15세기의 《성종실록》에 의하면 은어젓, 숭어젓, 련어젓, 송어젓, 련어알젓, 새우젓, 전복젓 등 16가지의 젓갈품이 이웃나라에 수출되였다고 한다.
명태 한가지로도 명태젓, 명란젓, 창난젓, 아가미젓들을 담그었다.
명태젓은 명태살을 토막내여 소금에 절여 마늘과 고추를 두고 삭힌것이다.
그대로 먹거나 무우를 섞어 식혜를 담그기도 하였다.
명란젓은 명태알을 창난젓은 명태밸을 절여서 숙성시켜 만든것이였다.
명란젓은 그대로 먹기도 하고 닭알을 푼 물을 섞어서 찌개를 만들어먹기도 하였다.
명태밖에도 여러가지 물고기와 성게, 굴, 건뎅이, 조개로도 젓갈을 담그었다.
가재미젓은 가재미를 토막내여 소금에 절구었다가 양념을 잘하여 삭히였는데 가시까지 만문하게 삭아서 먹기가 좋았다.
멸치젓은 달고 구수하여 그대로도 먹었으며 호박, 무우 등으로 지지개를 만들 때 양념감으로 조금씩 넣어 쓰기도 하였다.
멸치젓으로 담근 김장김치는 달고 구수한것이 특징이다.
성게젓은 《운단》이라고도 부르는데 다른 젓갈에 비하여 짠맛이 덜하면서도 독특한 맛이 있어 해안지방에서도 특별히 일러주는 귀한것이였다.
게젓은 게를 간장에 담그었다가 서너번 반복하여 달여서 부어 삭힌것이다.
한달정도면 잘 익는다. 게딱지를 떼내여 그안에 있는 장에 밥을 비벼 먹으면 특이한 맛을 낸다. 게는 또한 소금에 절여서 담그기로 하였다.
굴젓은 굴을 절여 양념한것이다.
보드라운 고추가루를 많이 넣고 담근 굴젓은 한번 맛을 들이면 그릇에 담은 젓갈이 다 없어질 때까지 수저를 놓지 못한다는 소문난 밥반찬이다.
이와 같이 젓갈은 짭짤하면서도 특이한 맛과 향기를 내므로 밥반찬으로 제격이였다.
젓갈은 직접 부식물로도 쓰이고 김치를 담그는데는 물론 다른 부식물을 만들 때도 조금씩 넣어 맛을 돋구는데도 쓰이였다.
식혜는 물고기에 무우, 좁쌀밥 등을 두고 길금가루를 쳐서 삭혀서 만드는 민족음식의 하나이다.
《정리의궤》에 의하면 왕의 수라상에도 매끼 식혜가 올랐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식혜는 함경도와 강원도가 유명하였다.
대표적인것은 가재미식혜, 명태식혜, 도루메기식혜 등이다.
가재미식혜는 소금에 절인 가재미살과 무우 그리고 조밥, 길금가루, 고추가루, 파, 마늘 등을 섞어서 삭혀서 만들었다.
누구나 즐겨먹는 밥반찬으로서 새큼한 맛과 단맛이 잘 어울려 입맛을 돋구는 음식이였다. 북청의 가재미식혜가 유명하였다.
도루메기식혜도 맛이 좋았다.
도루메기는 비린내가 없는 담박한 바다물고기로서 감칠맛이 적어 다른 료리에서는 별로 일러주지 않았으나 식혜에서 도루메기식혜는 도루메기를 토막쳐서 얼간하여 거의 익어갈 때 채친 무우와 함께 밥에 고추가루를 많이 넣고 버무려서 식혀 만들었다.
도루메기식혜는 강원도 통천, 고성의 음식명물로 알려져있다.
가재미나 도루메기뿐아니라 명태나 낙지, 문어 등으로도 같은 방법으로 식혜를 담그어 밥반찬으로 썼다.
장절임
장절임은 남새와 산나물을 말리거나 소금에 절구어 어느 정도 물기를 뺀 다음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에 박아두었다가 양념하여먹는 독특한 음식이다.
지난 시기 장절임은 김치와 같이 반찬에서 큰 몫을 차지하거나 많이 먹는 찬이 아니였다.
그러나 장절임은 밥맛을 돋구는 찬의 한 종류로서 간단한 끼니음식상을 차릴 때에도 항상 놓이군 하였다.
옛날에 집집마다에서는 장을 담글 때 미리 장독이나 장단지안에 여러가지 음식감을 넣어 장절임을 만들군 하였다.
세나라시기에 이미 우리 선조들이 장과 절임에 의한 음식법을 알고있었던것만큼 장절임을 만들어먹은 력사도 오랬다고 본다.
장절임과 관련한 기록은 《림원십륙지》, 《목은집》, 《시의방》, 《산림경제》를 비롯한 여러 책들에 보인다.
그에 의하면 오이, 가지, 고추, 파, 더덕, 도라지, 마늘, 무우, 미나리 등으로 만든 장절임들이 소개되여있다.
이것은 조선봉건왕조시기 장절임의 가지수도 많고 조리법도 발전했다는것을 보여준다.
우리 인민들이 만들어먹은 대표적인 장절임은 마늘장절임, 미나리장절임, 풋고추장절임, 들깨잎장절임, 더덕장절임, 가지장절임 등이다.
당과류
당과는 당분을 기본으로 하면서 영양분이 많은 음식감을 배합하여 만든것으로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당분을 보장해주는 중요한 영양식료품이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여러가지 당과류를 만들어 식생활에 리용하였으며 그 가공기술도 끊임없이 발전시켜왔다.
민족당과는 지난 시기에 《다과》라고도 불리웠다.
옛기록에 의하면 매년 설명절때면 《술을 가지고 떡, 밥, 다과 등을 마련해가지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 기록이 있다는것을 보면 당과의 력사가 매우 오래다는것을 알수 있다.
우리 선조들이 전통적으로 즐겨먹은 당과에서 대표적인것은 엿, 기름꿀과자, 다식, 숙실과, 정과 등이였다.
음료
음료는 사람들이 보통 마실수 있게 가공한 물을 통털어 말한다.
사람은 세상에 태여나자마자 젖이나 우유와 같은것을 섭취하다가 점차 미음, 암죽, 밥과 같은것을 먹으면서 성장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생존활동의 첫 시기부터 자연에서 식료원천과 함께 음료원천을 얻어내기 위한 창조적활동을 적극 벌렸으며 이 과정에 여러가지 알곡이나 과일, 산열매를 비롯한 갖가지 음식감들을 가공하여 달고 향기로운 음료를 많이 만들어내게 되였다.
우리 나라의 음료는 과일, 산열매류, 알곡류로 만든것으로 갈라볼수 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것은 수정과, 화채, 삶은배단물, 향설고, 제호탕, 숭늉, 수단, 식혜, 술, 차 등이였다.
우리 인민의 여름민속명절음식
예로부터 근면하고 락천적인 우리 인민의 창조적인 로동생활과정에 생겨나고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전통화된 명절들가운데는 류두절과 칠월칠석과 같은 여름민속명절들도 있다.
흐르는 내물에 머리를 감는 날이라고 하여 《류두날》이라고 부르는 음력 6월 15일은 사람들이 무더운 여름철 농사일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하여 내가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음식을 먹으며 물놀이를 하던 날이였다.
평양지방에서는 이날 남자들이 대동강에 나가서 목욕을 하고 물고기를 잡은 다음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어죽을 쑤어먹으며 즐겁게 휴식하였다.
녀성들은 이날 류두면, 수단, 건단, 수각아, 상아떡, 련병 등의 음식을 만드는 류두음식놀이를 벌려놓고 자기들의 음식솜씨를 보여주었다.
특히 류두날에는 갖가지 음식가운데서 류두면이라고 부르는 밀국수를 다같이 즐겨먹었는데 그것은 이 음식을 먹어야 여름철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하였기때문이였다.
칠월칠석이라고 부르는 음력 7월 7일은 여름밤 동네사람들이 마당에 모여앉아 별구경을 하면서 견우와 직녀에 대한 옛이야기로 밤가는줄 모르던 날이였다.
이날에 사람들은 복숭아나 추리, 수박, 참외 등을 먹으면서 옛말을 즐기였다.
음력 7월 15일은 김매기가 끝난 다음 피로도 풀겸 호미를 깨끗이 씻어두는 날이였다.
그래서 《호미씻기》라고 부르는 이날 마을사람들은 서로 도와가며 김매기를 끝낸 기쁨을 노래와 춤가락에 담아 놀이판을 더욱 흥성하게 하였다.
녀성들은 이날에 길쌈을 준비하는것과 함께 김매기가 끝난것을 축하하여 호미날모양의 떡, 밀전병, 호박전, 탁주 등 맛좋은 음식을 정성들여 만들어 가지고 춤판이 끝난 뒤에 펴놓아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
한편 사람들은 이날을 백가지 과일을 맛보는 날이라고 하여 백종날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만큼 이무렵이면 산과 들에 갖가지 과일들이 무르익어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날 알알이 크고 잘 익은 과일들을 맛보며 땀을 식히기도 하였다.
우리 인민의 가을민속명절음식
우리 인민은 오랜 옛날부터 음식문화를 발전시키는데서도 온갖 지혜와 재능을 다 발휘하여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다.
우리 민족의 민속명절들가운데는 우리 인민이 예로부터 즐겨 쇠오던 추석과 중구절과 같은 가을민속명절들도 있다.
아름다운 가을날이라고 하여 《가위날》이라고도 하고 가을저녁의 정경이 하도 인상적이여서 《추석날》이라고도 부르는 음력 8월 15일에 우리 인민들은 여러가지 민속놀이를 하는 한편 햇곡식으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가지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는것을 하나의 관습으로 여겨왔다.
추석날에 만들어먹은 대표적인 음식들로서는 송편, 쉬움떡, 찰떡, 노치, 토란국, 밤단자와 닭찜 등이였다.
이중에서도 햇쌀, 햇콩, 햇밤과 함께 솔잎향기를 재치있게 리용하여 만든 송편은 추석날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였다.
닭고기와 삶은 토란을 넣고 한소금 끓인 다음 소금, 실파로 양념하여 만든 토란국도 추석음식으로 잘 알려져있다.
평양지방에서는 추석을 앞두고 열흘전에 노치를 만들어 단지에 차곡차곡 담아두었다가 추석날저녁 어른, 아이 할것없이 모두가 노치를 참대꼬챙이에 꿰들고 달구경을 나가군 하였다.
중구일인 음력 9월 9일은 국화꽃이 만발하고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날의 경치를 구경하는 날이였다.
이날에 만들어먹던 음식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약리적가치가 있는 국화꽃잎을 찹쌀가루에 넣고 참기름으로 지져낸 국화전과 국화주, 국화차와 함께 배와 유자를 잘게 썰어서 잣과 석류를 섞어 꿀물에 타서 만든 화채 등이였다.
마가을인 음력 10월에는 날씨가 차지므로 주로 더운음식들인 신선로와 찌개, 단음식인 강정 등을 만들어먹었다.
고유한 민족음식-설렁탕
설렁탕은 소의 내장, 발쪽, 사등뼈 등을 가마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국물이 뽀얗게 되도록 푹 고은 음식이다.
살고기와 뼈만으로 고은 국과는 달리 소의 내장맛이 우러나는것이 설렁탕의 특징이다.
설렁탕의 유래와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선농단》이라는것이 있었는데 왕이 농사를 장려한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대신들이 거리에 나가 제사를 지내고 농사경험이 많은 농민들과 함께 모의밭갈이를 하였다.
의식이 끝난 다음 왕은 그들에게 소를 잡아 먹였다.
이때 만든 음식을 선농단에서 끓인 탕이라 하여 《선농단탕》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하여 《선농탕》이 되고 다시 변해서 《설렁탕》이 되였다고 한다.
설렁탕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한 다른 자료도 있다.
즉 설렁탕이란 이름은 오랜 시간 설렁설렁 끓인다는데서 유래되였다고도 하고 국물빛갈이 희다고 하여 《설(눈 설)》,국물이 진하다는 뜻에서 《농(무르녹을 농)》자를 붙여 《설농탕》이라고 하던것이 점차 《농》이 《렁》으로 변하여 생겨났다고도 한다.
설렁탕은 갖가지 영양물질이 골고루 들어있고 소화가 잘 되여 건강과 장수에 좋은 음식이므로 누구나 즐겨먹는 대중음식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평양온반의 유래
오래전부터 평양온반은 우리 나라의 이름난 민족음식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평양지방사람들이 언제부터 온반을 만들어먹었는지 정확히 알수 없으나 그것이 생겨나게 된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먼 옛날 평양관가에서는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의지가지할데 없는 불쌍한 젊은이들인 형달이라는 총각과 의경이라는 처녀가 심부름군으로 일하고있었다.
서로 의지하고 동정하면서 의좋게 살아오던 그들사이에는 세월과 더불어 사랑의 감정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해 추운 겨울날 형달은 뜻밖에도 관가로부터 억울한 루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였다.
의경은 옷한벌 변변히 걸치지 못한채 옥에 끌려가 모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있을 형달이가 너무 불쌍해 울고 또 울었다.
혈혈단신의 의경에게 있어서 형달은 모든것을 대신해주는 마음의 기둥이였다.
의경이가 며칠째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눈물만 흘리고있던 어느날 밤이였다.
부엌에서 일하는 한 어머니가 남몰래 백미밥 한그릇과 지짐 몇짝을 주면서 먹고 기운을 내야 형달이가 옥에서 풀려나올 때 건강한 몸으로 맞이할수 있다고 달래였다.
자기를 위해주는 그 어머니의 마음은 고마왔으나 어쩌다 색다른 음식을 받아든 의경의 마음은 옥에 갇힌 형달에게로 줄달음쳤다.
눈물을 닦고 일어난 의경은 밥우에 지짐을 놓고 거기에 설설 끓는 국물을 부은 다음 밥그릇의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는 형달이가 갇힌 옥으로 달려갔다.
바람조차 가리우지 못하는 옥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지쳐있던 형달은 그것을 받자마자 정신없이 먹었다.
그러자 꽁꽁 얼었던 몸은 인차 훈훈해지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그때에야 자기의 성급함을 느낀 형달은 미안함과 함께 감사의 말을 하며 방금 먹은것이 무슨 음식이냐고 물었다.
의경이 역시 형달이 그리운 마음에 두서없이 준비해온 음식이라 선뜻 대답을 못하고있다가 얼뜻 떠오르는 생각에 《온반(더운 밥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형달은 의경의 손을 꼭 잡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온반이라고 하면서 잔치할 때 온반을 만들어먹자고 하였다.
세월이 흘러 형달은 옥에서 나오고 마침내 의경이와 결혼잔치를 하게 되였다.
부모없이 자란 자기들을 동정하여 잔치상도 차려주며 축하해주는 고마운 이웃들에게 형달이와 의경이는 옥에서 한 약속대로 온반을 만들어 대접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음식맛이 참 별맛이라고 하면서 여간만 좋아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평양지방사람들은 결혼잔치를 할 때면 처녀와 총각이 형달이와 의경이처럼 착한 마음씨와 참된 의리를 지니고 화목하게 살라고 의례히 온반을 만들군 하였다.
그것이 점차 이름난 음식으로 알려지면서 전국각지에 퍼지게 되였다.
조선김치
김치는 우리 나라의 특색있는 발효식료품으로서 불고기, 록두지짐과 함께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장수식품의 하나이다.
김치는 조선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부식물이다.
우리의 민족음식구성에서 밥이 주식물을 대표한다면 김치는 부식물을 대표한다고 말할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추운 겨울이면 뜨끈한 온돌방에서 시원하고 쩡한 김치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는것을 제일로 여겼을뿐아니라 무더운 여름철에 땀을 들이고 입맛을 돋구는데도 김치를 으뜸가는 음식으로 여겨왔다.
우리 인민들은 기름진 고기를 먹으면서도 꼭 김치를 같이 먹었으며 떡이나 지짐을 먹으면서도 김치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였다.
조선사람에게는 뭐니뭐니해도 김치가 제일이다.
우리 민족의 뛰여난 슬기와 지혜의 산물인 김치는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다.
력사적으로 보면 우리 나라에서 김치는 세나라시기 이전부터 있었던것으로 짐작된다.
단군조선의 건국설화에 마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우리 나라의 첫 봉건국가였던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이 건국초기에 비류수강가에 남새잎이 떠내려오는것을 보고 그 웃쪽에 사람이 사는줄 알고 찾아올라갔다는 기록은 우리 인민들이 고대에 이미 적지 않은 남새를 재배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또한 세나라시기 고구려에서 술, 된장, 젓갈과 같은 발효식품들을 식생활에 널리 리용한 사실은 당시 식품의 저장 및 양조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으며 우리 인민들이 일찍부터 남새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가공할줄 알았고 소금에 절여서 만든 김치와 같은 저장음식들도 널리 만들어먹었음을 알수 있게 한다.
우리 나라에서 김치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고려시기에 처음 보이는데 이 시기에는 고추가 재배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김장은 고추를 넣지 않은 동치미였을것이다.
김장풍습이 있었다는것은 이 시기 김치가 일반가정들에서 보편화되여있었고 특히는 겨울철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음식의 하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자료에 의하면 고려시기에는 어장고, 침장고(간장, 된장, 김치를 만들어 보관해두는 창고)를 만들고 김치를 대량적으로 생산하였다고 한다.
《조선봉건왕조실록》에서는 1409년에 김장고를 설치하였다고 하였으며 《삼봉집》에는 고려때의 풍습에 따라 료물고(소용되는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를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여있다.
이 료물고는 남새류와 그 가공품을 두는 곳이기때문에 김장고의 전신이라고 볼수 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김치는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17세기에 고추가 재배되면서 이때부터 오늘의 김치와 비슷하게 여러가지 양념이 고루 들어간 다양하고 특색있는 김치들이 만들어지게 되였다.
《규합총서》, 《산림경제》등 민족료리고전에 기록된 김치의 종류는 무려 수십여종에 달한다.
여러 기록들에는 김치를 《침채》, 《침장》, 《짠지》, 《싱건지》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서술하였다.
여기서 《침채》는 텁텁한 김치이고 《침장》은 소금물에 담그어 저장한다는 의미에서 불리워진 이름이였다.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김치, 김장은 바로 이 《침채》, 《침장》이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 이전되여 생겨난 말이다.
그리고 《짠지》는 국물이 없이 짜고 매운 김치를, 《싱건지》는 국물이 맑고 싱거운 김치를 말하였다.
우리 나라 고유의 음식인 김치는 시원하고 쩡하면서도 독특한 향기와 상쾌한 감칠맛을 조화롭게 가지고있는것으로 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여러 나라들에 널리 퍼져 세계적범위에서 특색있는 건강장수식품으로 자기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내고있다.
두부가공의 시원
두부는 콩의 단백질 약 80%가 응결되여 얻어진 단백질덩어리이다.
두부 1모(250g)에는 소화되기 쉬운 상태의 단백질이 27g정도 들어있다.
이것은 소고기 150g에 들어있는 단백질과 맞먹는 량이다.
두부의 단백질은 질도 좋다.
한마디로 말하여 두부는 고기나 물고기에 못지 않게 영양가가 높은 음식이다.
두부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기의 시집 《목은집》에 처음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 두부에는 새끼로 묶어 들고 다니여도 이지러지지 않는다는 단단한 모두부, 처녀의 고운 손 아니고는 문드러진다는 연두부, 굳어지기 전에 건져낸 순두부 등 여러가지가 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책인 《규합총서》에는 두부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되여있다.
우리 나라의 두부 만드는 기술은 예로부터 널리 알려졌다.
두부료리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다른 음식감와 함께 꼬챙이에 꿰여 만든 료리가 발전하였다.
그가운데서 삶은 굴과 두부를 꼬챙이에 꿰여 기름장을 발라 구운것과 두부를 고기와 함께 꿰여 구운것을 높이 일러왔다.
장의 력사
장은 우리 선조들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세대를 이어 전해지면서 발전하여온 고유한 민족음식의 하나이다.
콩을 비롯한 낟알류들과 소금을 기본음식감로 하고 여기에 여러가지 보조용식감들을 섞어 발효시켜 만드는 장은 조선사람의 식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기초적인 식료품이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리규보(1168~1241)는 자기의 글에서 《여름에는 장이, 겨울에는 김치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것》이라고 하였으며 조선봉건왕조중기의 실학자 홍만선(1643~1715)은 자기의 저서 《산림경제》에서 《집집마다 장맛이 좋지 못하면 가재미육(좋은 나물과 맛있는 고기)이 있어도 찬을 맛있게 만들기 어렵다. 더우기 농촌에서는 고기를 얻기 어려으므로 갖가지 좋은 장만 있으면 반찬을 걱정하지 않는다. 가장(집안의 어른)은 모름지기 뜻을 침장(장담그기)에 두고 좋은 장을 진지하게 떠 쓸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이것만 보아도 장이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는가를 잘 알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장이 만들어져 식생활에 쓰이기 시작한 력사는 매우 오래다.
5세기 초의 고구려벽화무덤인 덕흥리무덤의 묘지명(묘지에 대한 해설문)에는 이 무덤을 만드는데 술과 고기, 백미와 함께 장도 한창고분이나 먹었다고 기록되여있다.
이것은 세나라시기에 벌써 장이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부식물의 하나로 되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우리 선조들은 오랜 세월 콩을 식생활에 리용하는 과정에 콩을 익혀서 인차 먹었을 때보다 보관과정에 곰팽이가 끼면서 변한 콩이 별나게 더 맛있고 소화도 잘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여 삶은 콩을 일부러 띄워먹기 시작하였는데 이로부터 장이 유래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이 시기에 장담그는 법이 발전하여 간장과 된장이 따로따로 만들어졌음을 알수 있게 한다.
고구려의 계승국의 하나인 발해의 특산물을 소개한 책에는 발해의 명산물의 하나로 《책성의 메주》를 전하고있다.
책성(오늘의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동 일대)지방은 발해5경의 하나였던 동경룡천부의 소재지로서 유명한 된장산지였다.
장은 음력 1일에 담근것이 숙성기간 변질되는 경우가 적고 소금도 적게 들며 장맛이 좋아 제일 좋은것으로 일러왔다.
그래서 해마다 겨울이 오면 모든 가정들에서는 가을에 장만한 햇콩으로 정성껏 메주를 쑤어 잘 띄워 말리워두었다가 봄에 나가 장을 담그는것을 관습으로 여겨왔다.
오랜 력사적과정을 걸쳐 계승발전되여온 우리 나라의 장담그는 기술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한계단 더 발전하여 장의 종류와 가지수도 늘어나게 되였다.
우리 인민들은 장맛이 좋아야 음식맛도 좋다는 의미에서 어느 집에 가든 《그 집 음식맛은 장맛》이라고 하였고 《장이 달아야 국이 달다.》고 일러왔으며 장의 맛과 행복한 생활을 비겨 《장이 단집에 복이 많다.》는 말도 례사로이 써왔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녀자들의 일솜씨와 재주에서의 기본은 바느질, 부엌일과 함께 장담그는 솜씨라고 하였다.
이처럼 장은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는 중요한 부식물의 하나이며 조선민족료리의 고유한 맛을 살리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양념감이다.
아무리 맛좋은 고기국이라도 몇끼만 련거퍼 먹으면 물리여 못먹지만 된장국은 평생 먹어도 물리지 않는것은 그만큼 장의 독특한 맛이 조선사람의 피와 살에 배여있기때문이다.
콩나물은 조선의 특산
콩나물은 조선민족의 우수한 발명식료품이다.
두부가 콩으로 만든 단백질식료품이고 장이 콩을 리용한 발효음식이라면 콩나물은 콩을 남새화한 식료품이다.
콩나물은 남새를 소금에 절여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던 그 시기에 모래무지에서 절로 자라는 콩싹에서 창안된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콩의 원산지인 우리 나라의 북부지역은 겨울추위가 류달리 엄혹하다.
그 추운 겨울에 남새를 해결한다는것은 옛날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그러나 우리 인민은 자연의 도전에 순응한것이 아니라 식물의 발아원리를 리용하여 콩을 싹틔워 남새로 리용할 기발한 착상을 하고 생활에 받아들였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민의 영특함과 지혜로움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라고 말할수 있다.
콩나물이 발명됨으로 하여 땅을 쓰지 않고도 남새를 대량생산하여 겨울철에 부족되는 비타민C를 충분히 섭취할수 있게 되였으며 기르기조건 즉 온도와 물을 임의로 조절하면서 사람의 요구에 따라 그 수확을 할수 있게 되였다. 콩나물은 콩에 어느 정도의 온도를 보장하고 물만 대주면 충분히 발근, 발아한다.
식물의 종자가 한번 발아하고 성장하기 시작하면 이것은 훌륭한 남새로 된다.
발아한 나물로서의 콩의 조성은 마른콩과는 전혀 다르다.
특히 비타민C가 새로 생기고 비타민B1, B2의 량도 증가한다.
즉 콩나물은 비타민을 충분히 섭취할수 있게 한다.
콩나물은 숙취(마신 술이 깨지 않은 취한 기운)를 푸는데도 특효가 있다고 전해지고있다.
옛날부터 콩나물은 해장에 좋다고 하며 국으로 많이 끓여먹었다.
오늘에 와서 확증된데 의하면 콩나물속에는 알콜분해를 촉진하는 성분이 풍부히 들어있다.
최근에 발표된 한 연구보고에 의하면 술기운을 해소하는 효소를 활성화시키는 《아스파트산》이 콩나물뿌리에 제일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해장국감으로 콩나물을 쓴 우리 조상들의 슬기도 놀랍지만 해장국을 끓일 때 콩나물뿌리를 다듬지 말아야 한다고 한 그 지혜 또한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수 없게 한다.
콩나물은 인삼과 같이 우리 나라에서 나는 콩과 우리 나라의 물로 길러야 제맛이 난다.
조선불고기의 유래
불고기는 우리 나라 민족음식가운데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진 우수한 료리의 하나이다.
사람이 불을 알게 되면서부터 고기를 불에 구워먹는 식생활방법이 나오게 되였으며 그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이가공방법이 끊임없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불고기음식으로 되였다.
우리 인민들은 일찍부터 고기 굽는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책들에는 고기를 종이나 흙에 싸서 굽는 방법, 고기를 꼬챙이에 꿰여 굽는 방법, 지짐판이나 솥에서 굽는 방법, 고기를 꼬챙이에 꿴 다음 밀가루 같은것을 묻혀 굽는 방법, 고기를 삶은 다음 다시 굽는 방법 등 여러가지 방법이 소개되여있다.
이러한 고기 굽는 방법에서 우리 인민들이 흔히 적용하여온것은 고기를 꼬챙이에 꿰거나 적쇠에 올려놓고 직접 불에 대고 굽는것과 철판(지짐판)이나 돌우에서 굽는 방법이였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구운 우리 나라의 구이료리가운데서 세계적인 명물로 이름난것은 고기를 적쇠에 올려놓고 굽는 불고기이다.
소고기를 갖은 양념에 재웠다가 불에 구워먹는 불고기는 우리 나라의 고유한 료리이며 오늘 세계적으로 《조선불고기》로 널리 알려져있다.
우리 나라의 불고기는 고구려의 맥적에서 유래되였다고 한다.
《맥적》의 《맥》은 고구려의 기본주민집단을, 《적》은 구이를 가리켰으므로 《맥적》은 고구려의 불고기를 의미하였다.
불고기라는 말은 그 이후 시기에 나온것으로 보고있다.
17세기까지 우리 인민들은 불고기를 고기와 다른 음식감을 꼬챙이에 꿰여 양념에 재운 다음 불에 굽는 방법으로 하였다.
그러다가 18세기경에 이르러 적쇠가 보급되면서 지금과 같은 적쇠우에 고기를 올려놓고 구워먹었다.
이때로부터 꼬챙이에 꿰여 구운 고기는 적, 산적으로 부르고 적쇠에 올려놓고 구운 고기는 보통 불고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꼬챙이에 꿰여 구운 고기도 불고기라고 하기도 하였다.
불고기가운데서 개성의 설야멱적이 특히 유명하였다.
설야멱적이란 눈오는 겨울밤에 먹는것이 제격이라는데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설야멱적은 양념한 소고기를 대나무꼬챙이에 꿰서 숯불에 구운 불고기인데 력사기록인 《음식지미방》, 《산림경제》에는 고기가 반쯤 익은것을 잠간 찬물에 담갔다가 꺼내여 센 불에 굽는 일을 세번 반복한 다음 기름을 바르고 한번 더 구워내면 연해지고 맛이 좋아진다고 씌여있다.
조선소불고기가 일찍부터 세상에 명성이 높게 된것은 조선소의 고기맛이 특유한데도 있지만 보다는 우리 인민들이 소고기의 특성에 맞게 가공방법을 옳게 적용한데 있다.
소불고기는 소고기를 마늘과 참기름을 써서 만든 양념장에 재웠다가 적쇠에 올려놓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마늘에 들어있는 효소들이 고기를 연하게 하고 누린 맛과 잡맛을 없앨뿐아니라 마늘, 참기름의 향기가 소고기에 배여들어 불고기에서 독특한 맛이 나게 된다고 한다.
우리 인민들은 소불고기 다음으로 꿩불고기를 일러주었다.
19세기의 료리책인 《시의방》에서는 꿩불고기가공방법에 대하여 《꿩을 그슬려 털을 뽑고 각을 떠서 가슴쪽의 살을 두세쪽으로 저미고 다리는 껍질만 벗겨 자른다. 마늘 다진것, 깨소금, 기름, 후추가루, 꿀을 섞어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고기를 버무려서 물에 적신 흰종이에 싸서 굽는다. 다른 방법은 양념에 버무리기 전의 꿩고기를 물에 적셔가며 굽다가 반쯤 익으면 껍질을 벗기고 기름장을 발라 굽는다.》고 하였다.
오늘 조선불고기는 조선사람들이 사는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인기있는 조선료리의 하나로 보급되고있다.
추어탕
추어란 미꾸라지를 말하는데 가을철의 미꾸라지맛이 하도 좋아 《추어》라고 하였다.
추어탕은 우리 인민이 즐겨먹는 민족음식의 하나로서 그 맛이 좋고 영양가가 높은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추어탕은 허약한 사람들의 원기회복과 어린이들의 키크기에 많이 쓰이였다.
추어탕을 끓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한가지 방법은 고기장국을 끓이다가 고추장을 조금 풀어두고 두부를 통채로 넣은 다음 미꾸라지를 즉시 넣으면 그것들이 뜨거워 두부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썰어서 탕을 끓이는 방법이고 다른 방법은 추어를 고기 삶은 물에 넣어서 푹 고은 다음 소고기를 넣고 함께 끓이는 방법이였다.
추어탕에는 향신양념감으로 조피가루나 방아풀을 넣어야 비리지 않고 진미가 살아난다고 하였다.
추어탕 끓이기는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함경도지방에서는 추어호박장이, 개성지방에서는 추어두부탕이 유명하였다.
닭인삼탕(삼계탕)
닭인삼탕을 옛날에 《삼계탕》, 《효성탕》이라고 불렀는데 효성탕에는 우리 인민들이 간직하고있는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깃들어있다.
먼 옛날에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한자식이 앓고있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의원으로부터 부모를 살리자면 닭과 삼으로 만든 삼계탕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그 효자는 자기 목숨을 바쳐 그것을 구하려고 하였다.
이에 감동된 《신선》이 삼계탕을 선사하였는데 그의 부모들은 그것을 먹고 하루아침에 건강이 회복되였다.
그래서 자식의 지극한 효성이 깃든 탕이라고 하여 효성탕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삼계탕은 옛날에는 닭의 배속에 산삼을 넣고 푹 고아서 만들었었는데 인삼을 재배하면서부터는 인삼을 위주로 썼다고 한다.
삼계탕은 검정닭을 쓴것이 효능이 더 높다고 하였다.
삼계탕은 약효성이 높은 보약재인 유명한 인삼을 썼기때문에 원기회복, 질병치료, 건강을 위해 많이 리용되였다.
룡봉탕의 유래
룡봉탕은 잉어와 닭고기를 함께 넣고 끓인 탕이다.
잉어와 닭고기는 허약한 사람들의 몸을 추겨세우는데 매우 좋은 음식감으로서 예로부터 보신재로 널리 리용되여왔다.
이러한 음식감으로 만든 룡봉탕은 맛이 좋고 원기를 돋구는데서 특효가 있어 오랜 세월 임금만이 먹는 음식으로 되여있었다.
이 음식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헌적인 근거는 없으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상상의 동물인 룡과 봉황새를 물에서 사는 동물과 날짐승가운데서 제일로 일러오며 용맹과 힘, 아름다움과 장수의 상징으로 말하기를 즐겨했던 옛날 사람들이 잉어가 민물고기가운데서 으뜸일뿐아니라 물에서 솟구치면서 요동을 치는 모습이 룡이 공중에 날아올라 조화를 부리는것과 흡사하다는데로부터 《룡》자를 달고 닭이 날짐승가운데서 제일이라는 의미에서 봉황새의 《봉》자를 붙여 룡봉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룡봉탕을 몸보신에 좋다는 의미에서 일명 《보약탕》이라고도 불러 왔다.
추석날의 절식-송편
예로부터 《5월농부, 8월신선》이라는 말이 있듯이 음력 8월은 봄내 여름내 땀흘려 일하던 농민들이 허리를 쭉 펴고 오곡이 무르익는 기름진 들판과 갖가지 향기로운 과일들, 주렁지게 열린 산판을 흐뭇이 바라보며 풍년의 기쁨을 누리는 시기이다.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이 음력 8월의 달밝은 보름날을 풍년농사를 지어놓은 기쁨을 즐기고 돌아간 조상들께 지성을 표시하는 명절로 쇠였다.
이날이 바로 《가을저녁》이라는 뜻을 가진 추석이다.
추석은 아름다운 가을날이라고 하여 《가위날》 또는 《한가위날》, 가을의 가운데 달인 8월의 명절이라 하여 《중추절》이라고 일러오기도 하였다.
세나라시기에는 추석을 《가배날》이라고 하면서 큰 명절중의 하나로 꼽았다.
추석이 가까와오면 사람들은 햇곡식을 먼저 조상들에게 《맛》보인다는 뜻에서 올벼를 베여 쌀을 내고 록두, 팥, 콩 등을 준비하였으며 추석전날에는 명절음식을 만들기에 바쁜 시간을 보냈다.
풍요한 가을철의 명절인것으로 하여 추석날에 만들어먹은 음식은 그 가지수도 많고 맛도 이채로왔다.
그 하많은 음식들가운데서 꼭 놓치지 않고 준비하군 한 음식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송편이였다.
추석날에는 찰떡도 있어야 하였지만 특히 송편이 빠져서는 안되였다.
우리 인민의 생활에서 송편은 추석을 상징하는 떡으로 되여왔다.
그래서 추석날에 만들어먹는 송편은 특별히 《추석송편》이라고 일러왔다. 송편은 솔잎을 깔고 찐 떡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송편의 크기나 빚는 방법은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지방에서는 손바닥만 하게 크게 빚었고 황해도지방에서는 손으로 살짝 눌러서 빚었으며 강원도지방에서는 손으로 막 쥐였다가 놓은것처럼 빚었다.
강원도지방에서는 송편을 감자가루떡반죽에다 당콩소를 넣어서 빚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이 지방의 감자가 앙금이 많이 나고 질적거리지 않으며 맛이 유별난것과 관련된다.
이렇게 만든 송편은 다른 지방의 백미송편에 못지 않는 특식으로 일러주었다.
대체로 추석날에는 송편을 비롯한 떡들을 백미, 찹쌀 같은것으로 만들었지만 이런것이 잘되지 않는 함경도, 량강도지방에서는 그곳에서 많이 나는 귀밀로 떡을 해먹었다.
이곳 사람들은 귀밀떡을 기름을 찰찰 발라 내놓군 하였는데 이것이 얼마나 매끄러운지 예로부터 삼수, 갑산지방에서는 《귀밀떡에 기름을 발라 저가락으로 잘못 집으면 후치령을 넘어간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송편은 추석날뿐이 아닌 여느 다른 명절때에도 특식으로 많이 해먹군 하였다.
특히 지난날 봄철의 명절이였던 일군날에 송편을 만들어먹는 풍습이 이채로왔다.
이날에는 곡식낟가리에서 털어낸 얼마 되지 않는 쌀에 다른 쌀을 보태여 송편을 만들었는데 흔히 자기 나이만한 개수를 먹었다고 한다.
어떤 고장에서는 이날에 집안식구들의 나이를 합한 수만큼 숟가락으로 쌀을 퍼내여 송편을 만들기도 하였다.
송편은 풍요한 가을철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며 빼놓지 말아야 할 추석날의 절식이였다.
밑반찬으로 으뜸가는 젓갈
젓갈은 우리 나라에서만 특이하게 찾아볼수 있는 음식의 하나이다.
옛 문헌에 사람들이 새우를 잡아서 젓갈을 만들어먹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벌써 젓갈을 담글줄 알았으며 그것을 식생활에 널리 리용하여왔다는것을 말해준다.
젓갈품가운데서 맛좋기로 소문난것은 평양의 건뎅이젓과 새우젓, 함경도의 가재미젓, 황해도의 백하젓, 강원도의 오징어젓과 명란젓, 창난젓 등이다.
젓갈은 짭짤하면서 구수한 맛과 향기를 내므로 밥반찬으로 그저그만이다.
젓갈은 수산물을 절구어 보관하는 과정에 그 가공법이 창안되여 생겨난 음식이라고 할수 있다.
봄과 여름은 물이 따뜻하고 먹이원천도 풍부해 바다에 갖가지 수산물들이 많이 모여든다.
그래서 이 계절들에는 우리 나라 전반적연해가 수산물잡이로 붐비군 하였는데 어떤 때에는 잡은 물고기가 너무 많아 부두가에 산더미처럼 쌓이고 지어는 미처 처리하지 못해 썩어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인민들은 이와 같이 어획량이 많은 봄철과 여름철에 잡은 수산물들을 여러가지 손쉬운 방법으로 대량 가공하여 저장하였다가 물고기잡이를 제대로 할수 없는 경우가 많은 가을과 겨울에 식찬으로 리용하군 하였다.
우리 선조들이 흔히 적용한 물고기저장방법은 말리기, 절구기, 얼구기 등이였다.
이가운데서 가장 많이 써온 방법은 소금에 의한 절구기였다.
이 방법으로는 날씨조건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많은 량의 물고기를 단번에 처리할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저장하는 과정에 사람들은 같은 온도조건에서도 소금의 농도가 보다 낮으면 일부 수산물들은 삭으면서 특이한 맛과 냄새를 형성한다는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래서 수산물을 순수 보관을 위해 절이는것과 함께 우정 삭을수 있게 소금의 량을 조절하여 절이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후세에 젓갈로 명명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민들의 식사구성에서 무시할수 없는 밑반찬으로 되게 되였다.
젓갈은 그자체가 직접 찬으로 쓰이기도 하고 김치를 담그는데는 물론 다른 음식을 만들 때 그것의 맛을 돋구기 위하여 적당한 량씩 리용되기도 한다.
노치
노치는 평안도와 황해도지방에서 명절날에 즐겨 만들어먹은 음식이다.
특히 평양의 노치가 유명하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추석이 오면 의례히 노치를 만들어먹군 하였다.
추석전날밤 연푸른 달빛이 은은히 흐르는 뜰안에다 솥을 걸어놓고 노치를 지져서 단지나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고 봉해두었다가 그 다음날인 추석날 저녁에 준득준득해진것을 꺼내여 어른, 아이 할것없이 꼬챙이에 꿰들고 달구경을 하면서 먹는 맛이란 참으로 좋았다.
일부 가정들에서는 이때 만든 노치를 잘 보관해두었다가 가을걷이가 한창 바쁜 때에 하나씩 꺼내먹으면서 당분을 섭취하였다고 한다.